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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Nov 04. 2022

자긴 진짜 보통 아니야.

'보통이 아닌' 부부 이야기


22. 11. 2. 철없는 친정 로컬 푸드

< 사진 임자 = 글임자 >


"아니, 어떻게 자기는 수박이 다 상했다고 곧이곧대로 말을 다 할 수 있어? 그냥 운이 나빴다고 생각하고 갖다 버리면 그만이지."

"엄연히 내 돈 주고 산 건데 속이 상했으니까 가서 얘기는 한 번 할 수 있는 거잖아. 말도 않고 그냥 버려버리면 나중에 가서 말하더라도 그 사람들은 우리가 거짓말하는 줄 알 걸?"

"그래도 그거 수박 하나에 얼마나 한다고 그래? 그냥 무시해."

"뭘 무시해? 만원은 돈도 아니야? 없는 소리 한 것도 아니고 사실을 말하는 건데."

"그래도, 그건 좀 그렇다. 우리가 자주 가는 곳인데."

"자주 가는 곳이니까 더 얘기해 볼 수 있는 거지. 앞으로 안 갈 것도 아니잖아."

"그냥 새로 사 먹고 얘기는 하지 말자."

"아니야. 이런 건 바로 말해 줘야 돼. 시간이 지날수록 안 좋아."


그리하여 우리는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단골 과일가게로 향했다.


때는 한 여름이었고, 어쩌다가 수박이 너무 익어버려 속이 상한 물건이 한 통 정도 운 없게 걸리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폭염이 계속되고 있었다.

단골 과일가게가 집 근처에 있었다.

그 가게 근처만 가도 주인이 우리를 알아보고는 냅다 뛰어나올 만큼 단골 중의 단골이었다.

배달 음식을 먹는다거나 패스트푸드를 즐겨 먹는다거나 간식으로 과자를 사 먹는다거나 하는 행위 따위는 거의 하지 않는 편이었으나 과일만큼은 원하는 대로, 낳을 아이도 없는데 입덧하는 임신부 저리 가라 할 만큼 풍족하게 사 먹던 시절이었다.

외식도 않고 맛집을 찾아다닌다거나 분위기 좋은 카페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눈다거나 하는 행위 따위도 없는 집이 우리 집이다.


그날도 한창 제철인 수박을 4통이나 사 왔었다.

크기는 초등학생 머리만 했다.

그 사건 현장에서 남편이 단골 레퍼토리를 또 시작했다.

"많이 사서 어머님도 갖다 드리자."

시가에서 그의 부모님이 이 소리를 듣는다면 아들이 친부모를 두고 며느리의 부모님을 너무 편애하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처가의 몫까지 챙기신다.

비록 처가에는 가지 않으나 브로커 아내를 통해 종종 일용할 양식들을 전달하곤 한다.

엄마는 언제나 그 이바지들을 하나밖에 없는 귀한 사위 보듯 하신다.

사위의 실체는 점점 더 아리송해지고 물건들은 속속 들어오고.


"일단 두 개만 사도 될 것 같은데 먹어보고 괜찮으면 또 사면되지. 우리 둘이 먹어봤자 얼마나 먹는다고? 우리 집도 엄마 아빠밖에 안 계신데 한 통만 드려도 되고."

"에이, 언제 또 사러 나와? 살 때 사버려야지."

'살 때 사버려야 한다'는 그 무시무시한 말은 헌법에라도 나와 있단 말인가.

사위의 의무 5번째쯤?

집에서 과일가게까지가  100리인가.

아니면 머나먼 땅 서역 만리라도 된단 말인가.

엎어지면 정수리 닿을 곳에 위치해 있건만 한탕주의를 사랑하는 남편은 일단 마음먹었을 때 다 해치워버리자는 식이다.


가능한 한 나는 필요한 만큼만 적당히를 주장하지만 남편은 일단 (본인이 생각하기에만) 싸다고 생각되면 저지르고 보는 성격이다.

마침 한 통에 7,000원인 수박을 우리에게 두 통에 1만 원에 주겠다는 과일가게 주인의 솔깃한 제안에 남편의 귀는 닳아 없어지고 말았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손이 큰 남자, 아니 단순한 남자다.

아무리 싸더라도 먹을 수 있을 만큼만 사는 것이 진짜 싸게 사는 것이라고 그렇게 말을 해도 이미 귀가 없어진 그는 귓방귀를 뀔 수 없었고, 콧방귀도 안 뀌었다.

"그리고 여름엔 수박 잘 상한단 말이야. 한 통도 다 먹으려면 며칠은 걸리겠구만 뭐하러 그렇게 많이 사?"

나름 경고도 했었다.

그러나 살림의  '살'자도 모르는 그 양반은 이미 '그 정도면 싸게 파는 것'이라는 주인의 향기로운 말에 눈멀고 귀 멀었다.

부부의 사고방식이 너무 다를 때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은, 특히나 함께 시장을 보러 간다는 것은 참으로 고약한 일이다.

그래서 최근 7~8년 내에 우리 부부는 같이 시장을 보러 가지 않는다.


한 번 과일 가게에 들를 때마다 기본이 몇 만 원씩이다.

많을 때는 한 달에 몇 십만 원을 쓸 때도 있다.

내가 의원면직을 하자 대뜸 가장 먼저 한다는 말이

"이젠 예전처럼 과일은 못 사 먹겠네."

였다.

"과일 좀 덜 먹는다고 사람 안 죽어. 그리고 이미 다 커버렸고 더 이상 클 일도 없잖아. 그동안 먹어둔 게 많아서 몇 년은 괜찮을 거야. 우선 그걸로 되새김질하고 살고 있으면 돼."

위로의 말을 전했지만 그는 시무룩했다.


난데없이 만수르로 빙의한 남편은 기어코 수박을 4통이나 사고야 말았다.

만약 우리 할머니가 그때까지 살아 계셨다면 감을 좋아하던 내게 '과수원으로 시집가라'라고 하셨듯이 손주 사위에게도 '다음번 결혼 때는 과수원으로 장가가시게' 하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진짜 싸다 싸. 이거 완전 거저 아냐?"

"속을 봐야 진짜 싼 건지 아닌지 알지."

"얼른 두 통은 어머님 갖다 드려."

"일단 상태가 어쩐지 한 번 잘라 보고."

그러나 집에 도착해 참을성 없이 수박을 갈라 본 남편의 입에서는 탄식이 새어 나왔다.

한 통이 상했다.

나머지 세 통이 있으니까, 한 통 정도야 뭐.

두 번째를 갈랐다.

실망시키지 않았다.

역시 상했다.

남편의 반토막 난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세 번째 희생물을 갈랐다.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은 풍경이 펼쳐졌다.

마지막으로 무언가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나머지 한 통을 갈랐다.

다행히 무사했다.

아, 그는 그리하여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수박 한 통을 거금 2만 원씩이나 주고 산 셈이다.


그러면 안 되었지만 내가 원망의 소리를 잠깐 했다.

나도 어찌해 볼 수 없는 본능이었다.

"그러길래, 뭐하러 이렇게나 많이 사 가지고 그래?"

"내가 이렇게 다 상했을 줄 알았나."

"이런 건 가서 말해야 돼. 물론 일부러 그런 것만 골라서 주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말을 해야 알지."

남편은 한사코 말렸으나 어차피 친정에 수박 사준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그를 재촉해서 운전석에 앉혔다.

안 좋은 일일수록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못마땅해하면서도 그는 순순히 과일가게로 향했다.


"아까 수박을 네 통이나 샀는데 세 통이 상해서 다 버렸어요. 그래서 다시 사러 왔어요."

상한 수박을 팔았던 점에 대해 따지러 온 게 아니라 불미스러운 일로 인하여 다시 사러 올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재차 강조했다.

"아, 그러셨어요? 그럼 다시 드려야죠. 죄송해요. 새로 드릴게요."

과연 양심적인 상인이라며 나는 속으로는 감탄을 했고 남편은 말없이 수박을 차에 실었다.

과일은 겉모습만 보고는 그 맛도 속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니 어쩌다 저런 불운이 있을 수는 있으려니 한다.

하지만 남편이 말하는 그 '단돈 2만 원'이 아까워서라기 보다 소비자로서 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내 말이 다 맞지는 않을 수도 있다.

사람마다 생각은 다 다른 법이니까 말이다.


요즘은 마트에서 과일을 상자째 사가서 이상이 있으면 통째로 들고 가면 바로 교환도 해준다는데 내 행동이 너무 야박하게 생각됐던 것일까?

남편은 혀를 내둘렀다.

깍쟁이 같다고도 했다.

그러나 나는 깍쟁이는 아니므로 크게 마음에 두지 않는다.

" 자기도 정말 대단해."

"뭐가?"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잖아. 그걸 꼭 당장 가서 그렇게 해야겠어?"

"내가 그렇게 잘못한 거야? 안 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처럼 가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걸?"

실제로 나는 훗날 친구와의 전화통화에서 사건의 전말을 얘기하고 그녀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다.

두 명 모두 내가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했다.

두 명의 지지자를 확보한 셈이다.

한 친구는 나보다도 더 흥분을 하며 그게 뭐가 잘못됐냐며 내 역성을 드는데 그 격앙된 감정이 진심으로 다가와 눈물까지 찔끔할 뻔했다.


"아니지, 누가 그거 수박 값 얼마나 한다고 가서 말해? 자기나 되니까 말하지."

옛날 여자 친구는 그냥 좋게 좋게 넘어갔나 보구만?

"자꾸 그거 돈 얼마 안 된다고 그러는데 날마다 나한테 돈 벌기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 2만 원은 돈도 아니야? 그 돈을 벌기 위해서 자기가 어떻게 지금 일하고 있는데 그래? 생각해 봐. 어디 주워 온 돈으로 샀어?"

"그건 아니지. 또 듣고 보니 자기 말도 일리가 있네."

수긍이 굉장히 빠른 이 남자, 어쩌면 좋담?


"그래도 누가 자기처럼 행동해? 아무튼 진짜 보통 아니야."

"뭐가 보통이 아니야?"

"암튼 보통 아니라고."

상한 수박을 상했다고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애초에 교환을 원하거나 환불을 받자고 한 일도 아닌데 졸지에 아내를 세상 드센 여자를 전락시켜 버리다니.

태어나 처음으로 드세다는 말을 들었다.

그 후로도 그는 종종 내게 그렇게 말을 했다.

뭔가 적절한 어휘 선택은 아닌 듯 보였으나, 그 말은 맞지 않다고 항변했으나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나도 속마음을 솔직히 고백했다.



"보통 아닌 건 자기도 마찬가지야."

"내가 왜?"

"자기도 보통 아니야."

"내가 뭘?"

"자긴 보통 이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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