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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는 3시에 떠나네

나의 (5일장) 아저씨

by 글임자
2025. 6. 26 .

<사진 임자 = 글임자 >


"엄마, 이런 게 갓성비야. 진짜 잘 샀어."

"네 말이 맞다. 마트 어딜 가도 이 가격에는 지금 못 사. 엄마 오늘 정말 뿌듯하다."

"그렇겠다."


아들과 주거니 받거니 오늘 내가 이룬 쾌거(?)에 대해 호들갑을 한참 떨었다.

시중보다 조금 더 싸게 산 물건이 있으면 그렇게 보람차고 뿌듯할 수가 없는 아줌마의 마음, 감출 길이 없었다.


난 아저씨만 믿고 기다렸다.

그분은 거기 계실 것이다.

오후에 나서야 한다.

점심 시간대를 지나서, 해가 이글이글하다 못해 어지러울 지경이 될 때쯤이 딱이다.

2시 반에서 3시 사이를 노렸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믿는 아저씨는, 그분은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물론 나만 기다린 것이 아니라 다른 손님들을 기다렸을 것이다.)

"지금부터 수박이 두 통에 만원, 두 통에 만원. 얼른 와서 골라 보세요!"

5일장 입구에 들어서는데, 입구에 있는 수박 장수 아저씨네 수박을 눈여겨보던 중이었는데, 당장 축지법을 써서 그 방송이 흘러나오는 차로 달려갔다. 자꾸만 아저씨 목소리가 멀어지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보통 차를 천천히 움직이면서 저런 방송을 하시는 분들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차를 뒤쫓아 가 기어코 과일이거나 야채거나 하다못해 생선이라도 산 적이 꽤 있었다.

그분을 놓쳐서는 안 돼.

어떻게 해서든지 만나야만 해.

그것도 지금 당장.

저 녹음된 목소리가 더 멀어지기 전에...

수박이 한 통에 5천 원 이라는데 인정상 사지 않을 수 없다.

두 통에 만원이라는데 이고가든 짊어지고 가든, 하다못해 살살 굴려서라도 기본으로 두 통은 사야 할 의무감마저 느꼈다.

아저씨의 차 주변에는 나처럼 솔깃해서(당연히 솔깃한 가격에 끌려 다들 나오셨으리라 혼자 마음대로 짐작했다. 세상 사람들 마음은 대개가 나 같지 않은데, 이렇게나 파격적인 가격에 수박을 파는 소리를 듣는다면 온 동네 사람들이 대동단결하여 수박을 사러 나올 것이라고, 이럴 때만큼은 다들 내 마음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손님이 여럿 있었다.

한 통에 5천 원짜리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수박은 외관도 깨끗하고, 전혀 시든 기색도 없고(과일 보는 안목이 그리 뛰어나지 않은 나는 수박 꼭지라도 달려 있으면 그나마 싱싱한 것, 꼭지가 다 떨어져 나가 흔적도 없으면 약간 시든 것이라고 마음대로 잣대를 들이댄다.) 게다가 크기도 제법 컸다.

수박 배꼽이 작을수록 단 것이라는 말을 듣고(하지만 이 또한 항상 그렇지 않음을 경험한 적이 몇 번 있긴 하다.) 최대한 배꼽이 깨알만 한 것으로 하나 골라서 다짜고짜 봉지에 담으려는데 무게가 꽤 나가는 것이었다.

아무리 해 보려고 해도 잘 안 돼서 결국 나는 나의(누구 맘대로? 그분의 동의도 없이?) 아저씨께 부탁드렸다.

"봉다리에 좀 담아 주세요."

친절한 아저씨는 나의 부탁을 기꺼이 들어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이놈도 맛있어요."

내가 나머지 하나를 못 고르고 망설이자 자신 있게 하나를 골라 주셨다.

황송한 나는 얼른 만원을 건네고 낑낑거리며 양손에 하나씩 수박을 들었다.

미련한 손님은 집에 가져갈 때 수박이 무거울수록 얼마나 힘이 드는지 따위는 미처 생각도 않고, 무조건 큰 것만 골랐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 같은 5천 원짜리면 더 무거운 걸로!

물론 과거에 과일 장수들의 추천('이놈이 맛있다'는 그런 종류의 영업 방식)으로 믿고 사 왔는데 실패한 경우도 더러 있긴 했지만 날씨도 덥고, 무엇보다 5만 원도 아니고 5천 원짜리인데(그렇다고 내가 5천 원의 화폐가치를 무시한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수박맛이 아니나고 물맛만 나더라고 눈 질끈 감고 감수할 마음이었다.

이런 걸 고급 전문 용어로 '밑져야 본전'이라고 한다지 아마?

이미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고, 이미 봉다리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린 수박을 다시 봉다리 밖으로 꺼낸다는 건 아저씨에 대한 예의도 아니었으므로.

요즘 마트에 가면 저 정도 크기의 수박은 만 오천 원 정도 하는 것 같았는데 5천 원이면 완전 거저라며 흡족해하다가 행여라도 맛이 없으면 어쩌나 내심 불안하기도 했다. (싼 데는 이유가 있다는 느닷없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던 거다.) 잘은 모르지만 한 통에 10 킬로 가까이 되는 것 같았는데, 무조건 크다고 사 왔는데 이젠 저것들을 어떻게 냉장고에 넣나 그게 더 걱정될 지경이었다.

무사히 수박 두 통을 집으로 모셔와 깨끗이 씻고 하나를 냉장고에 넣었다.

저녁을 먹고 시식할 생각이었다.

"우와, 엄마. 봐봐 진짜 잘 익었어."

아들이 수박을 잘라 보더니 탄성을 질렀다.

"그래? 한번 먹어 보자. 맛도 있는지."


나의 아저씨는 나를 속이지 않았다.

달았다.

나는 또 다음 기회를 노릴 것이다.

오후 3시가 되기 전에 그분을 만날 것이다.


"5일장은 오후에 장이 파할 시간에 가면 떨이로 파는 게 있어서 진짜 싸게 살 수 있는 게 많아. 오늘도 그래서 엄마가 그 시간에 가 본 거야. 기억해. 오후 3시 좀 전에, 그때가 기회야. 사람들이 다 못 판 물건들을 싸게라도 팔고 해치우고 가려고 하거든."

수박을 먹으며 아들에게 특별 과외를 해줬다.

"아, 그런 거였어? 알았어. 엄마."

아들의 눈이 반짝,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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