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데없이 모녀 대결
<사진 임자 = 글임자 >
"그러고 보면 엄마들은 정말 대단해."
아들이 한밤중에 제 누나에게 한마디 했다.
"맞아. 엄마들이 좀 그렇긴 하지."
동생의 말에 완전 동의하며 딸은 나를 한 번 쓱 봤다.
"근데, 누나. 우리 엄마가 대단하긴 한데 더 대단한 사람은 외할머니야. 안 그래?"
"그것도 진짜 맞아. 역시 엄마보단 할머니지."
둘이 주거니 받거니 쿵짝이 잘 맞았다.
엄마도 대단한데 외할머니는 더 대단하다고?
뭐 좋은 말이겠지?
"엄마, 에어컨 좀 틀자. 너무 더워."
"덥긴 뭐가 덥다고 그래?"
"엄마, 엄마가 더위는 안 타는 거 아니야?"
"안 타긴. 엄만 더위라고는 몰랐던 사람인데 너희 둘 낳고 완전 체질 바뀌어서 더위 엄청 타는데."
"근데 안 더워?"
"그렇게 더운 줄 모르겠는데?"
"에어컨 좀 틀자, 엄마."
아들과 딸이 사이좋게 번갈아 가며 내게 사정을 했다.
하교 후 4시 넘어서부터 내내 에어컨을 틀었고 시원해진 것 같아서 송풍으로 바꿨다가 끈 지 한 시간도 안된 시간이었다.
"공기가 시원해졌잖아. 선풍기만 틀어도 시원한데 에어컨 틀자고? 이제 곧 자야 하는데 너무 추우면 안 돼. 감기 걸려."
"너무 더워서 그래."
아들은 짐짓 과장된 몸짓으로 웃옷을 격하게 펄럭거렸다.
"그래, 엄마. 나도 더워."
긴 머리를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린 딸도 한 마디 보탰다.
"머리나 묶어. 머리를 그렇게 풀고 있으니까 답답하고 덥지. 엄마처럼 머리띠도 하고 다 묶어 봐. 그러면 그렇게 안 더워."
사실이다.
덥다면서 머리카락을 저렇게 산발하고 있으니 아니 덥겠는가.
온종일 이거 하다 저거 하다 이리저리 다니며 집안일을 하는 사람은 정작 나인데, 남매는 가만히 앉아서 강의를 보고 있는데 왜 덥다는 거지? 땡볕에 나앉아 있는 것도 아닌데?
여태 에어컨 틀었다가 끈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선풍기 바람 쐬고 있으면 솔직히 덥지는 않을 텐데.
아이들이 너무 편한 것에만 길들여진 것 같다.
참지 못하는 것 같다.
"하여튼 엄마는 대~단해."
뭐가 대단하다는 거지?
밤 10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고 정말 거실 공기는 베란다 공기와 확연한 차이가 느껴질 만큼 시원했다.
내 생각에 아이들은 무조건 '일단 '말이나 해보는 것 같았다.
내가 무조건 궁상맞게 구는 것은 아니다.
더울 땐, 그리고 우리 집 멤버 넷이 모두 같이 집에 있을 때는 가능하면 에어컨을 튼다. 우리 집 어느 멤버가 더위를 참지 못하니 솔선수범(?)하며 조금만 덥다 싶어도 틀어 버린다. 그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감안하여 누구인지는 차마 밝힐 수가 없다.
"더울 땐 틀어. 그거 얼마나 한다고?"
얼마나 하긴? 많이 한다, 많이.
여름철 전기 요금 무시 못한다.
당장 편하자고 마구마구 전기를 써버리면 나중엔 어쩌려고?
어느 정도 견딜만하면 견디는 일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나와는 달리 우리 집 어떤 멤버는 그런 건 신경조차 안 쓰는 느낌이다.
"더우니까 에어컨을 틀고 그래서 더 지구가 더워지고 그 더위를 식히려고 또 틀고.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될까, 얘들아?"
남매에게 종종 이런 말을 하면 어렸을 때는 그나마 교과서적인 답을 들려주곤 했다.
"엄마, 물 아껴 써야 해. 우리나라가 물 부족 국가인 거 알지? 그리고 전기도 아껴야 돼. 지구 온난화가 얼마나 심한지 알아? 덥다고 에어컨부터 틀면 안 돼. 알았지? 자, 내가 만든 부채야. 이건 전기도 안 드니까 좋아."
이렇게 말하며 직접 만든 허술한 부채를 자랑스럽게 내밀지 않았더냐.
초등 저학년 때는 저렇게 신통방통하게 말하던 아이들이었지만, 이젠 좀 컸다.
"엄마, 손으로 부채질하면 손이 얼마나 아픈데 그래? 안 그래도 더운데 더 덥다고. 그리고 손목도 아파. 에어컨 좀 틉시다!"
이렇게 반응하기 일쑤다.
"그래도 엄마는 에어컨 틀긴 트는데 외할머니는 진짜 대단해. 에어컨 잘 안 트셔."
아들이 갑자기 외할머니가 얼마나 대단한가에 대해 얘기했다.
"할머니는 참을 만하시면 참으시는 거지. 한여름 땡볕에서 농사일도 하시던 분이니까. 그래도 너희 갈 땐 에어컨 틀어 주시잖아."
무언가 견뎌 본 기억이 있는 사람들은 나름 견디는 법을 아는 것 같기도 하다.
나도 더울 때 있다.
계절의 변화를 내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노릇이니 어느 정도는 감수하지만 일일이 추위와 더위에 당장 편하게만 살려고 하면 정말 나중에는 어떻게 될까?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정말.
난 진심으로 걱정스럽다.
작년이 우리나라가 기상관측을 시작한 이래 역대 최고로 무더운 해였다던가? 폭염 일수도 최다였다지?
저런 뉴스를 듣고 있으면 절로 나오는 내 한숨이 한여름 열기보다 더 뜨겁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