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지 못한 어머님의 약속
< 사진 임자= 글임자 >
"어머님, 저희 내일 갈게요."
"그래? 바쁠 텐데 올래? "
"이번 설에는 그냥 간단히 해요, 어머님."
"그래. 그냥 김치에 밥만 먹자."
"진짜로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걱정 말아라. 나 아무것도 안 했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저번에도 다 준비해 놓으셨잖아요?"
"진짜 이번엔 아무것도 안 할란다."
"진짜로 아무것도 안 하실 거죠?"
"걱정 마라. 그래도 너희가 온다니까 고맙다."
정작 항상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며느리이건만 어머님은 그저 전화 한 통화만 드려도 고맙다고 매번 말씀하신다.
그 진심이 얼마나 애정 넘치는 것인지를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엄마가 이번엔 정말 아무것도 안 하실 건가 봐."
"그래?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항상 다 해 놓으시잖아."
"아니야. 이번엔 정말 아무것도 준비 안 하시는 것 같았어."
"그래?"
"그렇다니까!"
"정말 이번엔 간단히 하시려나?"
"진짜 그러실 건가 봐. 아무것도 안 한다고 신경 쓰지 말래."
"과연 그러실까?"
"아무튼 이번엔 진짜 준비 하나도 안 하신 것 같다니까?"
"그래. 어머님도 힘드신데 혼자 준비하시기 벅차지. 할 거면 내가 가서 같이 하면 되는 거고."
"이번엔 좀 편히 있다 올 수 있겠다. 엄마가 김치만 놓고 밥 먹자고 하시더라고."
"글쎄, 과연 정말, 김치만 나올까?"
남편은 음식만 안 하면 무조건 며느리는 편하다고 착각하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겠다는 '어머님의 말씀 찬스'를 내게 절묘하게 활용하며 의기양양해했다, 고 나는 생각했다, 느꼈다.
시가는 우리 집이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도 결코 편할 수 없는 며느리의 입장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어머님과 통화를 마치고 이번에야말로 우리의 바람대로(시가 가족 대다수의 바람대로) 어머님이 명절 음식을 간단히 최소한으로만 하시는 역사적인 순간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설렘과 '정말 명절 음식이 준비가 하나도 안 되어 있을까?" 하는 긴가민가 하는 마음, 그 사이에서 '과연 반찬이 김치 하나만으로 그칠까?' 하는 것이 우리의 최대의 관심사였다.
그전에도 어머님은 혼자서 미리 며칠 전부터 준비를 다 하시고 어느 정도 음식을 장만해 두시고도 시치미를 딱 잡아떼시며 우리 보고는 아무것도 안 했다고, 와서 나보고 준비하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하지만 10년 넘게 겪어 보니 그건 으레 며느리를 생각해서 하시는 당신만의 '명절맞이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젠 연세도 있으신 데다가 최근에는 몸이 안 좋아지셔서 나는 '며느리살이 '12년 만에 진심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최초의 역사적인 명절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은근히 기대감에 부풀어 있기도 했다.
책을 세 권이나 챙겨갔다.
"엄마가 진짜 아무것도 안 하셨나 봐. 시장도 안 보신 것 같은데?"
"아, 그래?"
"응, 누나도 설날 아침에 온다고 하고."
"정말? 진짜 이번엔 뭔가 좀 다르네?"
"응. 그러니까 이번엔 김치에 밥 먹고 고기나 좀 사서 간단히 구워 먹고 오자. 그럼 편하잖아."
"그래. 그것도 괜찮지. 요즘 누가 못 먹고사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렇지."
"그래도 혹시 필요한 게 있을 수 있으니까 전화해서 사 가야겠다."
"뭐가 있겠어? 그냥 우리가 고기나 사 가면 되지."
"그래도 전화해서 알아봐야지. 이왕이면 필요한 걸 사다 드리면 좋지."
"알았어. 전화해 볼게."
"그리고 이미 집에 있다고 한 것들은 이중으로 굳이 사지 말고 차라리 용돈을 더 드리자. 난 그게 더 나을 것 같아. 어머님 필요한 데 쓰시라고."
그러나, 시가에 도착하니 이번에도 설마설마했던 일이 역시나가 되었다.
고사리나물, 김국, 애호박나물, 시금치나물, 생선구이, 꼬막무침, 갑오징어초무침, 석화 찜, 또 뭐가 있었더라?
결정적으로 토요일에 둘째 시누이가 이미 도착해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분명히 일요일 설날 아침에 오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말이다.
그래도 전에 비하면 음식 가짓수가 좀 줄어든 것 같기는 했다.
"어머님, 아무것도 안 하신다면서요?"
"응, 나 아무것도 안 했다."
"무릎도 안 좋으신데 또 고생하셨겠네요."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어."
"아이고 어머님, 이거 다 혼자서 만들려면 얼마나 힘든데 그냥 저 오면 같이 하시지."
"내가 뭘 했다고 그래?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음식 솜씨가 좋으신 어머님은 가족이 다 모이는 날이면 종종 실력 발휘를 하시곤 한다.
우리야 맛있게 먹고 싸가고 해서 좋긴 하지만 칠순을 넘긴 분이 저 많은 음식들을 며칠 전부터 준비하시느라 고생했을 걸 생각하면(옆에서 우리 엄마를 보고 자라 잘 안다, 그 과정부터가 얼마나 고생스러운 일인지를) 고마운 마음이 들면서도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이다.
"어머님. 저도 집에서 음식 다 만들어 먹고 하니까 이렇게 무리해서 하지 마세요."
"내가 뭘 했다고 그러냐. 아무것도 안 했는데."
자식들, 손주들 입에 음식 들어가는 모습을 세상 흐뭇하게 바라보시며 아들, 손자, 며느리, 사위가 음식이 맛있다고 연신 감탄하는 그 순간을 기분 좋게 만끽하시는 당신의 행복 앞에 감히 며느리가 뭐라고 가로막고 나서랴.
친정 엄마 같았으면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잔소리를 했겠지만 '그곳은 시가'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했다.
"그래도 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엄마?"
시누이가 갑자기 운을 뗐다.
"그럼 전 좀 부칠래?"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어머님이 격하게 환영하셨다.
마치 누구라도 그 순간 아무 전이라도 부치겠다는 그 말을 해 주길 기다려 오셨다는 듯이...
그리하여 나는 시누이와 함께 가로 80cm, 세로 40cm짜리 사각 전기 팬에 아주 간단하게 애호박 전과 새송이버섯 전을 5판 부쳐냈다.
어른들도 어른들이지만 아이들이 정말 맛있다며 앉은자리에서 부치는 족족 집어먹기 바빴다.
나도 전을 좋아하는 편이라 집에서도 종종 부쳐 먹는다.
5판 저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도 다들 맛있게 드시니 음식 한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그래 이 맛에 음식 하는 거지, 어머님도 같은 마음이실 거야.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완판 했다.
안타깝게도 그 시각에 낮잠에 빠져있던 마흔한 살의 1인 누군가는 접시에 남은 식용유 구경조차도 못했다.
예로부터 '나간 사람 몫은 있어도 자는 사람 몫은 없다.'더니 .
정말 나도 이번 설에는 어머님처럼 아무것도 안 했다.
"이렇게 해서 바로 먹으니까 좋구나, 며늘아."
"그러게요, 어머님."
"앞으로는 조금씩만 해야겠다."
"아니, 어머님 앞으론 하나도 안 하신다면서요? 분명히 이젠 안 하신다고 하셨잖아요?"
"허허, 내가 그랬냐?"
"다음부터는 적당히 조금만 해서 바로 그 자리에서 다 먹고 치워버려요 어머님. 전은 나중에 데워 먹으면 맛도 없어요."
"그래. 그것도 좋다. 이렇게 다 맛있게 먹고 치우니까 세상 좋다."
"아유, 이거 별로 힘든 것도 아닌데요 뭘."
"그래도 고생했다, 고맙다."
"고생은 어머님이 많이 하셨죠. 그러니까 앞으로 전은 한번 먹을 만큼만 딱하고 치워요, 어머님. 꼭이요."
극적으로 타결된 고부 사이의 합의였다, 고 또 나만 생각했다.
< 명절에 아무것도 안 한, 복에 겨운 며느리의 설날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