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 : 200, 사돈 남 말하는 사돈들

속담의 기원을 찾은 것 같다.

by 글임자
23. 2. 1.

< 사진 임자 = 글임자 >


<시가에서>

"엄마 보고 일 좀 줄이시라고 해라.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이 일 안 하고는 못 산다마는 이제 그만하셔도 되지 않냐?"

"자꾸 말해도 그게 쉽게 안 되시나 봐요."

"그래. 그럴 거다. 눈으로 보고 안 할 수도 없고, 또 일하던 사람이 안 하면 몸이 더 아프기도 한단다."

"그러게요. 그래도 이젠 정말 쉬어도 될 것 같은데 말이죠."

"그래도 엄마한테 아예 일하지 말라고는 하지 말아라. 대신 조금만 하시라고 해."

"네, 근데 어머님도 일 더 줄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나는 아무것도 안 한다. 올해도 아무것도 신청 안 했어."


어머님의 단골 멘트는 요즘 들어 언제나

"나는 아무것도 안 했다. 아무것도 안 할란다."

였다.


<친정에서>

"엄마. 어머님은 무릎도 안 좋으신데 올해도 고추를 200주나 넘게 심으신다고 합디다."

"아이고, 아프다는 양반이 무슨 고추 농사를 한다고 하신다냐?"

"그러게 말이오. 아버님도 무릎 안 좋다고 하시던데."

"고추 농사 그거 보통 일 아니다. 고추같이 농약 자주 하는 것도 없어야. 고추 딸 때는 오죽 덥냐? 어떻게 그 농사지으시려고 그러신다냐?"

"올해 어머님 무릎 수술도 해야 되는데 그럼 일 못하시잖아?"

"큰일 난다. 수술하고 1~2년은 아무것도 안 해야 써. 좀 괜찮다고 일하믄 도로 아미타불이여. 나중에 더 고생해야."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

"얼른 전화해서 모종 주문하셨으믄 취소하시라고 해라."

"알았어."

스파이는 아니지만(차라리 '사돈들의 메신저'라고 해 두자.) 시가에 가서는 엄마 이야기를, 친정에 가서는 어머님 이야기를 공평하게(?) 사실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 상황 보고를 하며 피드백을 하는 것이 나의 주요 업무다.


친정에서는 어머님 보고 일 줄이시라고 해라, 시가에서는 엄마 보고 일 줄이시라고 해라, 양가 어머니들 사이에서 은근히 사돈끼리 상대방 저지하기(?) 배틀이 시작되었다.

이미 칠순을 넘기긴 어머님과 내일모레 칠순을 바라보는 엄마는 당신들이 스스로 농사일을 줄일 생각은 안 하시고 상대방에게 이를 강력히 요구하시는 것이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고 농사일도 사돈이 먼저 줄이는 게 낫다는 논리일까?


"어머님은 올해 고추 200주 정도 하신다는데 엄마는 올해 얼마나 심으실라우?"

"나는 얼마 안 해. 600주만 할란다."

"그 정도면 많은 거 아니야?"

"그까짓 것이 뭣이 많다냐? 우리 먹고, 자식들 주고, 형제 간들 나눠주고, 사돈들 좀 주고, 그라믄 없어."

"여기저기 나눠 줄 생각하지 말고 그냥 아빠랑 둘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라니까."

"고추 600주 그것이 얼마나 된다냐. 그것만 쬐까 할란다."

야금야금 풋고추부터 시작해서 고춧가루며 고추장까지 정기적으로 받아먹는(물론 그 양은 미미하다.) 나는 여기서 더 나갔다가는 '잔소리 듣기도 싫다.'라는 엄마의 공격을 받을 게 뻔했으므로 잠시 숨을 고를 필요가 있었다.


벌써부터 숨이 막혀 오는 것 같았다.

뙤약볕 아래 두 노모의 굽은 허리가 불현듯 떠올랐다.

600주면 고추 모종이 600개란 소리다.

거기서 한 주마다 (과장 좀 하자면) 고추가 또 얼마나 수 백개씩 주렁주렁 열릴까.

60개도 많다고 느껴지는데 도대체 얼마나 많이 매운맛을 보시려고 엄마는 그러시나?

그러면서도 엄마는 시가 부모님을 걱정하시고 있다.

"고추 따기가 보통 일인 줄 아냐. 두 양반들이 연세도 있으신데 큰일 난다, 큰일 나. 고추 못 심으시게 해라. 그거 조금 사다 먹으면 그만이제. 모종 값 주고 농약값 빼고 땡볕에서 고생고생해서 고추 따느니 그냥 사 먹고 말제. 인건비도 안 나와야. 거기 들어가는 돈이믄 가만히 앉아서 편하게 사다 먹고도 남는다. 탄저병이라도 와 봐라.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수확은 안 나고... 인건비도 안 나와. 아이고 얼른 전화드려라, 얼른."

엄마는 당장 당신 무릎이 쿡쿡 쑤셔대서 아픈 것처럼 나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올해는 가뿐히 고추 모종 600주만 심겠다는 엄마가 200주를 심겠다는 어머님께 하실 말씀은 솔직히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엄마도 순수하게 두 분 드실 거랑, (나를 반드시 포함해서) 자식들 나눠 줄 거랑 사돈들 좀 줄 거랑 그 정도만 하면 그렇게까지 많이 안 심어도 될 텐데, 하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 이런 식으로 판이 점점 커지는 거였구나...

어느새 나도 묘하게 설득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는 늘 말씀하신다.

"어차피 우리 먹을라고 농사짓는 거 쬐끔만 더 해서 나눠 먹으믄 돼."

라고 하시지만 내가 느끼기엔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어지간한 농가 못지않게 우리 집 농사 양은 제법 된다.


< 나의 총평 >

사돈들이 정말 사돈 남 말만 하신다.

아마도 그 말의 기원은 사돈들의 고추 모종 사건으로부터 유래되지 않았을까, 가만 생각해 보았다.

참으로 핵심을 잘 간파한 속담이 아닐 수 없다고 혼자만 감격스러워했다..

아울러, 조만간 '고추 농사 영농일지'라든지 '사돈판 농사직설'이라도 집필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쓸데없고도 얼토당토않은 부담감마저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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