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

영화 <소공녀>

by ontm

점심 식사 후, 습관처럼 향하던 카페 앞에서 잠시 망설인 적이 있습니다. 부쩍 오른 밥값 때문에 커피 한 잔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날이었거든요. “이게 뭐라고 고민하나” 싶다가도, 결국 발길을 돌리며 묘한 서글픔을 느꼈습니다. 줄어든 통장 잔고보다 더 아쉬운 건,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주던 찰나의 여유, 그 작은 틈이 사라졌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합니다. 더 좋은 집, 안정적인 미래를 위해 당장의 즐거움을 유예하곤 하죠. 그래서인지 저는, 세상 모두가 참으려고 할 때 정반대의 선택을 한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집은 포기해도 취향은 포기 못 하는 그녀,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입니다.


#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


하루 한 잔의 위스키, 한 모금의 담배,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친구. 가사 도우미로 일하는 미소에게 이 세 가지는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안식처입니다. 하지만 새해가 되자마자 담배 가격이 오르고, 월세마저 치솟습니다. 수입은 그대로인데 나가는 돈만 늘어난 상황. 보통 사람이라면 담배를 끊거나 더 싼 술을 찾았겠지만, 미소는 계산기를 두드려본 뒤 덤덤하게 결단을 내립니다.


“집을 뺄게.”


그녀는 자신의 유일한 행복들을 지키기 위해, 비바람을 막아줄 집을 포기합니다. 캐리어 하나를 끌고 거리로 나선 그녀의 모습은 무모해 보이지만, 한편으론 기이할 정도로 평온해 보입니다. 남들이 보기에 필수적인 것을 버리고, 불필요해 보이는 것을 택한 그녀. 과연 미소의 여행은 어떤 모습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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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인의 방에서 발견한, 틈이 없는 삶들


집을 나온 미소는 대학 시절 밴드 동아리 멤버들의 집을 하나씩 찾아가 신세를 집니다. 친구들은 그럴듯한 직장과 번듯한 아파트를 가졌지만, 정작 그들의 얼굴엔 ‘미소’가 없습니다. 링거를 꽂고 야근을 밥 먹듯 하는 친구, 시부모 눈치를 보며 자신을 지우고 사는 친구, 이혼의 상처를 안고 껍데기만 남은 집을 지키는 친구.


아이러니하게도 ‘집 있는’ 그들의 삶은 너무 빽빽해서 숨 쉴 틈조차 없어 보입니다. 반면, 집 없이 떠도는 미소는 친구들의 헝클어진 살림을 정돈해주고, 따뜻한 밥 한 끼를 지어줍니다. 영화는 묻는 듯합니다. 물리적인 공간으로서의 집은 있지만 마음 뉠 곳 없는 그들과, 몸 뉠 곳은 없어도 마음만은 온전한 미소 중 누가 더 가난한 사람인가를 말이죠.


# 나를 지키는 단단한 위로, 위스키 한 잔


미소에게 위스키 한 잔은 단순한 술이 아닙니다. 고된 노동을 마친 뒤, 복잡한 세상을 잠시 잊고 오롯이 ‘나’로 돌아가게 해주는 의식이자 휴식입니다. 거창한 휴가가 아니더라도, 남들이 보기엔 쓸모없어 보이는 시간일지라도, 내가 나임을 확인시켜 주는 최소한의 무언가.


영화 속 미소는 집은 없지만 자신만의 여행을 계속합니다. 비록 머리카락은 하얗게 세어가고 텐트에서 잠을 청할지언정, 그녀는 자신의 취향을 잃지 않았기에 품위를 잃지 않습니다. 세상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리듬으로 뚜벅뚜벅 걷는 그녀의 뒷모습은 우리에게 묵직한 울림을 줍니다.


# 당신의 ‘위스키’는 무엇인가요?


영화가 끝나고 나면 묘한 부끄러움과 함께 질문 하나가 남습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 나는 무엇까지 포기할 수 있을까? 반대로, 세상이 다 무너져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나만의 것은 무엇일까?”


누군가에겐 퇴근길에 듣는 음악일 수도, 주말 아침의 늦잠일 수도, 혹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10분일 수도 있겠죠. 각박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기어코 지켜내야 할 것은, 번듯한 집 한 채가 아니라 내 마음이 편안히 깃들 수 있는 작은 취향 하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두커니 걷는 미소처럼, 당신을 당신답게 만드는 그 소중한 틈을 위하여, 건배.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소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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