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9시, 샤워를 마치고 소파로 뛰어듭니다. 가능한 가장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리모컨을 들어 TV를 겨눕니다. 여기서 더 필요한 건, 맥주 한 캔과 재미의 배고픔을 달랠 맛있는 콘텐츠 한 편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넷플릭스부터 디즈니 플러스, 티빙 등 온갖 OTT를 순회공연한지 30분째. ‘찜한 콘텐츠’와 짧은 예고편을 본 콘텐츠는 수십 개인데 정작 재생 버튼은 감감무소식입니다.
“이건 시즌이 8개나 되네, 언제 다 봐.”
“이건 초반 고구마 구간을 견뎌야 한다던데.”
“이건 너무 피 튀기는 장르물이라, 피곤할 것 같은데.”
재생 버튼까지 가는 길을 가로막는 온갖 걱정들. 결국 돌고 돌아 선택한 것은, 대사마저 외울 지경은 <프렌즈>이거나, 호그와트 입학 통지서가 날아오는 <해리 포터>의 첫 장면입니다.
우리는 왜 귀한 저녁 시간에, 이미 다 아는 맛을 찾아 헤매는 걸까요?
# 새로운 만남은 피곤해
새로운 드라마를 시작한다는 건 생각보다 고단한 노동입니다. 등장인물의 이름과 배경 설정을 익혀야 하고, 그들의 복잡한 관계도를 파악해야 하며, 갈등이 고조될 때 나의 감정 에너지도 함께 소모해야 하니까요.
회사에서 하루 종일 낯선 클라이언트와 미팅하고, 눈치 게임하듯 상사의 의중을 파악하느라 진을 뺐는데, 굳이 텔레비전 속에서까지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 거죠.
우리가 익숙한 맛을 찾는 건, 마치 약속 잡지 않고 불쑥 찾아가도 편한 친구를 만나는 기분과 같습니다. <프렌즈>에서 로스와 레이첼이 싸워봤자 결국은 화해할 것을 알고, <해리 포터>에서 결국 그들은 볼드모트를 무찌를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 확실하고 안전한 결말. 스포일러가 오히려 위안이 되는 아이러니.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재탕’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 예측 가능한 평온함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컴포트 워칭/뷰잉(Comfort-watching/viewing)’이라고 부릅니다. 예측 가능한 스토리가 뇌의 불안도를 낮추고,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는 것이죠.
그러니 매번 봤던 것을 또 본다고 스스로를 ‘고인 물’이라 자책하지 마세요. 당신은 지금 게으른 것이 아니라, 가장 효율적으로 뇌를 쉬게 하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낯선 자극을 차단하고, 익숙한 세계의 품으로 걸어 들어가는 행위. 그것은 일종의 ‘심리적 방공호’를 짓는 일과 다름없으니까요.
# 실패할 리 없는 1화
오늘은 굳이 신작 탭을 기웃거리지 않으면 어떨까요? 대신 당신의 마음속 한구석에서 단단히 자리를 잡은 그 작품,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를 틀어두세요.
화면에 집중하지 않고, 그저 배경음악처럼 틀어두고 딴짓을 해도 좋습니다. 어차피 다 아는 내용이니까요. 가끔 고개를 들었을 때 마주치는 익숙한 장면은, 생각보다 다정한 말을 당신에게 건넬 것입니다.
“걱정 마, 여기서는 아무런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아.”
치열했던 하루의 끝,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서스펜스가 아닌 확신입니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 프라임 비디오, <프렌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