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탕탕

장면과 소리가 담겨있는. 오직 한국어로만.

by Pakoropia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마냥 뛰어놀던 1980년대 서울은 날마다 새로이 들어서는 건물이 즐비했고, 지하철 2호선을 타면 마치 ‘동네 한 바퀴’ 돌 듯 서울을 한 바퀴 돌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올림픽이 끝난 후 동네 코너마다 24시 편의점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서울은 24시간 움직이는 도시로 변하기 시작했다. 고급백화점들이 늘어났고, 옥상층에는 언제나 아이들을 위한 놀이 시설이 있었다. 나와 친구들은 아파트 놀이터를 벗어나 백화점을 또 다른 놀이터로 여기며 드나들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아파트 단지 내에서 자전거 릴레이 경주를 하며 놀았고, 단지 내 놀이터에서 오징어와 말뚝박기 놀이를 했다. 친구들과 방과 후 종합학원에서 공부하고, 주말이면 다시 교회에서 만났다. 같은 동네, 아파트, 놀이터, 학교, 학원, 교회를 함께 맴돌던, 돌이켜보면 얼마나 서로가 공유하는 것들이 많았던 시절이었던가. 시끌벅적 요란했던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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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중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부모님을 따라 독일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늦은 밤 도착한 날의 비 오는 베를린의 늦은 밤 풍경을 아직도 선명히 간직하고 살아간다. 낯선 언어, 낯선 거리, 낯선 공기. 당시의 베를린은 통일 직후의 복잡하고도 변화무쌍한 도시였다. 도시 전체가 재개발 프로젝트로 발 디딜 틈 없이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고, 베를린은 떠나는 사람과 새로 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떠나는 이들은 베를린의 오랜 관습을 버리고 갔고, 새로 오는 사람들은 그들의 새로운 관습을 가지고 들어왔다. 기존의 모든 통념과 관습이 쉽게 바뀌어가고 있는 곳이었다. 하나의 예외가 곧 하나의 사례로 남아 릴레이를 이어가던 곳이었다.


나 또한 하나의 예외가 되어 베를린에서 일반 독일 중학교가 아닌 미국계 국제학교에 입학하며 학업을 이어가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버거웠다. 하지만 한 치의 고민 없이 방과 후엔 독일어를 배우러 어학원으로 향했다. 학교에선 영어를 사용했고, 방과 후 주변 이웃과 일상에서는 독일어를 간접적으로 흡수하며 자랐다. 그리고 여전히 집에서 부모님과는 한국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아침엔 집에서 한국어로, 학교에서 점심에는 영어, 방과 후 저녁에는 독일어를 사용했다. 내가 구사하는 언어는 시간대별로 갈라지고 겹쳐졌다.


같은 사물을 묘사하는 방식이 언어마다 다르고, 그로 인해 사고의 방향도 달라진다는 것이 언어를 배우면서 가장 놀라웠던 점이었다. ‘나비’라는 우리말을 예로 들여다보자. 한국어로 ‘나비’는 말 그대로 날갯짓 하나에도 부드러움이 스민다. 영어의 ‘butterfly’는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혀를 타고 흐르며, 동화적인 뉘앙스를 가진다. 그러나 독일어의 ‘Schmetterling’(슈메타링)은 강하고 무겁게 다가온다. 발음도, 어원도, 이미지도 모든 것이 생경했다. 나는 이러한 차이에서 언어가 담고 있는 문화와 그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의 태도를 엿본다. 한국어의 섬세함, 영어의 유연함, 독일어의 구조성. 언어는 곧 사람들의 삶과 사고를 반영한다는 것을 일찍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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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자연스레 습득한 한국어는 나에게는 감정의 언어였다. 나의 모든 정서를 지탱해 주던 따스한 한국에서의 기억들이 저장된 언어였다. 울고 웃고 부끄러워하고 사랑하는 모든 감정은 한국어로 떠올랐다. 독일어를 배우면서 구조와 질서를 배워 나아갔다. 문장 하나하나가 정확하게 짜여 있어야 의미가 전달되는 독일어의 세계는 나에게 사고의 논리를 심어주었다. 영어는 그 중간 지점으로 나를 안내했다. 다양한 문화를 끌어안는 유연한 틀, 그리고 일상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실용성. 나는 이렇게 세 언어 사이를 유영하며 생활했고, 그와 함께 나는 각각의 다른 문화와 정서를 언어로 사이사이 녹여내는데 능숙해졌다.


독일로 온 첫 해, 어느 날 학교 ESL 선생님께서 내가 떠나온 고향을 묘사하는 에세이를 써올 것을 과제로 내주셨다. 12살, 중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우당탕탕’이라는 제목으로 에세이를 써 내려갔다. ‘우당탕탕’이란 표현 하나로 나의 어린 시절 한국에서의 추억들은 정리가 되고 있었다. 그 말은 소리이면서 장면이고, 감정이며, 당시 일상의 리듬이었다. ‘우당탕탕’은 소리로 존재하지만, 단지 청각에만 머무르지 않는 신기함이 있었다. 시각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다층적이었다. 친구들과 아파트 놀이터에서 말뚝박기 놀이를 하다가 와르르 무너지며 바닥을 뒹굴뒹굴 구글 때, 누군가 넘어져 울고 또 누군가는 웃으며 그걸 바라보는 장면들. 그 전부가 ‘우당탕탕’이라는 네 글자 안에 담겨 있었다.


‘우당탕탕’을 미국친구들에게 설명해보려 했다. “It’s like… boom, clatter, chaos… but cute,” 하고 말해도 고개를 갸웃했다. 미국 친구들에게 “It means a loud, chaotic noise… but kind of fun?”라고 모든 열과 성을 다해 설명했다. 그들은 이해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가 느끼는 정서를 완전히 공유하진 못했다. 이 표현 하나가 한국어가 가진 아름다움과 그 고유함을 설명하는데 좋은 예가 되어준다 생각한다. 한국어에는 정서를 전달하는 감각적인 의성어와 의태어가 풍부하다. 그중에서도 ‘우당탕탕’은 내게 유독 내 추억 속 80년대 한국을 떠오르게 하는 마법의 키워드가 되었다. 이 표현 하나에 당시 삶의 모든 리듬과 시적인 감성이 녹아있으며, 동시에 정겨움과 따뜻함이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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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여름, 미국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1997년 IMF도 함께 왔다. 원래 예정했던 미국대학으로의 진학을 보류해야 했다. 베를린공대로 대학을 진학하게 되었다. 독일어를 더 깊이 있게 배워야 함을 바로 알았다. 태어나 거의 20년을 언어습득에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언어는 그만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그저 내 바람이었을 뿐이었다. 한국어도, 영어도, 독일어도, 언어를 배우는데 그 끝이 따로 예정되어 있지 않음을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잘하고 싶어서 영어를 배운 것이지, 영어를 배우기 위해 그 많은 중고교 과정을 지나온 것이 아니었으니까. 대신 대학에서 선택하는 전공만큼은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선택하고 싶었다.


하고 싶었던 건축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독일어로 모든 수업이 진행되었다. 독일어로 진행되는 건축 수업은 만만치 않았다. 첫 학기 첫 설계지도교수님의 수업에서 교수님은 ‘건축’이라는 말이 너무 일반적이라며, ‘건축설계공학’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했다. 나는 다시 독일어의 정밀함과 맞닥뜨렸다. 단어 하나로 세계를 정의하는 방식. 독일에서의 건축 교육은 치밀하고 이성적이었으며, 논리와 기능을 중시했다.


건축은 언어만큼이나 문화의 반영이었다. 선 하나, 공간 하나에 문화적 의미가 담기고, 설계의 구조에는 사고방식이 녹아들었다. 한국, 미국, 그리고 독일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 사고할 수 없었다. 교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건축설계공학’은 미학과 공학, 역사인문학을 넘나들어야 했다. 여전히 난 세 개의 언어와 문화를 넘나들며 건축에 대한 탐구를 이어가고 있었다. 나는 이 즈음 내가 누구인지,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왔는지를 새삼 느끼게 되었다. 이렇게 이어진 복합적인 환경은 나의 감각과 정서를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확장시켜 주는 밑거름이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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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로 석사를 마무리하고, 난 한국으로 돌아갔다. 20대 중반에 돌아간 서울은 여전히 2002년 월드컵의 뜨거운 기운이 식지 않았는지 어마어마한 ‘으쌰으쌰’ 기운으로 가득했다. 여기에 IT사업이 붐업되면서 세상이 급격하게 바뀌고 있는 엄청난 모멘텀이 느껴졌다. IT 분야에서 열정을 다 쏟아 한국에서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나의 20대를 보냈다. 그리고 30대는 한국의 대기업에서 유럽을 중점으로 일을 했다. 난 대기업의 전략기획 팀장이 되어 있었다.


40대의 길목에 들어섰다. 문득 모든 면에서 자유롭고 편안해지고 싶은 의지가 생겼다. 독일어를 구사할 때 나오던 정교함이 어느새 한국어를 구사하는 나의 언어에 자연스레 겹쳐지고 있음을 내가 느낄 수 있었다. 미국 영어를 구사할 때만 나오던 밝은 인사법이 내 독일어에 묻어 나오고 있었다. 한국어를 구사할 때 나오는 정중함이, 영어를 구사하는 내게 자연스럽게 비추어지고 있었다. 때론 한 공간에서 세 가지 언어를 동시에 쓰며 대화하고, 어떤 순간엔 단어가 입안에서 엉켜 헷갈리기도 한다. 내가 구사하는 언어는 더 이상 시간대별로 갈라지고 겹쳐지고 있지 않았다.


그 모든 언어 위에 한국어가 있음을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 진하게 느낀다. 내가 처음으로 감정을 배운 언어이자, 지금도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되었다. 영어는 가장 흥이 나고 강한 자기 PR과 함께 ‘대륙기질’이 발휘되는 언어가 되었고, 가장 꼼꼼하고 숨 막히게 정교해지는 나를 이끌어내는 언어는 독일어가 되었다. 지금도 나는 서울, 베를린, 애틀랜타를 오가며 다양한 사람들과 언어를 마주한다. 각각의 다른 문화와 정서를 언어로 사이사이 녹여내려 애쓰지 않아도 어느새 그 모든 것들은 이미 서로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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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삶은 늘 ‘우당탕탕’ 하지 않았던가. 넘어지고, 부딪히고, 웃고, 다시 일어선다. ‘우당탕탕’은 단지 시끄러운 소리가 아니다. 누군가 울음을 터뜨리고 누군가는 깔깔거리던 찰나의 장면들. 떠오르는 장면과 소리는 모두가 다르겠다. 하지만 지나온 시간 속 우리 모두는 각자 또는 함께 참으로 ‘우당탕탕’ 하지 않았던가. ‘우당탕탕’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살아 숨 쉬는 나의 정서적 정체성이 되어있었다. 이 말은 내게 삶의 리듬이자, 실수에 대한 관용이자, 유쾌한 혼란을 품는 넉넉함이더라.


여전히 이 ‘우당탕탕’이라는 한마디에 담아내어 전달하고 싶은 느낌을, 나는 여전히 독일어로나 영어로 옮기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다시 베를린이다. 브런치에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아침부터 내 맥북 앞에 앉아 변진섭의 ‘숙녀에게’를 무한 반복하여 들으며 이 글을 써 내려갔다. 11시가 되자 오늘 중고거래를 통해 구매하고자 했던 Hay의 파아란 디자인 소품을 픽업하러 자전거를 타고 다녀왔다. 돌아오는 길, 동네에 새로 오픈한 터키 케밥집에서 마늘소스와 핫소스가 듬뿍 들어간 케밥을 포장주문하여 식을세라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막 오후 2시 30분이 지났다. 가까운 곳에 위치한 피트니스클럽으로 가기 위해 이제 컴퓨터를 닫고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