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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뮤연뮤 Sep 05. 2024

26. 뮤지컬 <시데레우스> 리뷰

찬란한 우주가 전하는 ‘마주하는 힘’

2024.07.24 ~ 2024.10.13

주식회사 랑

플러스씨어터

이창용, 안재영, 김지철, 기세중, 정휘, 윤석호, 유낙원, 박슬기     


1. 들어가며

2. 스토리 라인

3. 극장을 수놓은 은하

4. 아버지와 딸, 과학과 종교

5. 나오며          


1. 들어가며

@yeonmyu_0113

연극, 뮤지컬에 실존 인물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다. 일전에 소개한 <프리다>, 말고도 <라흐 헤스트>, <사의 찬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등 여러 작품들이 있다. 그밖에도 프로이트와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 C.S 루이스를 내세운 <라스트 세션>이 있다. 작가나 예술가는 ‘창작’이라는 공통의 분모가 있어 자주 등장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다른 직업을 가진 인물은 오히려 보기 드물다.     


<시데레우스>는 그중 천문학자가 주인공이다. 천문학자는 쉽게 볼 수 없는 직업이고 글 쓰는 작가와 그림을 그리는 화가에 비해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그중 천문학자는 가만 보면 사람을 현혹하는 미지의 세계를 연구하는 낭만적 존재다. <시데레우스> 속 케플러와 갈릴레오도 그러하다.     


2. 스토리 라인

비르지니아는 아버지가 편지들을 불태워달라는 편지를 받고 왜 불태워야 하는지 의문에 빠진다. 아버지는 케플러라는 인물과 편지를 여러 번 주고 받았음을 알게 된다.     


독일의 수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우주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쓴 <우주의 신비>라는 책을 여러 사람에게 돌리는데 번번이 퇴짜 맞으나 딱 한 명만이 반응했는데 그 사람은 바로 갈릴레오 갈릴레이였다.     

케플러는 기쁨을 금치 못해 편지를 쉴 새 없이 보냈고 갈릴레오는 케플러의 편지가 지긋지긋해 그의 책 하나하나 분석하여 망신을 주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성공한다.     


수긍하는 케플러에 갈릴레오는 찜찜한 기분을 느끼는데... 그러나 케플러는 꺾이지 않고 우주에 대한 연구를 이어간다.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 받다가 천동설에 의문을 가지는데 갈릴레오도 천동설에 대해 의문이 있었으나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써, 이단에 몰릴까 두려워한다. 그럼에도 신이 답을 정해주진 않았을 것 같다는 케플러의 말에 힘 입어 두 사람은 공동 연구를 진행한다.     


오랜 연구 끝에 두 사람은 천동설이 아닌 지동설에 대한 증거를 찾고 이 내용을 <시데레우스 눈치우스>라는 이름의 책으로 발간한다. 메디치가의 후원도 받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크게 반응하지만, 이탈리아의 관습에 따라 갈릴레오 이름으로만 발간된다. 하지만 이내 교황청은 신이 정한 천동설을 흔드는 갈릴레오를 이단으로 몰아간다. 마리아는 그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고, 케플러는 갈릴레오를 구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선다. 그리고 갈릴레오는 자신의 방향을 정한다...          


3. 극장을 수놓은 은하

<시데레우스>는 아무래도 우주를 다루고 있어서인지 연출에 있어 다소 제한적이다. 처럼 소품으로 배와 고래를 표현한 <모비 딕>은 배경이 바다라 광활한 자연에 한낱 인간이 두려움을 느낄지언정 가까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다. 하지만 우주는 망원경이 없으면 제대로 볼 수 조차 없고 만질 수조차 없다.     


우리는 우주와 별을 주로 눈으로 ‘보기’ 때문에 <시데레우스>도 시각적인 연출에 집중했다. 어두운 우주에서 반짝이는 별을 영상을 이용해 연출했다. 케플러가 논리를 주장할 때 정해진 동선을 따라 책을 놓는데 이 책도 반짝이다. 우주에 관한 책이면서, 그 책을 통해 이론을 전개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인지 <시데레우스> 극장은 유독 어둡다. 그리고 이 어둠을 이용한 찬란한 별들을 관객석까지 연장하여 사용한다.   

  

그리고 <시데레우스>에서 독특한 연출이 있는데 관객이 내려다보는 시선을 준비했다는 점이다. 카메라를 설치해 무대 중앙에 위치하면, 무대 벽면에 영상을 송출한다. 그렇게 관객은 우주가 되어 케플러와 갈릴레오, 마리아라는 행성을 내려다본다.    

      

4. 아버지와 딸, 과학과 종교

작중 부녀 관계인 마리아와 갈릴레오의 불화는 갈릴레오가 우주에 집중한다는 점 때문에 더 가슴 아프게 한다.     


케플러와 마리아는 갈릴레오로 알게 된 사이다. 마리아는 아버지가 편지를 주고받으며 친한 사이로 보이는 케플러를 보자 날을 세운다. 아마 우주에 대해 연구하지 않았다면 절대 만날 일 없었던 사이다. 딸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만한 상황이다. 자식에게도 무관심했는데 같이 연구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주 편지를 주고받고, 위험에 처한 아버지를 구하려고 애를 쓰는 케플러를 보며 더 서운할 것이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통해 바라본 우주는 보기에도 힘들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광활한 공간이자 대상이다. 하지만 딸 비르지니아는 망원경 없이도 가까이에서 볼 수 있고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다. 그런데도 갈릴레오의 시선은 우주를 향해있다. 우주보다, 생판 남보다 못한 것이다(역사 고증?)     


천동설의 교황청과 지동설의 갈릴레오와 케플러가 상대의 생각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마리아와 갈릴레오의 입장 차이는 그만큼 크다.     


하지만 마리아는 종교인이지만 천문학자인 아버지를 가까이하면서, 종교인이 과학 앞에서 갖춰야 할 올바른 태도의 예시가 된다.     


망원경은 저 멀리 있는 우주를 확대해서 보여준다. 멀리 있는 걸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물건으로, 저 멀리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차가운 우주는 비르지니아에게 갈릴레오이며, 종교인의 길을 걷는 마리아가 사실을 받아들이고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갈릴레오가 이단으로 몰리는 사건은 일종의 망원경에 해당한다.     

5. 나오며

<시데레우스>에서 우주는 단순히 과학적으로 연구할 미지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케플러, 갈릴레오, 마리아의 관계를 나타낸다. 하나는 있는 사실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그럼으로써 한 발짝 나아간다는 성장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관계, 정확하게는 이해에 대해 돌이켜보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데레우스>는 단순히 우주를 관찰하는 천문학자에 대한 작품이 아니다.     


진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다른 무엇보다 인간관계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갈릴레오가 우주보다 가까이 있고, 피로 이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식보다 우주에 더 많은 관심과 흥미를 가졌기에 과학계는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딸과는 소원해졌다.     


우리는 가끔 가까이 있어서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존재에 대한 소중함을 잊는다. <시데레우스>에서 갈릴레오는 딸이 수녀원에 간다는 사실도 잊은 채 장난감 같은 망원경으로 하늘을 보며 좋아한다.   

  

갈릴레오가 딸에 대해 다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한낱 인간인 갈릴레오는 우주 전부를 알지 못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전부 알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하물며 사물과 타인에 대해 절대 전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데도 우리는 상대에게 관심을 가지고 가까워지려고 한다. 행성들끼리 하나가 될 수 없고 한 은하계에서 살 듯이 우리 인간도 상대를 전부 알지 못하지만 한 지구에서 산다. 갈릴레오가 이단으로 몰려 화형에 처할 위기에 처하자, 마리아는 아버지가 남긴 편지를 통해 우주의 진실을 목격하고 아버지를 머리로나마 이해하고, 갈릴레오 또한 종교인의 길을 걷는 딸이 자신을 두둔해주는 것에 놀라워한다. 둘은 그 사건으로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거나, 완전하게 관계를 회복하진 못하지만 둘 사이가 꽁꽁 얼어붙은 얼음 같았던 사이가 녹을 수라도 있었다.     


작중 케플러는 회복 탄력성이 높은 인물로, 기존에 자신이 세운 이론이 틀렸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으나, 그것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연구를 하여 천동설을 끝내는 법칙을 발견해낸다. 아버지와 완벽하게 화해하지 못하더라도 왜 그랬는지 이해라도 할 수 있게 됐고, 무작정 천동설이 신의 뜻이라 강요하는 교황청과는 달리 지구가 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사람을 위하는 종교 본연의 목적에 마리아는 한층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갈릴레오도 과학적 사실이래도 지금은 설득시킬 수 없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결국 현재에는 천동설이 아니라 지동설이 당연한 정론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망원경으로 우주를 들여다보듯, 결국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임을, 그 과정은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론 진실은 잔혹하리만치 차가울 때도 있다. 하지만 진실을 마주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케플러는 틀리지 않은 새로운 이론에, 갈릴레오와 마리아는 서로에게 나아갔다.   

@yeonmyu_0113


*해당 글은 C - STRAW에 게시된 글입니다.

https://c-straw.com/posts/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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