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처음부터 다시 읽다』

제8장. 소리를 닮은 글자― 제자 원리와 발음 기관의 문자화

by 이다연



제7장에서 우리는 훈민정음을 조합되는 구조, 운용을 전제로 한 문자 체계로 읽었다. 이제 질문은 더 아래로 내려간다.


그 조합을 이루는 최소 단위, 자음과 모음은 어떤 원리로 만들어졌는가. 훈민정음의 글자는 임의로 선택된 기호가 아니다.『훈민정음해례』는 이를 분명히 밝힌다. 이 문자는 소리를 분석한 결과가 아니라, 소리가 발생하는 조건을 옮긴 설계였다.


이 장에서는 훈민정음의 자모가 발음 기관과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는지, 그리고 왜 이 제자 원리가 문자를 설명 가능한 체계로 만들었는지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살펴본다.


1. 소리를 쪼개지 않고, 소리의 자리를 본다


대부분의 문자 체계는 소리를 결과 단위로 분절한다. 알파벳은 음성을 최소 단위로 나누고, 그 단위를 일렬로 배열한다.


훈민정음은 다른 선택을 한다. 소리를 더 작게 쪼개는 대신, 소리가 어디에서 만들어지는지를 묻는다.『해례』는 자음의 원리를 “象形於其發聲之形”이라 설명한다. 소리가 나는 형상, 즉 발음 기관의 상태를 본떴다는 뜻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림처럼 닮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발음 기관이 어떤 위치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문자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2. 기본 자음 다섯 글자의 구조적 대응


훈민정음의 기본 자음은 다섯이다. ㄱ, ㄴ, ㅁ, ㅅ, ㅇ. 이들은 우연한 선택이 아니라 발음 위치에 따른 분류의 기준점이다.


1) ㄱ :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소리
→ 연구개음의 출발점


2) ㄴ : 혀끝이 윗잇몸에 닿는 소리

→ 치조음의 기준


3) ㅁ : 입술이 완전히 닫히며 나는 소리

→ 순음의 기준


4) ㅅ : 이가 맞닿으며 마찰이 생기는 소리

→ 치음의 출발


5) ㅇ : 소리가 시작되기 전,

목구멍이 열린 상태
→ 후음이자 무음의 기준

이 다섯 글자는 발음 기관의 정지 상태를 문자로 옮긴 것이다. 그리고 이 기본형에 획을 더함으로써 소리의 변화를 설명한다.


3. 획의 의미

거센소리와 된소리는 어떻게 설명되는가


훈민정음에서 획은 장식이 아니다. 획은 소리의 세기와 긴장을 표시한다. 예를 들어 ㄱ에 획을 더하면 ㅋ이 된다.


이는 같은 발음 위치에서 숨이 더 강하게 터져 나오는 소리다.

1) ㄷ–ㅌ,
2) ㅂ–ㅍ,
3) ㅈ–ㅊ의 관계도 동일하다.

이 체계의 핵심은 새로운 글자를 외우게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본 자음을 알고 있다면, 획의 추가만으로 소리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다.


된소리 또한 마찬가지다.
ㄲ, ㄸ, ㅃ은 발음 기관의 위치가 아니라 발화의 긴장 상태를 반영한다.


*훈민정음은 발음의 차이를 추상적 기호가 아니라 조작 가능한 형태 차이로 설명했다.


4. 모음의 제자 원리

― 하늘·땅·사람은 철학이 아니라 좌표다


모음의 원리는 흔히 ‘하늘·땅·사람’이라는 철학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해례』에서 이 개념은 추상적 상징에 머물지 않는다.


·, ㅡ, ㅣ 는
소리가 생성되는 기본 좌표다.

· : 입이 가장 열리는 중심점

ㅡ : 입이 수평으로 벌어지는 상태

ㅣ : 혀가 위로 세워지는 상태


이 기본 요소들이 결합하며 ㅏ, ㅓ, ㅗ, ㅜ 같은 모음이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ㅏ와 ㅓ는 같은 개방 모음이지만 혀의 위치와 소리의 방향이 다르다.

이 차이는 모양으로 그대로 드러난다. 모음은 음가를 외우는 대상이 아니라, 입과 혀의 움직임을 눈으로 확인하는 장치다.


예시

― 한 음절이 문자가 되기까지

‘밥’이라는 소리는 어떻게 글자가 되었는가


사람이 “밥”이라고 말할 때, 그 소리는 한 번에 터져 나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발화의 내부를 따라가 보면 이 소리는 분명한 과정을 가진다.


먼저 입술이 닫힌다. 숨이 입 안에 모였다가, 입술이 열리며 소리가 시작된다. 이때 나는 소리가 ㅂ이다. 훈민정음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입술이 닫힌 형상, 순간적으로 막혔다가 터지는 소리의 성격을 ㅂ이라는 글자에 담는다.


다음으로 입이 열린다. 혀는 낮게 깔리고, 입 안의 공간이 가장 밝게 드러난다. 이때 소리는 ㅏ가 된다. 이 소리는 새로운 의미를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소리를 열어주는 중심이 된다. 훈민정음은 이 개방의 상태를 세로획과 짧은 획의 결합으로 시각화한다.


마지막으로 다시 입술이 닫힌다. 소리는 끝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입 안에 짧은 여운이 남는다. 이 여운이 바로 받침 ㅂ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초성의 ㅂ과 종성의 ㅂ이 같은 글자지만 같은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앞의 ㅂ은 소리를 터뜨리는 힘이고

뒤의 ㅂ은 소리를 멈추게 하는 무게다


훈민정음은 이 두 기능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글자로 공유하게 한다. 다만 위치를 바꿈으로써 역할을 달리

하게 한다. 그 결과 사람이 실제로 말한 순서 그대로,

닫힘 → 열림 → 닫힘

이라는 발화의 흐름이 문자 안에 고스란히 남는다. 이때 문자는 소리를 해체하지도, 소리를 왜곡하지도 않는다. 말한 것을 말한 방식 그대로 고정한다.


여기서 드러나는 훈민정음의 결정적 특징


이 과정을 보면 분명해진다. 훈민정음은 “이 소리는 이렇게 적어라”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어디에서 소리가 시작되었는가

어떻게 열렸는가

어디에서 멈추었는가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문자의 구조로 남긴다. 즉, 문자는 소리를 대신하는 기호가 아니라 소리의 궤적을 기록하는 장치가 된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훈민정음에서 문자가 된다는 것은
소리가 잘게 쪼개지는 일이 아니라,
발화의 시간이 공간으로 옮겨지는 과정이다.


5. 닮음의 정확성

― 왜 이 문자는 설명될 수 있었는가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는 후대의 학자들이 ‘과학적’이라고 평가한 지점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이 문자는 왜 이런 모양이어야 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자의 형태가 관습이나 권위가 아니라, 발음 기관이라는 공통 기준에 의해 정당화된다. 이는 문자 학습의 방향도 바꾼다. 외워서 아는 문자가 아니라, 이해해서 사용하는 문자가 된다.


6. 제자 원리와 민본의 관계


문자를 발음 기관에서 출발시킨다는 것은 기술적 선택이자 정치적 선택이다.

발음 기관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계층, 교육, 신분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훈민정음은 문자의 기준을 지식이 아니라 몸에 두었다.

이 선택은 문자를 독점의 대상이 아니라 공공의 도구로 만든다. 세종은 백성에게 새로운 발음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미 하고 있는 말을 기록 가능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사유 질문 ― 이 장을 읽고


1.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는 왜 ‘상징’이 아니라 ‘설명 가능한 구조’로 읽혀야 하는가.


2. 발음 기관을 문자 설계의 기준으로 삼는 방식은 문자의 권력 구조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가.


3.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문자와 기호들은 사용자의 몸과 감각을 어디까지 고려하고 있는가.


■□ 참고 문헌


1.『훈민정음해례본』
― 제자 원리, 초성·중성·종성의 설계 설명, 자음·모음의 형상 원리


2.『세종실록』
― 훈민정음 창제 전후의 정치·사회적 배경


3. 이기문, 『국어사개설』
― 국어 음운 체계와 문자 구조의 역사적 전개


4. 최현배, 『우리말본』
― 한글을 소리 기호가 아닌 운용 체계로 해석한 고전 연구


5. 김슬옹, 「훈민정음 제자 원리의 구조적 이해」
― 발음 기관과 문자 형상의 대응 분석


6. 문자학·음성학·문자사회학 관련 연구 전반
― 문자 구조와 인간 인식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논의



제8장. 『훈민정음, 처음부터 다시 읽다』「조합의 원리, 받침의 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