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잡러의 슬픈 변명
나는 약속을 잘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적어도, 내 머릿속의 나는 그렇다.
“그날 저녁 7시에 도착할게!”
라고 말하면, 6시 50분에 도착해 카톡 상태창에
‘나 도착했어’라고 띄우고 기다리는 그런 부지런한 사람.
적어도, 예전에는 그랬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뭔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회의가 세 시간이나 지연되고,
교통체증으로 도로에 갇히고,
전화를 하려던 찰나에 배터리는 1%,
아니면 많은 사람들과의 미팅으로 지연... 지연... 지연...
그리고 나는 결국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진짜 미안한데, 상황이 좀…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었어.'
이 마법 같은 변명.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인간이 가장 많이 쓰는 말.
나는 그 말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사실 나는 호기심의 화신이다.
뭐든 궁금하고, 해보고 싶고, 내가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러다 보니 집에는 정체불명의 재료들이 쌓인다.
종이, 붓, 전동드릴, 삼각대, 마이크, 영상 편집 앱 구독료…
“대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세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오히려 내가 되묻고 싶어진다.
"그걸 꼭 하나로 정해야 하나요?"
덕분에 내 별명은 ‘N잡러’.
하고 싶은 게 너무 많고, 한 가지만으론 도저히 성이 차지 않는 사람.
관심사는 멀티탭처럼 이리저리 꽂혀 있고, 가끔은 과부하로 터질 듯하지만…
그건 또 그때 가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이렇게 많은 걸 하다 보면 문제가 생긴다.
시간이 부족하다.
내 마음속의 나는 이미 친구를 만나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현실의 나는 아직 편집 프로그램 렌더링 바가 87%에 멈춰 있다.
문제는, 내가 괜찮은데 사람들이 나 때문에 힘들어한다는 거다.
“넌 왜 그렇게 바쁘게 살아?”
“좀 쉬어. 그렇게 다 하면 우리 뭐 하라고…”
하지만 나는 사실, 잘 쉬고 있다.
내게 ‘쉬는 시간’이란 깨끗하게 정리된 책상 위에서 새 프로그램을 설치하거나, 강의를 듣거나, 영상 편집 마무리를 하며 가만히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는 거니까.
나는 미리 준비해야 마음이 편한 사람이고,
시간도 아끼고, 자료도 일찍 보내고, 계획도 미리 세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보고 이렇게 말한다.
“넌 너무 바빠서 보는 사람도 피곤해.”
나는 강요한 적이 없는데, 사람들이 스스로 미안해하고, 피곤해하고, 때로는 자기 삶을 반성하기까지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괜히 죄인이 된다.
사실 나는 일을 하는 게 아니다.
그저 뭔가를 만드는 걸 좋아하고,
새로운 걸 배우는 걸 좋아할 뿐이다.
그게 일이 되었을 뿐.
사람들은 ‘열정’이라 하고, ‘성실함’이라 하고, 가끔은 ‘집착’이라고도 한다.
그렇지만 나는 단지, 고독을 견디기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가만히 있으면 생각이 너무 많아진다.
그래서 무엇이든 한다.
만들고, 배우고, 쓰고, 그리며, 고독과 나 사이의 거리를 메운다.
사람들은 그걸 ‘열심히 산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나는 단지, 조용히 혼자 괜찮으려고 노력 중일뿐이다.
나는 지금 충분히 괜찮다.
불행하지도 않고, 너무 고통스럽지도 않다.
그저 가끔, 세상과 나의 운영체제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나는 윈도 11인데, 세상은 아직 윈도 XP 같은 느낌.
자꾸 충돌이 나고, 시스템이 먹통이 된다.
일과 고독 사이에 낀 채,
노트북 화면을 보며 혼자 중얼거린다.
“고독해서 그래. 다, 고독해서 그래…”
결론이 뭐냐고?
나도 잘 모르겠다.
“아냐, 그냥 고독해서 그래.”
고독하니까, 늦을 수 없고,
고독하니까, 무언가를 하고 있고,
고독하니까, 잠을 자는 시간이 아까운 거야.
결국 인생은,
지킬 수 없는 걸 알면서도,
다시 지켜보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