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지만, 사치로 느껴지지 않는 것
주말 백화점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선물을 사기 위해 들른 향수 매장.
특히 조말론 매대 앞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불경기라는 말이 계속 나오고 있는 시점에서
이 장면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실제로 한국은행이 발표한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2024년 기준 평균
100 이하 구간에서 움직이며
경기에 대한 체감이 ‘비관적’ 수준임을 보여준다.
또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3~2024년 실질임금 증가율은
물가 상승을 충분히 따라가지 못했다.
사람들은 분명히 “경기가 어렵다”고 느끼고 있다.
그런데도 백화점은 붐빈다.
이 괴리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얼마전에는 큰맘을 먹고 신발을 사기 위해
프라다 매장을 찾았었다.
남성 구두·스니커즈 가격은
대략 90만~130만 원 수준.
이 가격대에서는
구매가 아니라 ‘결정’이 필요하다.
반면 향수는 다르다.
한국소비자원 가격정보 종합포털에 따르면
2023년 기준 백화점 브랜드 향수(100ml)의 평균 가격은
약 12만~18만 원 수준이다.
결코 저렴한 금액은 아니다.
하지만 체감은 완전히 다르다.
100만 원 앞에서는 “비싸다”
15만 원 앞에서는 “괜찮다”
이 차이는 가격의 문제가 아니다.
기준의 문제다.
향수가 싸진 것이 아니라
비싸다고 느끼는 기준이 올라간 것이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주요 유통업체 매출 동향을 보면,
백화점 매출은 최근 몇 년간
꾸준한 증가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2022년에는 약 9%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고,
2023년에도 약 5% 내외의 증가세를 유지했다.
2024년 역시 성장 흐름이 크게 꺾이지 않으며
안정적인 상승세를 이어가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 성장은 모든 품목에서
고르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카테고리별로 보면 흐름의 차이가 분명하다.
명품은 여전히 두 자릿수에 가까운 성장세를 유지하며
백화점 매출을 견인하고 있고,
화장품과 향수 역시 안정적인 수요를 바탕으로
꾸준한 증가 흐름을 보인다.
반면 일반 의류를 비롯한 중간 가격대 상품군은
정체되거나 일부 감소하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글로벌 시장에서도 유사하게 관측된다.
주요 컨설팅 기업들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1인당 명품 소비액 기준으로
세계 최고 수준에 속하는 국가 중 하나로 평가된다.
이는 단순히 소비가 줄어들었다기보다,
소비가 특정 영역으로 집중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결국 현재의 소비는
전반적으로 위축된 것이 아니라,
방향이 바뀐 것이다.
경기에 대한 체감은 분명 둔화되어 있지만,
실제 소비는 명품과 화장품·향수와 같은 특정 카테고리에서
오히려 강화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현재 소비 구조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변화는
단순한 양극화가 아니라,
이른바 ‘중간의 붕괴’다.
전체 소비가 줄어들었다기보다,
소비가 특정 구간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실제 유통 데이터를 보면
이러한 흐름은 뚜렷하게 나타난다.
SPA 브랜드의 성장률은 둔화되고 있으며,
중가 패션 브랜드의 매출은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일부 패션 플랫폼 역시
거래액 증가세가 둔화되거나
정체되는 흐름을 나타낸다.
과거에는 대중적인 가격대를 중심으로
형성됐던 소비 시장이 점차 힘을 잃고 있는 것이다.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전혀 다른 움직임이 나타난다.
명품 시장은 여전히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으며,
화장품과 향수 같은 비교적 부담이 적은 소비재 역시
안정적인 수요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이들 품목은
경기 상황과 관계없이
꾸준히 소비가 이루어지는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흐름은 소비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선택 방식이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소비자들은 더 이상 애매한 가격대의 제품에
지갑을 열지 않는다. 대신 선택은 단순해졌다.
확실히 비싼 제품이거나,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은 가격대의 제품이다.
결국 중간 가격대에 위치한 선택지는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소비의 총량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소비의 구조 자체가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향수 시장은 숫자로 보면
그 흐름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Statista에 따르면
전 세계 향수 시장 규모는
2022년 약 500억 달러 수준에서 형성됐으며,
2027년에는 700억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연평균 성장률은 약 5~7% 수준으로,
안정적인 확장세를 이어가는 시장으로 평가된다.
이 과정에서 특히 눈에 띄는 변화는
프리미엄 향수의 비중이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시장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소비가 보다 높은 가격대의 제품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국내 시장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백화점 내 향수 매출 비중은 점차 확대되고 있으며,
딥디크와 르라보 같은
니치 향수 브랜드의 성장도 두드러진다.
동시에 향수 소비의 중심 연령층 역시 낮아지면서
2030 세대의 비중이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
여기에 더해 향수 시장의 구조를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선물 수요다.
유통업계 분석에 따르면
향수 구매의 상당 부분은 생일,
기념일, 명절과 같은 이벤트성 소비에서 발생한다.
이는 개인 소비를 넘어 타인을 위한 소비가
시장을 함께 지탱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향수 시장은
경기 변동에 직접적으로 흔들리기보다는,
일정 수준의 수요가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소비가 줄어드는 국면에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향수는 사치품이지만,
동시에 경기와 무관하게
반복되는 소비의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문화체육관광부의 ‘국민여가활동조사’에 따르면,
최근 소비는 물건을 소유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경험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카페 이용, 외식, 여행과 같은 활동의 비중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소비의 목적 또한 기능적 필요보다는
체험과 만족에 더 가까워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세대별 소비 기준에서도 확인된다.
한국리서치 조사에서는
2030 세대가 소비를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요소로
‘자기 만족’을 꼽는 결과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가격이나 실용성보다,
해당 소비가 개인의 기분과 만족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가
더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 흐름 속에서 향수는 매우 상징적인 소비재다.
기능적인 필요는 거의 없지만,
감정적인 만족도는 높고,
동시에 자신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된다.
일정한 향을 선택하는 행위는
단순한 구매를 넘어,
스스로의 분위기와 인상을 설계하는 과정에 가깝다.
결국 향수는 물건이라기보다
경험에 가까운 소비다.
약 10만~15만 원의 지출로
하루의 기분과 이미지를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물리적인 효용을 넘어서는
감정적 소비로 작동한다.
이러한 특성이 현재의 경험 중심 소비 흐름과 맞물리며
향수 시장을 지탱하는 배경이 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다.
과거 경제 위기 국면에서도
유사한 소비 패턴이 반복적으로 관측되어 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2020년 코로나19 시기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특징이 있다.
이른바 ‘립스틱 효과’로 불리는 현상이다.
경기 침체로 전반적인 소비가 위축되는 상황에서도
화장품, 향수, 소형 사치품과 같은 품목은
상대적으로 매출 감소폭이 작거나,
오히려 증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당시 유통업계와 글로벌 소비 데이터에서도
이러한 카테고리는 다른 소비재에 비해
비교적 안정적인 흐름을 유지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 현상의 배경은 단순하다.
소비자들은 경제적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자동차나 주택, 고가 명품과 같은 큰 지출은 줄이지만,
완전히 소비를 중단하지는 않는다.
대신 비교적 부담이 적은 범위 내에서
자신을 위한 소비를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결국 소비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규모가 축소되고
형태가 바뀔 뿐이다.
큰 소비를 줄이는 대신
작은 사치를 유지하는 선택,
그것이 불경기 속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소비의 방식이다.
향수의 가격은 약 15만 원 수준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결코
가벼운 소비라고 보기는 어렵다.
일상적인 지출과 비교했을 때도
충분히 부담이 될 수 있는 금액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소비자들은
이 정도의 가격을 크게 망설이지 않고 받아들인다.
‘이 정도는 괜찮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가격 자체가 아니라
비교 기준의 변화에서 비롯된다.
현재의 소비 환경에서
주택 가격은 수억 원 단위로 형성되어 있고,
자동차는 수천만 원,
명품 제품은 수백만 원을 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처럼 전반적인 가격 수준이 높아진 상황에서
10만 원대 소비는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한 ‘작은 소비’로 인식된다.
절대적인 가격은 변하지 않았지만,
상대적인 위치가 달라진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현재의 소비 구조를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불경기는 소비를 완전히 위축시키기보다는
소비의 형태를 바꾸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고가의 지출은 미루거나 줄이지만,
비교적 부담이 적은 범위 내에서의 소비는
유지되거나 오히려 선명해진다.
결국 소비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선택의 기준과 방향이 달라진다.
과거처럼 큰 규모의 소비를 지속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소비자들은 지금 가능한 범위 안에서
즉각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지출을 선택한다.
그 결과가 바로 향수와 같은 상품에 대한
꾸준한 수요로 이어진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백화점 향수 매장이 붐비는 풍경은
더 이상 예외적인 장면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