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사라진 시장에서

어른들이 만드는 새로운 시장

by 다소느림

‘키덜트’


KakaoTalk_20260327_125223188_11.jpg

한때 피규어와 레고,

프라모델은 어린이의 장난감으로 분류됐다.


하지만 지금 이 시장을 움직이는 핵심 소비자는

아이들보다 어른들이다.

한국의 2024년 합계출산율은

0.75명으로 여전히 낮은 수준인데도,

관련 시장은 오히려 활기를 띠고 있다.


아이가 줄어드는 사회에서

장난감과 캐릭터 소비가 커진다는 것은,

이 시장의 중심축이 이미

어린이에서 성인으로 이동했다는 뜻에 가깝다.


장난감 사는 어른


이 변화는 해외 시장 통계에서 더 선명하게 보인다.

독일 뉘른베르크 완구박람회 측은

2024년 1분기 미국에서 18세 이상 성인이

3~5세 유아층을 제치고

가장 큰 완구 구매 집단이 됐다고 전했다.


같은 기간 성인들의 자가 소비 완구 지출은

18억 달러에 달했다.


또 Circana 기준으로

2024년 글로벌 완구 판매는

전체적으로 0.6% 감소했지만,

‘컬렉터블’ 카테고리는 거의 5% 성장했고

전체 판매량의 18%,

판매액의 15%를 차지했다.


라이선스 완구도 8% 늘어

전체 시장의 34%를 차지했다.


아이가 줄어든다고 시장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누가 사느냐가 바뀌고 있는 셈이다.

이 지점에서 ‘키덜트’라는 단어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소비 구조의 문제로 읽힌다.


예전에는 부모가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줬다면,

지금은 경제력을 가진 성인이 스스로를 위해 산다.


그래서 고가 피규어,

대형 레고, 한정판 굿즈가 성립한다.

어린이만을 상대로 했다면

10만 원, 30만 원, 100만 원을 넘는 제품군이

이렇게 넓게 유지되기 어렵다.


지금 시장은 분명히

어른들의 지갑 위에서 돌아간다.


‘어린이 만화’가 아닌 성인까지 끌어들인 IP 산업


피규어 시장이 커진 배경에는

콘텐츠 자체의 변화도 있다.


일본동화협회(AJA) 기준

2023년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 시장 규모는

처음으로 3조 엔을 돌파해 약 3.3조 엔,

전년 대비 14% 증가한 것으로 보도됐다.


해외 매출 확대가 큰 동력이었다.

즉 애니메이션은 더 이상

특정 연령층의 좁은 장르가 아니라,

글로벌 팬덤과 파생 소비를 만드는

거대한 IP 산업으로 커졌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 KOBIZ가 소개한

2023년 애니메이션 이용자 조사에서도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국내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는 이유로

45.4%가 “대부분 유아용 애니메이션이라서”라고 답했다.


반대로 일본의 하이타깃 애니메이션은

청소년 이상을 겨냥한 콘텐츠가 늘면서

빠르게 시장을 넓혔다고 분석됐다.


귀멸의 칼날이나 진격의 거인 같은 작품이

성공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지 아이들이 좋아해서가 아니라,

성인도 감정적으로 몰입하고

돈을 쓰는 구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부가상품’이 아니라 주력 소비재


KakaoTalk_20260327_125754021.jpg

한국콘텐츠진흥원 자료를 보면

이 흐름은 국내 콘텐츠 산업에서도 확인된다.


2023년 상반기 국내 콘텐츠산업 매출액은

약 69조3000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5% 증가했고,

같은 기간 애니메이션 산업 매출액은 8.6% 늘었다.


수출액은 약 53억9000만 달러였는데,

그중 만화 수출은 71.3% 증가했다.

콘텐츠를 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와 굿즈, 피규어, 전시,

협업 상품으로 이어지는 확장성이 커졌다는 의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본편’보다 ‘파생 상품’의 힘이다.

사람들은 이제 콘텐츠를 감상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자신이 좋아한 세계관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싶어 하고,

전시장과 팝업, 카페를 찾아가고,

한정판과 콜라보 상품을 산다.


피규어는 캐릭터를 사는 물건이 아니라,

서사를 소유하는 소비가 됐다.


이 구조가 형성됐기 때문에

키덜트 시장은 단순 취미가 아니라

반복 구매가 가능한 산업으로 바뀌었다.


레고의 실적


레고의 실적은 이 변화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준다.

LEGO Group은 2024년 매출이 13% 증가한

743억 덴마크 크로네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소비자 판매도 12% 늘었는데,

이는 같은 해 전 세계 완구 시장이

1% 감소한 흐름을 크게 웃돈 수치였다.


시장 전체가 정체돼도

특정 브랜드와 특정 카테고리가 성장한다는 것은,

단순한 아동용 완구 수요가 아니라

팬덤·수집·전시·취향 소비가

매출을 밀어올리고 있다는 뜻이다.


레고가 흥미로운 이유는

‘조립’이라는 과정을 판다는 데 있다.

피규어가 완성품을 소유하는 소비라면,

레고는 시간을 들여 만드는 경험까지 함께 판다.


그래서 레고는 장난감이면서 동시에 취미이고,

장식품이면서 동시에 성취감의 매개가 된다.


아이 혼자 즐기는 제품이었다면

이런 고가 라인업과 반복 구매 구조는 만들기 어렵다.

레고의 성장세는 어른들이 ‘어릴 때 갖고 싶었지만 못 가졌던 것’을

이제는 스스로 구매하는 시대가 왔음을 보여준다.


이제 ‘사는 것’에서 ‘만드는 것’으로


3D프린팅의 성장도 이 시장을 설명하는 중요한 축이다.

ASTM이 소개한 Wohlers Report 2025에 따르면

글로벌 적층제조(3D프린팅) 산업은

2024년 219억 달러로 전년 대비 9.1% 성장했다.


한국저작권위원회가 정리한

3D프린팅 산업 현황 보고서도

글로벌 3D프린팅 시장이 2023년 150억 달러에서

2028년 345억 달러로 커지며

연평균 18.1%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예전엔 기업과 공장의 기술처럼 보였던 3D프린팅이

점점 개인의 제작 도구로 내려오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에서도 정보통신산업진흥원(NIPA)이

별도로 ‘3D프린팅 산업 실태조사’를 매년 공개할 정도로

시장 추적이 이뤄지고 있다.


즉 3D프린팅은 더 이상 일부 실험적 기술이 아니라,

정책과 산업 통계의 대상으로 관리되는 영역이 됐다.

피규어를 소비하는 시장에서,

직접 모델링하고 출력하고 판매하는 시장으로

일부 수요가 이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기술은 키덜트 산업의 확장판이라고 볼 수 있다.


취미는 이제 방송이 되고, 카페가 되고, 공간이 된다


이 시장이 대중화된 데에는 노출 방식의 변화도 크다.

KBS와 MBC는 2026년 들어

개그맨 이상훈의 피규어 수집을 별도 콘텐츠로 다뤘고,

배우 심형탁의 도라에몽 취향은

오래전부터 방송에서 반복적으로 소비돼 왔다.


KakaoTalk_20260327_125223188_24.jpg

대전의 ‘사나고 카페’처럼

제작자와 작품을 오프라인 공간으로 연결하는 사례도 등장했다.

취미가 더 이상 개인 방 안의 비공개 영역이 아니라,

구경하고 방문하고 공유하는 콘텐츠가 된 것이다.


이 흐름은 체험 산업에도 이어진다.

키자니아는 성인 전용 프로그램

‘키즈아니야’를 공식 운영하고 있고,

2025년 12월 행사에는

약 400명의 성인이 참여한 것으로 보도됐다.


어린이 직업 체험 공간이

성인에게 열리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아이들이 줄어든 시대에,

어른들이 어린 시절의 욕망과 역할 놀이를

다시 소비하기 시작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키덜트는 아직도 성장 산업


이 시장을 여전히 ‘철없는 취미’라고만 보면

핵심을 놓치게 된다.

출생아 수는 줄고 있지만,

성인은 가장 큰 완구 구매 집단으로 떠오르고 있다.


글로벌 애니메이션 시장은

사상 최대를 경신하고 있고,

컬렉터블과 라이선스 완구는

전체 시장보다 빠르게 크고 있다.


레고는 완구 시장 둔화 속에서도

두 자릿수 성장을 이어갔고,

3D프린팅은 취미를 제작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이 정도면 키덜트는 유행이 아니라 구조다.

결국 이 시장을 키운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어릴 때 충분히 누리지 못했던 감정과 취향을

지금의 경제력으로 다시 사는 성인들이다.


피규어는 단순한 장난감이 아니고,

레고는 단순한 블록이 아니며,

3D프린터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어른의 추억과 취향이 돈이 되는 방식’을 보여주는 물건들이다.

그래서 키덜트 시장은 아직 끝난 산업이 아니라,

오히려 이제야 제대로 설명되기 시작한 시장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