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앨범

by 최점순

책이 집안을 점령했다. 손끝이 닫는 곳마다 쌓이더니 흘러내린다. 작은 도서관 수준이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앨범이 찡그리고 있다. 아이들 초, 중, 고, 입학 졸업사진과 함께 책꽂이 맨 아래 칸에 꽂아 놓고 까맣게 잊었다. 요즘은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고 카톡이나 블로그에 올리면 가족들이 공유한다. 오늘은 미루어 두었던 책장 정리를 했다. 오랜 세월 잠자고 있던 이냐시오 야학 졸업앨범이 손끝에 와닿았다.

그 해 봄이었다. 1989년 이냐시오에서 장 영희 (마리아)영어 선생님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앨범을 창가로 들고 와서 뽀얗게 쌓인 먼지를 닦아내고 펼쳤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사진은 고 장 영희 영어 선생님이 환한 모습이었다. 아, 벌써 햇수로는 30년이 흘렀다. 그녀의 사진에 얼굴을 갖다 대자 울컥거렸다. 수업 시간에는 산중의 범 보다 더 무서웠던 선생님이 가끔씩 “다들 힘내”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학교 밖에서 만나면 따뜻한 사랑이 넘쳤다. 한 눈을 팔거나 약한 모습을 보일 때는 카랑카랑한 서울 말씨로 엄한 훈계로 칠판을 땅땅 두드렸다. 그랬던날들이 지나갔다. 냉정하고 다호한 태도와는 달리 상먕한ㅇ속소리와 따스한 얼굴이 이중으로 오버랩되었다.

부모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자식들이 걱정되었다. 엄마인 내가 반듯하게 서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렸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전인격적으로 키울 수 있을지 앉으나 서나 교육의 부담이었다. 딸과 아들이 저학년 일 때 문득, 맹모 사랑이 생각났다. 어릴 적 나는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성장하면서 간절했던 목마름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가정 형편상 학원에도 보내주지 못하고 일편단심 기도하러만 손잡고 데리고 다녔지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어두웠다. 성당 주보를 펼쳐보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서강대학교에서 설립하고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의 정신을 물려받아 공부할 기회를 노친 청소년들을 모집하는 광고였다. 학교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저쪽에서 들려오는 대답에 황당했다. 입학할 자녀가 몇 살이냐고 했다. 한참 후 사십 살이라고 말했다. 어머님이 아들딸 같은 또래들과 공부할 수 있으신지요? 하고 되물었다. 네, 그럼요. 내일 찾아오세요. 전화가 끊겼다. 이튿날 서강대학 미국 신부님이신 Kister 교장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첫인상이 따뜻한 아버지처럼 환한 미소로 반겨주셨다. 교장선생님, 저는 두 자녀를 둔 주부 안대 저도 공부할 수 있을까요? 교장선생님께서 우리 학교는 나이 제한이 없기에 받아줍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날개가 달린 듯 휠 휠 날아왔다.

늦은 나이에 공부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가족들 앞에 이냐시오 야학에 다니게 되었다고 말했다. 남편이 이마를 찌푸리며 내 말을 뚝 잘라버렸다. 그런 상상할 시간이 남아돌면 자식들 공부에 신경 더 쓸 것이지 응. 도리어 윽박질렀다. 밥을 먹던 딸과 아들이 아버지의 역정에 놀랐는지 얼굴빛에 파랗게 변했다. 그날 이후 다양한 철벽이 가로막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입학을 하였다. 첫 난관은 극복하니 눈만 감으면 온 우주의 축복이 한꺼번에 내 머리 위로 쏟아지는 듯 기뻤다. 하지만 다음 관문은 녹록하지 않았고, 막상 입학을 하고 공부를 하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수 십 년 동안 책이랑 담을 쌓아서 머리에서 쥐가 났다. 아무리 노력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았다. 나는 영어와, 수학 시간만 되면 어디로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 간절했다. 학생들도 낮에 중노동 하고, 밤에 공부하느라 꾸벅꾸벅 졸았다. 대검 시험과 수능시험까지 눈앞에 일렁거렸다.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꼭 들어가야 하는데 성적이 딸려서 걱정이 태산 같았다. 1학년에서 이학년으로 올라가니 학업에 대한 부담감이 짓눌렀다.

학교에서 영어 A 반 B 반, 수학 A 반 B 반 나누어 선생님들이 돌아가며 개인 지도를 해주셨다. 장 영희 선생님도 낮에는 대학 수업으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늦은 밤까지 야학에서 영어수업을 하시느라 이중으로 몸을 혹사시켰다. 그분의 헌신적인 사랑 덕분에 학생들은 다시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회식자리가 마련되었다. 시간에 쫓겨 밀린 이야기로 회포를 풀었다. 밖에서 만난 장 영희 선생님은 아주 딴 사람 같아 보였다. 뉴욕 주립대학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기까지 산 넘어 산을 넘어왔다고 하셨다.

그녀는 1952년생 나와 동갑이었다. 태어나서 1년 만에 고열을 앓은 후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소아마비에 걸렸다. 평생 비장애인들과 대학들의 차별의 벽에 막혔다. 그녀의 부친 故 장왕록 서울대 영문과 명예교수께서 서강대학에 찾아가서 소아마비 장애를 가진 딸도 이 학교에 입학할 수 있습니까? 그 질문을 받은 서강대 영문학과 학과장 브루니 신부는 “무슨 그런 이상한 질문이 있습니까? 시험을 머리로 보는 것이지, 다리로 보나요? 장애인이라고 해서 시험 보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서강대에서 학사 석사 과정을 마친 그녀에게 국내 대학들은 다시 한번 박사과정 입학 허가를 꺼렸다고 했다. 결국 미국으로 건너가 1985년 뉴욕 주립대학에서 영문학 박사를 취득한 후 많은 장애인과 제자들에게 희망의 불씨가 되셨다.

인생은 자신의 꿈을 향해 도전해 볼 만했다. 이냐시오 선생님들은 신부님과 대학생들이었다. 야학생들에게 자존감을 높여 주기 위해 대학생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잊지 못한다. 이 년 과정을 공부하는 동안 봄, 여름, 가을에는 체육대회와 엠티를 계획해서 전국 유명 한 산으로 데리고 다니며 신나게 장작불을 피워놓고 캠프 파이도 시켜주었다. 행사 마지막 날에는 선생님과 학생들이 잔디밭에 둘러앉아 수건 돌리기 하고 맛있는 야외 성찬을 차려 주었다. 가수 변 진섭의 노래“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년 과정을 마치고 대검에 합격하고 수능까지 치렀고, 청소년들은 대학에 진학하였고 나는 방송통신대학을 졸업하였다.

장영희 선생님의 십팔번' 하필이면 '하느님이 나에게 이런 모진 시련을 주시다니 라며 하느님께 사대질을 하면서 꿈을 포기하지 않고 미국 유학 중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셨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목발 짚고 넘어졌는데 지나가는 행인을이 없어 일어나지 못해 주저앉아서 피같은 눈물을 몇 시간동안 길바닥에 쏟아내다고 하셨다. 듣고 있던 우리 모두는 오연을 하고 말았다. 또한 길치라서 서강대학 문밖으로 차를 끌고 나가면 번번이 헤맸고, 몇 바퀴를 돌고 돌아 원점에서 다시 출발한다는 말에는 회식자리는 한바탕 폭소가 터졌다. 때로는 웃고 울었던 눈물겨운 나눔을 통해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잊은 채 사제지간에 끈끈한 정을 듬뿍 쌓을 수 있었다. 제자들에게 마지막까지 한 방울의 땀과 진액까지 모두 소진하시고 원도 한도 없는 사랑을 베푸셨다. 암투병을 반복전으로 겪었지만 오뚝이 쳐림 다시 일어 날 수 ㅣㅎ을 ㅓ라 믿었느데, 갑작스럽게 비보를 듣고 달려간 신촌 세브란스 장례식장 가슴이 먹먹해서 할 말을 잃었다. 장 영희 문학의 숲 칼럼에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고” 평생 소아마비로 고생하면서도 유방암, 척추 암, 간암, 등과 사투를 벌이다가 2009년 5월에 영명에 드셨다. 그분이 못다 한 나머지 숙제는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특유의 미소로 보내는 것 같다.

삭정이 가슴에 촉촉한 단비가 내렸다. 물수건으로 깨끗이 닦은 앨범을 머리맡에 놓았다. 글을 쓰다가 막히면 펼쳐 놓고 장영희 선생님과 생전에 못다 한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나누고 싶다. ‘아주 멀리 있어도 마음이 있으면 가까운 사람이고, 가까이 있어도 마음이 멀리 있으면 먼 사람이고 시공을 초월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는 거리가 아니고 마음이래요.’ 내가 글을 쓰는 것도 선생님과의 무언의 약속이지 싶다. 살아오면서 좋은 인연을 맺은 멘토(Mentor), 선생님들의 올바르고 굳건한 가르침 덕분에 많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많은 결실을 맺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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