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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침이 Sep 18. 2023

목욕탕에 가려고 샤워를 합니다.





내성적인 사람은 목욕탕에 가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창밖의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찌뿌둥했다. 한껏 늘어진 주말 오전이었다. 남편이 기지개를 켜더니 목욕이 가자고 했다. 모든 씻는 곳들은 수영장이나 진배없던 두 아이는 금세 "오예~!" 소리를 지르며 화답했고 재빨리 목욕놀이 장난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대답 대신에 볼록 나온 뱃살을 문질렀다. 하필 아침에 밥을 많이 먹은 것이 신경쓰였다. 그걸 알아차린 남편이 "아무도 당신 배 안 본다."고 말했다.

- 알겠어... 그럼 잠깐만. 씻고 나올게.

남편은 3초 정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 씻으러 가면서 왜 씻어. 너는 식당 갈 때 밥 먹고 가니?

- 응. 결혼 전에 당신이랑 식사하는 날은 맨날 밥 먹고 나갔어.

그의 눈이 한껏 커졌다. 연애 초기 그의 앞에서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기 싫어서 정말로 집에서 뭘 좀 먹고 나갔더랬다. 목욕탕에 가기 전에 씻겠다는 나의 말은 100% 진심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목욕탕에 가기 전에 씻고 가겠다 말했다.


밤새 베개에 눌린 머리카락은 떡져 있었고 며칠간 제모를 안한 종아리가 신경쓰였다. 불과 2주 전에 목욕탕에서 몇년 전 교사와 학부형 사이로 알게된 여자와 마주친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 우리는 두 손으로 아랫도리를 가리며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무도 안본다는 말은 그가 잘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끝끝내 화장실로 들어가는 내 뒤통수에 대고 남편이 중얼거렸다.


"아무리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 해도... 당신 이거 라디오에 사연 꼭 보내. 당신이 안 보내면 내가 보낸다. 사람들 반응이 어떤지 한번 봐봐."  


그래도 나는 확신했다. 고작 때를 밀러 가면서도 신경 쓰는 사람이 분명히 나 말고 이 세상에 하나쯤은 또 있을 거라고. 왜냐하면 나에게는 바로 목욕탕이 내성적인 사람이라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다양한 인간군상 드라마가 펼쳐지는 사교 클럽이나 다름 없었으므로.




대한민국의 여자라면 다들 알 것이다. 여탕은 단순히 몸을 씻는데 그치는 시시한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그곳은 벌거벗은 김에 가장 자유로워진 여자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탕에서 만난 여자들은 다들 거침없고 과감했다. 첫 만남부터 서로의 가장 은밀한 몸을 마주 보니 거리낄 것이 뭐가 있으랴. 그녀들은 사우나에 앉아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논했고 처음 본 사이끼리 땀을 닦아줬다. 뜨거운 김과 함께 온갖 소문과 정보들이 어지럽게 피어올랐다.


그녀들은 때때로 목이 마르면 플라스틱 물통에 커피를 담아 얼음을 동동 띄워 나눠 마셨다. 혹 누군가 커피를 못 마신다 말하면 식혜나 박포(박카스+포카리스웨트)라도 사서 기어코 인심좋게 한 잔씩 따라줘야 직성이 풀렸다.


혼자 온 여자가 외로이 때라도 밀라치면 누군가 갑자기 예고도 없이 등에 때수건부터 갖다댔다. 싹싹싹 힘줘서 때를 밀고 나서는 말도 없이 제 등도 들이밀었다. 혼자 온 여자끼리 서로의 때를 벗겼다.


좀 한가해지면 세신 일을 하는 여자들이 속옷만 입고 모여앉아 반찬 냄새를 풀풀 풍기며 점심을 먹었다. 그녀들은 왜인지 위아래 속옷의 색을 항상 다르게 해서 입었다. 김치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 예약손님이 기다리는 것 같으면 "언니, 1분만 더 불리고 있어. 금방 갈게."하면서 급하게 냉수로 입안을 가글하곤 했다.


또한 목욕탕에는 그런 여자들도 있었다. 목까지 핑크색 비닐을 올려쓰고 앉아 좌훈을 하는 여자, 옷걸이에 걸린 보정속옷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살지말지를 고민하는 여자, 천장에 달린 줄을 잡아당겨 쏟아지는 찬물을 맞는 여자, 머리에 수건을 돌돌 말아올리고 요거트에 밀가루와 꿀을 섞어 얼굴에 바르는 여자가 하나의 프레임 속에서 자리잡고 있었다.


크고 작고 마르고 뚱뚱하고 젊고 늙은 그녀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알몸으로 때를 밀고 친목을 다지고 중매를 서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마침내 큰 마음 먹고 아로마 전신 마사지라도 받고 나서는 날이면 그녀들은 아주 개운하고 뽀땃했으리라. 그 개운함으로 인하여 일주일 정도는 옷으로 몸을 가리고 있어도 일상의 고단함을 참아낼 수 있었으리라.    


아무도 뭘 먹거나 바르지 않는 남탕에서 몸을 씻는 사람은
바로 위층에서 벌어지는 여자들의 군상극을 죽어도 알 리 없었다.


"1시간 30분 후에 봅시다."


시간 약속을 잡고 남편과 아들은 남탕 입구, 나와 딸은 여탕 입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서 세수라도 하고 머리라도 빗고 나온 나는 딸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걸었고, 딸은 남탕에서는 팔지 않는 바나나 우유를 마실 생각에 들떠 있었다.


미래의 어느 날에는 나 역시 그녀들처럼, 마침내 알몸으로 브런치를 즐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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