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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침이 Sep 14. 2023

손톱에 빨간 매니큐어를 발라도 야하지 않은 여자



나는 외모 치장을 '노동'으로 여기는 여자이다.


일할 때는 그래도 화장도 조금 하고 다녔는데 휴직중인 지금은 옷 속에 브라도 잘 안챙겨 입는다. 편하고 단순한 게 좋아 티셔츠와 청바지를 즐겨 입는다. 아는 사람들은 그런 내게 간절함이 없다고 말했다. 외출용으로도 잠옷으로도 입는 애착 면티는 하도 입고다녀 목이 늘어질대로 늘어지고 구멍이 숭숭 났다. 오죽했으면 무심한 남편이 "이제 그만 그 옷을 놔줘."라고 말할 정도였다.


20대에는 외모를 꾸미는데 꽤 힘을 쏟았던 것 같다. 나이가 아깝다며 예쁘게 좀 하고 다니라는 말을 계속 들어서였을까 . 내게 잘 어울리는 게 무엇인지 알아가는 여정은 타고난 센스가 없어서인지 꽤 험난했다.





             

그리고 그 날엔 처음으로 손톱에  빨간 매니큐어를 발라보았다.

요부라면 응당 꼭 바를 듯한 관능적인 빨강은 아니었고, 오렌지와 다홍색에 가까운 어설픈 빨강이었는데 그래도  마음에 들었다. 산뜻했다. 하루종일 괜스레 콧노래가 나왔다. 그 당시에 나는 아르바이트로 작은 보습학원에서 주 2회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날 저녁 학원에서 강의를 마치고 집에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같이 버스를 기다리던 원장 선생님이 갑자기 내 손톱을 보고 아는 체를 했다.


네일 했어요?

네. 좀 빨갛죠...

예뻐요.

그런데 선생님은 손톱에 빨간 매니큐어를 발라도 야하지가 않네.


중년의 그녀는 말끝에 촤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장난처럼 훅 들어오는 공격에 당황스러웠다. 그 순간 바로 내 옆에 함께 서 있던 영어 강사 선생님의 손톱이 눈에 들어왔다. 미국에서 살다  교포 느낌이 나던 그녀도 빨간 색의 손톱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누가 봐도 확실히 야해보였다. 얼굴도 말투도 체형도 그녀의 모든 것이ㅡ 그런 손톱은 그녀같은 사람만이 해야 하는 거라고 손톱과 찰떡처럼 잘 어울렸다.

원장 선생님도 그녀의 손톱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필 오렌지와 다홍색에 가까운, 나와 같은 빨간 색이었다.


그렇게 나는 내게 잘 어울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타인에게서 조금 아프게 배워가고 있었다. 매주 매월 무안함과 쪽팔림의 순간들은 그후에도 예고 없이 찾아왔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가 입고 싶은 것보다는 남이 말한대로 옷을 입었다. 옷장은 점점 내게 어울리는 옷들로 채워졌지만 심지어 옷 하나도 내 마음대로 입을 수 없다는 게 조금은 불편했다. 내 개성이고 내 자유인데...


뒤통수가 예뻐야만 빡빡 미나요

나는 뒤통수가 안 예뻐도 빡빡 밀어요


자꾸만 유치한 노래가사가 입을 맴돌았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 타인의 취향에 나를 맡기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그날은 한 지하상가 신발가게에서 딸기우유빛의 털 부츠를 집으려는 내게 콧수염난 사장님이 자꾸만 갈색을 권하는 거였다. "키가 큰데 안어울리게 왜 핑크색을 집어요." 말문이 턱 막혔다. 어울리든 안어울리든 그때쯤 난 정말 많이 서러워하고 있었다.

아니요, 나는 그냥 핑크색 신고 싶다고요ㅡ!
사장님도 콧수염 진짜 안어울린다고요ㅡ!


실제로 이렇게 말하진 않았다. 가슴에서는 쌓인 울분 이참에 시원하게 소리높여 외치라 했지만 머리에서는 그래도 착한 네가 참으라 했다. 머리가 이겼다. 꾹꾹 참았다. 그래도 끝끝내 핑크색의 부츠를 집어들어 계산하는 것으로, 앞으로 본인은 고집센 패션멍충이로 살 것임을 장렬히 선언했다. 타인의 취향에 나를 맞춰가며 살기에 내 인생은 너무 짧았다.

그날 내내, 언젠가 TV에서 본 '빨강' 아주머니, '노랑' 아주머니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들은 옷으로 자가치료를 하고 있었다.

'빨강' 아주머니는 아우라가 아주 대단했다. 입술도 머리도 옷도 손톱도 구두도 가방도 모두 새빨간 색으로 멀리서 보면 활활 타오르는 하나의 불덩이와도 같았다. 심지어는 빨간 색이 좋다며 빨간 고춧가루를 팍팍 뿌린 매운 음식만 먹었다. 알고보니 그녀에게는 홧병이 있었다. 가슴에 불을 가진 그녀는 빨간색 옷을 입고 온몸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노랑' 아주머니는 너무 우울했다. 우연히 노란색을 보는데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앞으로도 계속 기분이 좋고 싶었다. 그래서 머리도 옷도 모자도 안경테도 자동차도 한 점의 어둠도 느껴지지 않은 샛노란색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온몸을 노란색으로 덮은 그녀는 덕분에 아주 밝고 신나 보였다.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웃어댔고 그녀는 드디어 활력소를 되찾기 시작했더랬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나는 입고 싶은대로 옷을 입고 다닌다. 때때로 약간 멋부릴 때도 있지만 2023년 현재의 나는 외모 치장을 '노동'이라 생각해서 아무것도 안꾸미고 다니는 여자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손톱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도 야할 수 있는 여자이다. 비록 '자세히 보아야 야하고 오래 보아야 야한 여자'이지만, 이제는 누구에게라도 뻔뻔스럽게 외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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