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냐는 말 진짜 별로지 않아?" 볼 일이 있었는지 메신저로 바쁜 일이 있느냐고 물어온 선배에게 괜찮다는 대답을 보내기도 전에 또 다른 물음이 이어졌다. 부탁을 하자니 미안한 마음이 들어 괜한 자책을 하는 건가 싶은 생각에 왜냐고 물었더니 그가 그랬다. "바쁘면 어떻게 할 거고, 바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거야. 그게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선배는 차분하고 잘 정돈된 사람이었다. 아주 간단한 물음도 가벼이 여기지 않는 사람이랄까. 그런 그를 좋아하기에 언제든 바쁘지 않다는 선의를 보일 준비가 되어있었으나, 그런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하면 정말 바쁜데도 불구하고 괜찮다는 말을 반복하던 나였다. 나는 퍽 무딘 사람이라 괜찮았지만, 선배의 말처럼 거절이 어려워 곤란을 겪을 이들은 어떨까 하는 오지랖이 들었다. 밤이 되면 필요에 의해 불을 켜고 끄듯이 바쁨에도 스위치가 있어 켜면 바쁨 모드로 변하고 끄면 바쁘지 않음 모드로 변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허무맹랑한 상상을 해봤다. 그래도 얼추 흉내는 낼 수 있었다. 바쁠 때 바쁘지 않은 척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그런데 바쁘지 않을 때 바쁜 척을 하는 것은 영 형편없었다. 있는 것을 없는 척 숨기는 건 제법 간단한 일이지만, 없는 것을 있다고 속이는 건 금세 들통나기 마련이니까. 나는 여전히 바쁘지 않다고, 괜찮다고 모두를 속이며 살아가는 중이다.
5월에는 친한, 아니 그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멘토라고 부르며 추앙하던 선배가 이직을 하게 되어 회사를 떠났다. 인턴 시절 그가 있던 팀으로 가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어 알게 모르게 따르고 의지하던 이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그는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자신을 따라 팀에 들어온 나를 두고 떠나는 것이 미안했나, 아님 그간 더 챙겨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나 했더니, 그토록 밝은 사람이 웃음을 잃은 것 같아 미안하다고 했다. 정말 그런가, 나는 항상 우리 팀만 한 팀이 없고 우리 팀 사람들만 한 팀이 없다고 자랑하고 다니는데. 내가 하는 일도 만족하고 있기에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그의 마음에 지어진 나는 조금 더 살아있는 사람이었을까. 글쎄,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다른 이들과 있을 때 발동되는 어떤 모드가 있다는 건 확실했다. 내가 정의하는 나라는 인간이 아닌,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위해 꾸며내는 모습들. 스위치를 켜면 나는 한층 더 활달한 사람이 된다. 그러다 밤이 되고 혼자로 들어서면 스위치를 끄고 진짜 나로 돌아온다.
얼마 전 친한 작가님의 북토크에 갔다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 '최근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인가요.' 생뚱맞은 대답일지 모르겠으나, 나는 꼭 사람이 행복해야만 하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행복이란 단어가 가끔은 너무나도 무겁고 거창해서 행복하냐는 물음만으로도 마음이 덜컥 무너질 때가 있고, 행복하지 않은 나는 어딘가 잘못된 사람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나라는 인간은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얼마 없지만, 행복하지 않음이 슬펐던 적 역시 얼마 없다. 행복이란 건 다분히 상대적이라 아주 조그마한 기쁨도 어쩌면 내게는 과분한 행복일 수도 있다. 그리고 매일 밤 집으로 돌아와 쏟아내는 나의 하루와 홀로 감당해야 하는 공허도 내게는 슬픔보단 벅참에 가깝다. 회사를 나와 퇴근길에 올려다본 하늘에 예쁘게 피어오른 구름을 보며 쉽게도 뭉클해지고, 하염없이 울음을 터뜨리면서도 슬픔에 솔직해져 가는 스스로를 대견해한다. 그러니 누군가 내게 최근 가장 행복했었던 때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엊그제 너무 슬퍼 하염없이 울었던 날이라고 답할 수밖에는 없다.
행복이 조명과 같아 스위치가 있어 내 의지대로 행복해지고 싶을 때마다 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고 있다. 언젠가부터 가벼운 마음으로 건네는 덕담으로라도 행복하자는 말을 감히 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광활한 단어 안에 너무나도 많은 관계와 감정이 담겨 있듯이, 행복이라는 너른 단어 안에도 셀 수 없이 많은 관계와 감정들이 담겨 있다고 믿는다. 애쓰는 행복은 행복이 아니다. 꼭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는 모두 마음껏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즐거워하고, 또 무너지고, 일어서고, 멈춰 서고, 달려 나갈 자격이 있다. 행복하지 않아도 좋다. 행복의 반대말은 슬픔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