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신체에서 아픔이란 것을 잊은 부위가 있다. 팔꿈치는 아무리 세게 꼬집어도 아주 약간의 거슬림 이외의 통증은 느껴지지 않는다. 아프다는 것을 인지하는 통점이란 것이 피부에 분포하는데, 팔꿈치 부근에는 통점이 거의 없어서란다. 아픔의 크기가 작으면 웬만한 고통에는 무뎌지는 수밖에. 그리고 손톱이 있다. 손톱은 일정한 속도로 자라나기에 사람들은 위생의 이유로 날카로운 손톱깎이를 이용해 잘라낸다. 분명 몸에 달려있는 일부분인데도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 손톱도 팔꿈치의 경우처럼 통점이 적게 분포되어 있는 것일까? 아니, 손톱은 죽은 세포란다. 죽어있는 것에 아무리 커다란 힘을 가한다한들 아플 리가 없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죽은 것이 꾸준하게 자란다는 거다. 심지어 손톱 아래의 연약한 살을, 그러니까 살아있는 것을 보호하는 역할까지 수행한다. 배알도 없는 놈, 과하다 싶을 만큼 바짝 잘라보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괜한 심술을 부린다고 죽은 세포가 자라기를 멈추는 것도, 통증이 되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무언가 끊임없이 해야만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내 모든 순간이 죽어버린 관계 속의 한 사람으로 수렴할 게 뻔하다. 방심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밀고 들어오는 힘을 감당할 수 없으니, 애초에 겨를조차 주지 않으려는 수작을 부려본다. 그러나 아무 소용없다. 얼마 못가 멈칫한다. 자주 가던 카페에서 10월 한정이라고 쓰인 밤식빵을 보면서도, 굳이 다른 빵을 골라 커피를 마시면서도, 책 한 꼭지를 읽을 때마다 호흡을 가다듬으면서도, 한 눈만 팔면 당신 생각이 들어온다. 예쁜 것, 귀여운 것, 맛있는 것, 재밌는 것들의 이름의 당신으로 귀결될 때마다 나는 넓고 복잡한 공원에서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처럼 온 감각이 무뎌진다. 가만히 서있으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하나에 몸을 기댄다. 이 의지는 온전히 일방적인 것이라 당신이 전달받을 길이 없으니 혼자 그리다 마는 반복만이 곁을 지킨다.
향수병(Homesickness)은 집에서 멀리 떠나 있는 것을 이유로 생기는 괴로움이란다. 나는 꿈을 꾸지 않는 인간이다. 덕분에 잠을 자는 몇 시간은 아무 생각 없이 흘려보낼 수 있는데, 요즘 따라 연달아 꿈을 꾸는 날이 늘었다. 간절히 품고 있는 것들이 인간의 꿈에라도 나와주는 것이라 믿는지라, 잠을 자는 순간조차 애타는 인간은 불쌍하기 짝이 없었다. 잠에서 깨어도 한동안은 꿈의 내용이 뒤숭숭해 침대에서 일어나질 못하고 때로는 하루를 온통 망치기도 한다. 현실로 돌아와 당신에 대한 생각을 멈춰보려 발버둥 친다.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다. 나는 사람에 대한 향수를 지나치게 앓는 인간임을 안다. 스물에 만났던 사람을 잊고 다시 시작하기까지 꼬박 일곱 해를 떠나보내야 했다. 고작 한 사람을 떠나보내는데 일곱 해나 걸렸단 말이다. 그러니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기까지 또다시 일곱 해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시간을 베어보려 끊임없이 질문을 건넨다. 대체 나는 당신을 어떻게 잊을까요. 이 물음이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나를 괴롭힌다. 대답해줄 사람을 이미 내 곁에는 없고, 정답을 가지고 있는 이도 없을 테니,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여전히 당신을 앓는 것뿐이다. 나에게 향수병은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 것을 이유로 생기는 괴로움이다. 집보다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더 지독한 것은 집은 돌아갈 수 있지만, 사람은 내 마음대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래서 아직도 앓는다. 죽은 것은 여전히 자라고, 손톱과 달리 잘라내는 데는 그만한 고통이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