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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곁순

곁순을 떼내던 날들

by 오설자

이맘때쯤, 거리마다 공원마다 온갖 장미가 피어 축제장처럼 환합니다. 종류도 가지가지, 색도 가지가지, 크기와 모양도 가지가지.


잎 끝이 뱅글 말아지며 뾰족해지는 잎이 피어나는 오리지널 흑장미를 좋아하는데 그런 장미는 잘 보이지 않고, 겹잎이 풍성하여 작약인지 모란인지 모를 장미들만 가득합니다.


유머와 철학적 사유가 철철 넘치는 카렐 차페크의 소설 <평범한 인생>은 공무원으로 평생을 정돈된 삶을 살다가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 지나온 삶을 정리하는 주인공의 이야기입니다. 원예를 즐긴 그답게 식물 이야기로 소설을 시작합니다. 거기에 장미 나무에서 곁순 하나를 떼어내던 의사가 포펠 씨에게 이런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잎자루가 들장미로 변하려는 걸 보세요. 잎자루 안에 들어 있는 들장미의 야성을 항상 억눌러 줘야 합니다.”


아름다운 장미 나무로 만들기 위해, 들장미로 제멋대로 자라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줄기에 난 곁순을 떼어버린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화려한 장미로 탄생하려면 그런 고통이 있었던 거지요. 어떤 한 세계를 무너뜨리고 원하는 ‘무언가로 만들기’ 위해서는 자라나는 자유를 누르기도 해야 합니다.




소설 속 주인공처럼 나도 35년을 학교에 근무하였습니다. 여섯 살에 학교에 입학한 나는 청소년기를 지나고 선생이 되고 무려 50년 간 학교에서 살아온 거지요. 규율이 가득한 조직에 몸담고 있을 때, 야성의 순이 자라지 못하도록 누르던 시간들.


‘선생이 그러면 어떡해?’


언제나 나를 규정하던 도덕적 울타리. 정해진 길을 가느라 겨드랑이의 날개 곁순 하나씩을 떼어내던, 떼어지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비로소 세상으로 나와 ‘나’로 발 딛고 선지 겨우 일곱 해입니다. 이제 ‘사회학교 1학년’인 셈이죠. 비로소 ‘곁순’이 마음대로 자라도 되는 시간이 온 것입니다. 휘어지고 작아진 꽃으로 아름답지 않은 들장미가 되더라도 그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니까요. 마음대로 자라는 들장미가 되어보려 합니다. 작고 못생기거나 그 어떤 꽃이 피더라도 자유로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살다 가고 싶지만 또 다른 삶의 현장에서 여전히 ‘어떤 곁순’은 떼어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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