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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규관 Feb 17. 2023

나의 눈일랑 한층 더 맑게 하여 다오

―김수영 시가 어렵다고?(7)

「도취의 피안」에서 핵심은 “나는 취하지 않으련다”입니다. 1연에 등장하는데, 상당히 단호한  어조입니다. 그리고 그 뒤는 그 이유를 밝히면서, 취하는 대신 시의 화자가 무엇을 바라는지 “날짐승들”에게 말하는 방식입니다. 이게 간략하게 말씀드린 이 시의 구조입니다. 시적 상황은 “무수한 날짐승들”이 여기로 날아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날짐승들”이 시의 화자를 취하게 하는가 봅니다. 그게 느껴지죠? 왜냐면 작품 전체가 그것의 반복, 심화잖아요. 그리고 “날짐승들”이 그렇게 부정적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 4연에 나타나고 마지막 연에서는 “날짐승들”에게 바람을 전하는 형식입니다.      


2연에서 “내가 부끄러운 것은 사람보다도/저 날짐승”이라는 진술은 꽤 의미심장합니다. “날짐슴”에게서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고백이잖습니까. 그러니까 “날짐승들”은 시의 화자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부끄럽게 하는 존재들입니다. 반어적으로 읽으면 “날짐승들”은 시의 화자를 취하게 하는 강한 힘을 가졌습니다. “그의 그림자가 혹시나 떨어질끼 보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그림자”마저도 자신을 취하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이죠.      


3연과 4연은 스스로 취하지 않으려는 이유를 열거하면서 그것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고 부정하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렇다’로 읽힙니다. 일종의 반어죠. 그런데 ‘아니다’는 부정적 반어는 뒤에 더 큰 이유를 제시하기 위해서 곧잘 쓰이는 시적인 방법이기도 합니다. 아니, 이것은 일반적인 글쓰기 방법이기도 하죠. 그런데 뭐가 아니라는 겁니까? “수치와 고민의 순간을” 들키지 않고 싶다는 것입니다.

      

또 시인이 사는 현실에는 이 “날짐승”을 노리는 “솔개미 같은/사나운 놈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시적 수사를 잠시 밀어둔 채로 기술된 상황입니다. 여기서 “날짐승”은 시인의 현재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 같은 존재이지만 현실에 발붙이면 위험해지는 존재입니다. 왜냐면 “솔개미 같은/사나운 놈이” “늙은 버섯처럼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김수영의 아내 김현경의 증언에 의하면, 이 작품은 사회주의에 대한 노스탤지어라고 합니다. 김현경이 김수영에게 물었더니 그렇게 대답하더라는 겁니다. 이 증언은 단순한 참조 사항입니다. 이 증언에 전적으로 맡겨버린 채 작품을 읽으면 영 시시해지기도 하고 진짜로 결정적인 것을 중도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도취”가 무엇인지, 그것의 “피안”이 무엇인지 오리무중이 돼버리죠. 그리고 김수영의 정신의 흐름을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리얼리스트로서의 김수영의 태도에서 우리는 얻을 게 없어지고 맙니다. 아, 김수영이 사회주의자였구나, 하고 당파적 동류의식을 느끼는 지점에서 멈출 수도 있죠.      


김수영이 사회주의자라는 것을 정치적 입장으로 좁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같잖은 국가보안법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렇게 되면 김수영의 진면목에 다가가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치적 사회주의자라기보다는 윤리적 사회주의자, 철학적 사회주의자라고 저는 봅니다만. 그러니 정치적 발언에 사회주의 기운이 안 날 리가 없죠.     


문제는 정치적으로만 사회주의자인 경우입니다. 그런 이들 중에는 정치나 사회 문제 빼고는 생활이나 우정 관계에서 자본주의의 맹독에 절어 있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사회주의를 받아들이려면 내면적으로 그리고 ‘온몸’을 열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김수영의 사회주의를 역사적 사회주의로 해석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가 말한 ‘자유’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 초월이니까요.      


5연 첫 행에서 “날짐승의 가는 발가락 사이에라도 잠겨 있을 운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시간을 가르쳐 주는 것이 나는 싫다”고 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뱀을 목에 감은 채 공중을 선회하는 독수리를 가리키며 영원회귀를 말하는 교사입니다. 그리고 긍지를 상징하는 독수리와 지혜를 상징하는 뱀을 자기의 친구라고 부르죠. 여기서 김수영은 자신의 운명이 “날짐승의 가는 발가락 사이에라도 잠겨 있을” 거라고 고백합니다.      


이 작품에서 “날짐승”은 그냥 상징으로 등장했다 사라집니다. 그 이상의 역할은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날짐승”의 정체가 전적으로 가려진 것은 아닙니다. 4연에서 말했듯이 “날짐승”은 “솔개미 같은/사나운 놈”에게 취약하고, 동시에 “나에게 시간을 가르쳐” 줍니다. 시간을 가르쳐 준다…. 시간을 아는 것은 역사와 존재를 아는 것과 진배 없습니다. 철학에서 시간은 아주 중요한 사유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김수영이 말하는 “시간”은 역사(삶)으서의 시간일까요, 아니면 존재론적인 시간일까요?      


역사(삶)으로서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구분법을 따를 필요가 있습니다만, 존재론적인 시간은 물론 과거, 현재, 미래와 상관이 없지는 않지만 그것을 가로질러서 ‘영원’으로 이어집니다. 영원은 무한정의 시간이 아닙니다. 과거, 현재, 미래… 이 크로노스적인 시간을 초월하는 시간이죠. 여기에서 사상이 탄생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날짐승”은 “나에게 시간을 가르쳐” 준다고 분명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싫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6연에 나타납니다. “나야 늙어가는 몸 위에 하잘것없이 앉아있으면 고만이고/너는 날아가면 고만”이랍니다. 그런데 굳이 그 짧은 만남에 “취하는 것이 싫다”고 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날짐승” 자체가 아니라 ‘취함’이 되는 것이죠. 이렇게 완강한 “취하지 않으련다”의 반복은 정말 싫어서일 겁니다.      


그런 다음 7연에서는 다시 “조그마한 그림자가 무서워 벌벌 떨고 있는/나의 귀에다 너의 엷은 울음소리”도 남기지 말라고 합니다. 이러한 완강한 손사래 자체가 제가 보기에는 김수영의 시에서 예외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시의 제목이 ‘도취의 피안’인 것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서 드디어 ‘발표’합니다. “날짐승”이 “도취의 피안에서” 날아온다고요. 이 부분에서 떠오르는 작품이 없습니까?     


「달나라의 장난」에서 팽이가 돌면서 내는 “회색빛”에 자신도 모르게 도취되려는 화자가 떠오릅니다. 그 작품에서는 약간 무력한 부정이 나타나지요. 그만큼 그 시절의 김수영이 고단했단 뜻도 됩니다. 하지만 「도취의 피안」에서는 아주 강력한 부정이 느껴집니다. “도취의 피안”에 머물지 않겠다는 겁니다. “날짐승”이 엄청난 매력과 이상과 깊이를 알려준다고 해도, ‘지금 여기’는 그것도 용납하지 않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에서 제가 리얼리스트 화자를 읽는 게 과한 것일까요?      


리얼리즘 양식의 작품을 쓴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리얼리스트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재현 자체가 환영을 그릴 수도 있습니다. 사실을 시인이 재현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거기에 유토피아를 새겨 넣기도 하죠. 우리가 조롱 조로 말하는 레토릭, ‘음풍농월’은 그렇게 멀리 있는 현상이 아닙니다.   

   

한때 좋은 리얼리즘 시를 썼다고 해서 그게 평생 유용한 신원 증명서가 될 수는 없습니다. 리얼리스트는 언제나 가능성으로 존재하죠. 왜냐면 리얼리스트는 현실이 언제나 변화한다는 것을 예민하게 인식하면서 변화된 리얼리티에 대응하는 사람이니까요. 리얼리스트는 단순히 리얼리즘 양식의 작품을 쓰는 존재가 아니라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중단 없는 자기 갱신을 하는 작가를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한때 리얼리스트일 수는 있어도 온삶이 리얼리스트인 경우는 드문 겁니다. 스피노자가 그랬죠. 『에티카』 제일 마지막 문장에서요. “모든 고귀한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드물다”고요.     


리얼리스트로서의 빛나는 면모는 마지막 연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차라리 앉아 있는 기계와 같이

취하지 않고 늙어 가는

나와 나의 겨울을 한층 더 무거운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나의 눈일랑 한층 더 맑게 하여 다오

짐승이여 짐승이여 날짐승이여

도취의 피안(彼岸)에서 날아온 무수한 날짐승들이여     


여기서 핵심은 3행과 4행입니다. “나와 나의 겨울을 한층 더 무거운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나의 눈일랑 한층 더 맑게 하여 다오”. 거듭 확인되는 것은, 설움과 비참을 부정하고 내버리지 않듯이 “나의 겨울을” 버리지 않습니다. 도리어 “한층 더 무거운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만 “나의 눈일랑 한층 더 맑게 하여 다오”라고 말합니다.      


제가 전작인 『리얼리스트 김수영』에서 니체를 자주 등장시킨 것은, 이런 삶에 대한 김수영의 태도 때문입니다. 니체는 고통스런 삶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라 생이여, 한번 더!” 통하는 바가 있지 않나요? 지금 “나의 겨울”은 무겁습니다. 그런데 “한층 더 무거운 것으로” 만들겠답니다. 겨울이여, 우리 더 깊은 겨울을 살아보자! 강한 영혼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런 겨울을 만들기 위해서는 “한층 더” 맑은 “눈”이 필요하답니다. “한층 더”가 반복적으로 쓰였습니다. 겨울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그만한 “눈”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겨울이 무거워지는 것과 눈이 맑아지는 것에 “한층 더”가 필요하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눈이 맑아진다는 것에서 무엇이 떠오릅니까? 바로 「공자의 생활난」에서 “바로 보마”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한층 더”는 「달나라의 장난」의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 가야 할 운명과 사명”과 연결되지 않습니까? 내친김에 덧붙이자면, “나의 겨울을 한층 더 무거운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는 「긍지의 날」에서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끝마치기 전에 남은 말이 있습니다. “도취의 피안”에 빠지지 않으려는 자세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작품이 「도취의 피안」이지만, 자신을 도취시킬 것만 같은 “날짐승”은 정작 김수영이 고대하고 기다리던 무엇이라는 겁니다. 「도취의 피안」 이전에 쓴 「거미」에서 김수영은 이런 말을 하죠.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강조―인용자)      


설움이 부정적 의미에서 긍정적 의미로 넘어가는 장면이 「거미」에 와서 나타납니다. 「거미」의 설움을 지나치게 김수영의 심리적, 실존적 설움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그리 간단한 설움이 아닙니다. 물론 부정적 설움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김수영이 가진 설움은 전쟁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는 설움을 벗어나 즐거움으로 쉽게 넘어가는 기만적인 자기 위안을 구하지 않습니다. 현실이 그렇지 않은데 시인 자신만 그렇게 되는 것도 ‘음풍농월’의 다른 버전입니다.      


「거미」는 설움에 “몸이 까맣게 타” 버린 상태, 즉 설움의 바닥을 노래하고 있는 시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도취의 피안」에서 “바라는 것”의 상징이 등장합니다. “날짐승”이죠. 그런데 상황이 녹록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현실은 “솔개미 같은/사나운 놈이 약한 날짐승들”을 노리고 있는 “겨울”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김수영은 간파하고 있던 것이고, 지금은 섣불리 “날짐승”에게 취할 때가 아닌 것입니다. 설령 그게 “날짐승”이 설령 사회주의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이 작품에서 드러난 김수영의 현재 과제는 무엇일까요?      


지금의 과제는 눈을 더 맑게 하는 것입니다. 눈을 맑게 한다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현실을 거짓 없이 봐야 한다는 의미가 그 하나이고 더 깊게 봐야 한다는 것이라는 의미가 덧붙습니다. 맑은 눈은 깊은 눈입니다. 요즘에는 렌즈를 껴서 빛나게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은 깊은 눈이 아니죠. 깊은 눈이어야 비로소 맑아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즈음에 쓴 「여름 뜰」이라는 작품에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묵연히 묵연히/그러나 속지 않고 보고 있을 것이다”. 읽어들 오셨으니 기억나실 겁니다. 여기서 다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김수영의 현실 인식입니다. 「여름 뜰」에서는 뙤약볕이 쏟아지는 “여름 뜰”로 비유되고 「도취의 피안」에서는 “솔개미 같은/사나운 놈이 약한 날짐승들”을 노리고 있는 “겨울”이라는 다소 상징적인 비유를 씁니다만, 「구라중화」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대로 뛰놀 수 있는 마당은 아닐지니/(그것은 골고다의 언덕이 아닌/현대의 가시철망 (…))”이라고요. “현대의 가시 철망”이라니, 세계적인 발언이죠?      


어쩌면 김수영은 자신이 겪은 전쟁이라는 사건을 역사적으로 객관화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김수영의 과잉 수사일 수도 있습니다만, 아무튼 녹록지 않은 현실인 것은 분명합니다.      


마지막으로 김수영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잠깐만 살펴보도록 하죠.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우리는 지금 김수영의 ‘시’를 읽고 있다는 기초적이 사실입니다. 산문의 언어가 아니라 의미가 겹겹이 쌓여 추상화된 시의 언어를 읽고 있다는 사실이요. 일단 몇몇 작품에서 그것이 어떻게 시적으로 표현되고 있는지 나열만 해보겠습니다.      


「구라중화」에서는 “죽음 위에 죽음 위에 죽음을 거듭”하는 상태이고, 「여름 뜰」에서는 “모―든 언어가 시로 통할 때”로 표현되고, 「구슬픈 육체」에서는 “땅과 몸이 일체가 되기”로 나타납니다. 「도취의 피안」에서는 “나에게 온 시간을 가르쳐 주는 것”이죠, 다만 「도취의 피안」에서는 “맑은 눈”이 전경화되지만 지금 김수영의 깊은 곳에서는 현실을 초월하고자 하는 무엇이 꿈틀대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저는 이것을 ‘님’으로 명명했는데요, 이 ‘님’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일단은 어떤 궁극적 경지 또는 상태, 시간, 영원 정도로만 받아들이기로 하죠. 그리고 다시 강조하지만 「공자의 생활난」의 “꽃이 열매의 상부에 필 때”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작품마다 다르게 ‘때’나 혹은 ‘상태’로 비유되지만 저는 이것을 ‘님’의 시적 현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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