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생, 테너를 꿈꾸다

240103 뮤지컬 '일 테노레(Il Tenore)' 관람 후기

by 문수민
뮤지컬 '일 테노레(Il Tenore)' 포스터


시루 속 콩나물처럼 하던 출퇴근길에도 라디오 하나에 즐거워하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만큼 출근을 즐겁게 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얼마나 진심이었던지, 라디오를 듣기 위해 빨리 출근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집에서 들어도 되지만 출근길에 들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그 맛이 있었다.) 클래식 상식, 오페라 줄거리, 아리아 해설, 한국 가곡 등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내 세상은 조금씩 넓어졌다.



그때 들었던 내용 중에 조선 최초의 테너 이인선 선생의 이야기가 있었다. '조선 최초의 테너'라는 말에 귀가 한 번 번뜩하고, 테너에 의사까지 겸했었단 사실에 한 번 더 번뜩했던 기억. 하나의 일에도 허덕이기 바쁜 나에게 그 시절 투잡러 이야기, 그것도 테너이자 의사였던 자의 이야기는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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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그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뮤지컬, '일 테노레(Il Tenore)'가 막을 올렸다. 홍광호, 박은태, 서경수 배우가 주연을 맡고 공연장도 토월극장이라 피 튀기는 티켓팅이 예상되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갈 사람들은 다 가고 좌석은 꽉 찬다. 나는 취재와 티켓팅 시간이 겹쳐 지하철에서 휴대폰을 붙들고 "제발 한 자리만..!"을 간절히 읊조렸다. 그러나 휴대폰 따위로 참전하면서 건방지게 홍젼페어를 욕심낸 나에게 허락된 자리는 없었다. 며칠 뒤 지현이가 OP석을 잡았다며 기존의 자리를 나에게 줘서 겨우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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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월극장은 여태까지 가 본 공연장 중에 가장 단차가 좋고 시야가 쾌적했다. 음향도 깨끗했다. 충무아트센터에 비해 무대가 조금 멀긴 했지만 자첫으로 보기엔 더할 나위 없었다. 관객들이 착석하고, 악기 조율소리가 들리고, 객석이 조용해지면 그때부터는 무대 외에 모든 것들이 흐려진다. 사실 이 날은 너무 많은 일들이 몰아치던 중에 보러 간 것이라 집중을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을 좀 했다. 하지만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정신없이 1930년대 경성으로 이동했다.

의대생이었던 이선은 아주 우연한 계기로 '오페라'를 만난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소리에 이끌린 이선은 자신도 모르게 그 소리를 따라간다. 한 번도 찾아 헤맨 적 없지만 발견하자마자 끊임없이 원해왔다는 걸 깨닫는 것이 운명이라면, 이선에게 운명은 오페라가 아니었을까. 1막에서는 이선과 진연, 그리고 문학회 친구들이 검열을 피해 오페라를 준비하는 과정을 그린다. 그 속에는 꿈꾸는 사람들만이 가지는 활기와 희망이 가득하다. 난생처음 가슴을 벅차게 하는 것을 찾은 이선의 마음이 객석으로 전달될 때는 그에게 동화되어 눈물이 났다. 왜 이렇게 긴장하냐는 물음에 "이렇게까지 간절한 적은 처음이어서요"라고 답하는 목소리는 극이 끝난 뒤에도 계속 맴돌았다. 이번에도 나의 눈물 포인트는 주인공이 꿈을 찾고 그 꿈에 벅차올라 있을 때였다.

극 중에서 이선의 아버지는 이선에게 의사가 되기를 강요한다. 노래를 하겠다는 아들에게 사람을 살리는 일보다 노래하는 게 더 중하냐며 노발대발하신다. 그러나 사실 의사와 테너는 모두 사람을 살린다. 그 방법이 다를 뿐, 죽을 것 같을 때 찾게 된다는 점은 동일하다. 나는 마음이 복잡할 때 한강을 보며 좋아하는 테너의 노래를 하염없이 들은 적이 있다. 한참을 듣고 있으니 폭풍같던 마음이 조금 정리가 되고, 다시 내일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삶을 노래하는 그 소리가 꼭 내일도 잘 살아달라 나에게 말하는 듯했다. 그렇게 마음을 정돈하고 돌아오는 길에, 사람을 살리는 일은 의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예술의 본질은 언제나 그것을 보고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다.

이 공연을 보러가면서 순수한 마음의 가치를 고민했었다. 눈 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세상에서 순수한 마음을 지키며 사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일일까?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걸까? 뮤지컬 '일 테노레'는 그 고민의 답을 알려준다. 조선의 1930년대는 마치 끝없는 터널 속에 갇힌 듯한 시기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식민통치, 계속해서 실패하는 독립운동, 일장기 말소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작은 희망의 불씨도 찾기 힘들었던 그런 암흑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 테노레의 문학회 친구들이 열정을 불태우며 오페라를 준비할 때 관객들은 활기와 희망을 느낀다. 준비하던 연극이 검열에 걸려 취소되었을 때도 이들은 좌절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찾아 앞으로 나아간다.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울수록 희망의 끈을 붙잡은 손에는 힘이 들어가고, 그 실낱같은 희망으로 불태우는 순수한 열정은 어둠 속에서 더욱 찬란히 빛난다. 이것이 삭막한 현실일수록 순수한 마음을 지켜야 하는 이유이다.


일 테노레(Il Tenore)는 나이 든 이선이 지난 날을 회고하며 막을 내린다. 퇴장 직전 무대를 돌아보는 이선의 눈길에는 수많은 감정이 담겨있었다. 찰나의 시선에 수십 년의 세월이 스쳐갔으리라. 격동의 시기에 태어나 상상도 못할 꿈을 꾸고, 영겁의 세월을 넘어 그 꿈을 이뤄낸 한 인생 위로 조명이 쏟아진다.


"나의 일 테노레 이선아, 피날레를 불러줘.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마지막 진연의 대사에 온 관객의 마음이 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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