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만 남은 참패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라이벌 팀은 축구장에서 만난다.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두 팀이 축구경기장에서 치열한 경기를 펼치는 것, 이를 더비 매치라 한다. 더비는 감독에게, 팀에게 굉장히 중요하다. 1경기 이상의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더비 경기에서 승리하면 팀 전체의 사기, 팬들의 응원을 무한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반면 더비 경기에서 패배하면 평소보다 더 강한 팬들의 비난, 더 떨어지는 팀의 사기를 감당해야 한다. 더비 경기의 역사가 깊고 배경이 많을수록 치열함은 올라간다. 이처럼 더비 경기는 축구를 보는 또 하나의 즐거움을 제공한다.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더비가 있다. K리그의 전통의 강호, FC서울과 수원 삼성의 ‘슈퍼 매치’, 울산 현대와 전북 현대의 ‘현대가 더비’, 포항 스틸러스와 울산 현대의 ‘동해안 더비’까지. 그러나 우리나라 최고의 더비 매치는 국가대표팀 경기인 한일전일 것이다. 한일전은 일제강점기라는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에서 비롯한 역사 깊은 더비이다. 한일전은 우리나라의 스포츠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이후부터 더욱 치열함을 보였는데 국민적인 감정이 포함된 역사적인 더비 매치이다 보니 ‘한일전은 가위바위보도 지지 마라.’라는 말도 있었다. 그런 한일전이 지난 25일, 일본에서 10년 만에 열렸다. 요코하마 닛산 스타디움에서 열린 대한민국과 일본의 축구 국가대표 평가전, 전혀 힘도 써보지 못하고 우리나라는 0대 3으로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물론 손흥민, 황희찬, 황의조, 이재성, 김민재 등 우리나라의 핵심 중의 핵심이라 불리는 선수들이 모두 빠진 상태지만 이리도 무기력하게 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고 나온 팀처럼 우왕좌왕하며 플레이하는 우리나라 선수들의 모습에 팬들의 비난은 쏟아졌다.
이번 평가전은 기획, 경기 준비, 경기 내용까지 모든 부분에 있어 문제를 찾을 수 있었다. 우선은 경기 준비이다. 선수 명단을 받아본 팬들은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일부 선수들의 차출 불가로 인해 한번 수정이 된 명단에는 수많은 K리그 선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K리그는 현재 한창 진행 중이다. 평가전이 펼쳐진 3월 25일에서 불과 일주일이 조금 넘는 시간인 4월 2일에 바로 경기가 예정되어있다. 해외에서 입국한 사람들은 모두 2주간의 자가격리 기간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이번 일본 원정에 동행했던 선수들은 이번 라운드에 출전할 수 없다. 국가대표팀에 소집되는 K리그 선수들은 대부분 소속팀에서 핵심자원이기 때문에 각 구단은 선발 라인업을 꾸리는 데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특히 울산 현대와 같은 경우, 김인성, 이동경, 이동준, 김태환, 원두재, 홍철, 조현우가 국가대표팀에 차출되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소속팀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고 있는 선수들이다. 이 선수들을 빼고 한 경기의 라인업을 짜야하는 울산 현대의 감독은 무슨 잘못인가.
벤투 감독이 지나치게 보수적인 라인업을 들고 나왔다는 의견도 있었다. 최근 K리그에서 폼이 좋아 주목받는 선수들보다 본인이 선호하는 선수들 위주로만 선발했다는 것이다. 물론 선수 선발은 감독 고유의 권한이기에 해당 선수를 뽑았다는 이유만으로 비판할 수는 없지만 해당 경기에서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러한 의견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선발 명단에서도 빚어지던 잡음의 결과일까. 경기 내용은 더욱 처참했다.
경기가 시작되고 30분이 되기도 전에 우리나라는 2골을 실점했다. 믿을 수 없는 경기력이었다. 마치 유소년팀과 경기하는 성인팀의 경기를 보는 듯했다. 개인적으로 어떤 장면이나 전술적인 부분을 꼽아가며 비판하기 어려울 정도로 단 한순간도 잘한 부분이 없었던 경기라고 생각한다. 들고 나온 베스트 11과 경기장에서 보여준 전술은 완전히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고 나사가 빠진 사람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우리나라 선수들은 일본이 완벽한 요리를 할 수 있도록 손질에 세척까지 되어 나온, 밀 키트 같았다. 일본의 압박에 우리의 중원은 아무런 정신도 차리지 못했고 공은 측면으로 돌며 길게 처리되기만 했다. 우리의 전방에는 이동준, 나상호, 이강인, 남태희가 위치했는데 공중볼에 강점이 있는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 침투와 공을 다루는 것에 능한 선수들이었는데 이 선수들을 두고 측면으로 돌리며 길게만 공을 주니 자연스레 공격진은 길게 도는 공을 잡으러 라인을 올리게 된다. 반면 강한 압박을 잘 풀어내지 못한 중원은 뒤로만 공을 돌리고 압박에 의해 점차 라인이 밀리며 공수 간격이 넓게 벌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은 일본 선수들을 위한 놀이터가 되었고 수비는 수비대로, 공격은 공격대로 많이는 뛰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결과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전술적인 문제로 인해 선수들의 체력소모는 많아졌고 자연스레 이른 체력 저하와 집중력 저하로 이어졌다. 선수들은 최악의 집중력을 선보였고 나중에는 의지가 없는 사람처럼 경기했다. 일례로 우리의 코너킥 이후 일본이 역습 기회를 맞은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두 명의 센터백이 일본의 선수 6명을 상대해야 했다. 체력적인 문제도 있을 테지만 일본의 선수들이 역습 기회를 맞아 질주하는 모습을 우리 선수들은 지켜보기만 했다. 일본이 패스 미스로 기회를 날리지 않았다면 해당 장면도 골로 이어졌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투지, 의지, 정신력이란 단어를 축구에서 사용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이 경기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도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한일전이기 때문도 아니고 승리를 위해서도 아닌 그저 경기를 위한 기본적인 의지조차 말이다.
이겨야 본전인 한일전에서 이러한 결과가 나오니 애초에 해당 경기를 왜 기획했는지에 대한 비판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당연하다. 현재 우리나라조차 코로나 19가 진정되지 않았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더 많은 확진자가 나타난 국가이다. 특히 요코하마는 현재도 코로나 19 확진자가 많은 지역이다. 심지어 경기 직전 일본의 코칭스태프 한 명은 코로나 확진을 받기도 했다. 도대체 무슨 깡으로 해당 경기를 기획한 것인가. 우리나라 선수들만 코로나에 걸리지 않게 할 획기적인 대책이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신의 가호가 함께할 것이라 그저 믿은 것인가? 굳이 K리그 일정에 문제를 줘가면서 안전하지도 못한 국가에 대표팀 선수들을 보내 경기를 하게 한 의도가 무엇인가? 일본 축구협회가 초청하면 우리나라는 당연히 움직여야 하는 것인가? 믿을 수 없다. 결과까지 챙기지 못했으니 아무것도 챙기지 못한 평가전이었다. 만약 우리나라 대표팀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나온다면 정말 최악의 한일전이 될 것이다.
일각에서는 일본의 올림픽을 위한 홍보 수단이 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이미 올림픽을 한차례 미룬 일본에게 더 이상의 연기는 무리이기에 올해 강행하려 할 것이다. 대규모 성화봉송을 하며 대외적으로 안전함을 보여주려 했던 일본에게 한일전이라는 흥행카드는 좋은 수단이었을 것이다. 국제경기를 통해 일본의 안정성을 보여주며 올림픽도 문제없다는 의지를 보여주기에 최적의 카드가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 선수들은 리그 일정에 차질을 빚으며 안전하지도 않은 국가로 날아가 최악의 경기력으로 완벽한 일본의 홍보 수단이 되었다. 참으로 좋지 아니한가.
한일전은 언제나 치열하고 거칠다. 그러나 이번엔 카드 한 장 나오지 않았다. 여러모로 무리한 일정이긴 했다. 이 경기로 얻은 것이 무엇인가. 선수들은 최악의 경기력이라는 비난을, 팬들은 10년 만에 펼쳐진 한일전에서 0대 3이라는 상처를 받아야만 했다. 협회에서 사과문을 발표하긴 했으나 팬들의 상처는 아물지 않을 것이다. 더비 매치의 무서움을 우리가 감당하고 말았다. 이를 위한 약은 하나다. 더 나은 경기력, 더 나은 운영으로 다음 더비 매치에서 완벽하게 설욕해주는 것이다. 기억하고 기다려야 한다. 기대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