숟가락의 무게
언제부터였을까,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오늘 저녁을 먹는데 '해달'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우리 이야기를 글로 써보면 어때?"
갑작스러운 제안에 조금 당황했지만, 어떤 형태로든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기록을 남기면 좋지 않을까 싶어 좋다고 답했다.
해달은 각자 형태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글을 써보자고 했고, 나는 무엇을 주제로 쓸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사실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가족 이야기로 시작해야겠어.”
위풍당당하게 해달에게 선언한 후 노트북 앞에 앉았는데, 머릿속이 하얘졌다. 거의 10년 만에 내 이야기를 하려니 이렇게 손에 안 잡힐 줄이야. 오랜 시간 동안 남의 글과 말을 읽고, 듣는 일에 익숙해져서인지, 내 목소리를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래서 편법을 써 보기로 결심했다.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혹시 책장에 고등학교 문집 남아있어?”
야밤에 웬 문집이냐며, 유별나다는 엄마의 잔소리를 들으며 몇 분 동안 옥신각신을 했다. 결국 엄마는 영어사전 옆에 숨겨져 있던 문집을 찾아냈다. 내가 10년 전에 썼던 아래의 글과 함께.
나는 어릴 적부터 여러 곳으로 이사를 다녔다.
수원에서 태어나 돌잔치도 미처 치르지 못한 채 이름 모를 도시로 이사를 갔고, 몇 번의 이사를 거친 후 아버지의 고향인 강릉의 할머니댁에 얹혀살게 되었다. 우리가 살았던 쪽방은 주인집과 연결된 자그마한 방이어서 불편한 점이 적지 않았지만, 세 명의 고모를 비롯해 할머니, 할아버지와 오롯이 함께 지낼 수 있었던, 삶에서 몇 안 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다만, 그 사실을 조금 늦게 깨달았을 뿐.
그렇게 그 시골집에서의 생활이 몇 년 지났을 무렵, 여기저기서 대출받은 돈과 부모님이 땀 흘려 번 돈으로 '우리 집'을 짓게 되었다. 공사 중이라 뼈대만 세워져 있고, 시멘트 냄새가 자욱했던 그곳에 처음 갔을 때의 기분은 정말 기묘했다. 그 후 공사 과정도 생생히 기억에 남아 있다.
외벽이 세워지고, 내부 공사가 어느 정도 완성되자, 할머니는 이사 가기 전에 하룻밤 자고 와야 한다며 가족들을 설득했고, 결국 모두들 이불을 싸 들고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인테리어 공사가 끝나고, 이삿짐을 모두 옮긴 후 맡은 새 집 냄새가 너무 좋았다. 아마 가족 모두 그랬을 것이다. 어린 나를 위해 부모님이 불법 증축을 감수하면서까지 만들어 주신 다락방의 감동은 더할 나위 없었다. 8명의 가족이 설렘과 온기로 새 집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인사를 드리고 다락방에 후다닥 올라가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면 막내 고모가 퇴근했고, 뒤이어 작은 고모와 큰고모, 그리고 부모님이 차례로 돌아오곤 했다. 저녁 내내 집으로 돌아올 사람을 기다리며 보낸 시간들이었다. 물론 할머니, 할아버지가 언제나 집에 계시다는 안정감과 함께.
저녁밥을 먹을 때면 큰 상과 작은 상을 모두 펴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저녁 무렵이면 하루 사이에 벗어놓은 가족들의 빨랫감들로 세탁기 옆 바구니가 수북했었다. 그렇다 보니 집안일 분배 등으로 가족 간의 마찰이 생기기도 했다. 세입자들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도 많았다. 월세를 제때 내지 않아서 곤란을 일으키거나, 혼자 산다고 하고서는 여러 명과 단체로 사는 등 부모님이 골치 아픈 일이 많았다. 그러나 그렇게 다사다난한 날들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 때 “숟가락 하나만 더 놓으면 되지”라는 말을 쉽게 하곤 한다. 그러나 숟가락 하나의 무게는 생각보다 가볍지 않다. 한 사람이 집에서 떠나가면 그만큼의 온기, 그만큼의 추억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우리 집이 그랬다.
먼저 작은 고모가 근처지만 분가를 하게 되었다. 몇 년 후 막내고모 역시 회사 직원 동료의 소개로 결혼을 하여 서울로 떠났다. 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저녁에 돌아오길 기다리는 사람과 빨랫감, 숟가락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집에 혼자 있을 때면 밀려오는 허전함이 있다. 그 허전함은 내가 곧 상경을 하면서 부모님이 느끼게 될 빈자리와 더해져 더욱 커질 것이다.
몇십 년 뒤 '우리 집'은 어떤 모습일까. 집에 사는 사람이 없으면 집도 죽어간다는 말이 있다. 점점 비어 가는 '우리 집'이 애처롭고 벌써부터 그립다.
이때부터였을까,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벌써 이 무렵 나는 가족이 주는 온기와 위안을 내내 그리워하며 살게 되리라 짐작했던 것 같다. 그만큼 가족을 꾸리고 싶다는 바람은 커져만 갔다. 핏줄이나 결혼으로 맺어진 ‘정상 가족’을 넘어, 다정함과 따뜻함이 이어준 ‘대안 가족’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
그래서 오늘부터 나의 짝꿍 '해달',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대안 가족을 꾸려나가는 이야기를 써보려고 한다.
해달이 첫 글은 짧고 담백하게 쓰라고 했는데, 글이 두서없이 길어져 버렸다. 양껏 뷔페를 먹고 와서 담백한 글을 쓰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