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취학하기 전? 아님 1학년 때에 있었던 일 같다.
아버지는 오래전 외국에 일하러 나가시고 어머니께서 나와 동생을 데리고 전전긍긍 문칸방 옮겨 다니며 살았던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다가 정말 조그만, 화장실도 없이 방하나에 작은 주방하나 붙어있는 집을 어렵게 사서 집주인이 되는 호사가 생기게 되었다. 1988 드라마에 나오는 덕선이네 반지하집 보다 작지만 다행히도 반지하는 아니었다. 정말 고생 끝에 얻은 집이라서 이사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마음에 들떠서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사실 나는 그런 힘겨움을 백 프로 이해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지만 늘 집주인에게 종처럼 쩔쩔매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아왔었고 일 년이 멀다 하고 짐 싸서 이사 다니는 불쾌한 기분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도 행복 그 자체였다.
이사 가서 며칠 지나지 않아 우리의 행복감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 당시 어머니가 느꼈을 감정까진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사하기까지의 우여곡절이나 앞으로 갚아야 할 대출금 관계에 대한 고민들이 있으셨을 테니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으셨을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우리 가족만의 전유물이 생겼다는 것, 쿵쿵 뛰고 난리를 쳐도 어머니한테 혼나지 않는 놀이권 보호구역이 생겼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그날도 그랬다. 너무 좋아서 흥분한 나머지 어린 나이였지만 남자다움을 증명하고 싶어서 어머니에게 씨름 한판 하자고 제안을 했다. 아마도 아버지 없는 자리에 아들이 어느 정도 자리 메꿈 할 수 있게 성장했음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시~~ 작! 나는 힘껏 밀어붙였다. 온 힘을 다했고 양보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나는 어쨌건 내가 어머니를 보호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남자로 성장하고 있음을 증명해야 했다. 하지만 그 나이에 내가 물리적으로 어머니를 제압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요리조리 제간을 부려봤지만 결국 나는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보기에 나는 참 가소로운 조무래기였을 것이다.
문제는 넘어지는 순간 발생했다. 그 작은 방 안에는 이사 다니면서 낡아지긴 했지만 신혼살림으로 장만한 나름 가치 있는 자개 수납장이 있었다. 그리고 관리를 잘하려고 유리까지 얹어 놓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는 물건 보는 안목도 있고 살림관리를 잘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넘어지며 씨름의 패자로 확정되는 순간 그 수납장 모서리에 오른쪽 눈 위에 눈썹 부분을 부딪혔다. 다행히도 빗겨 나면서 눈은 피해 갔지만 눈썹 위에는 2센티 정도의 열상이 생겼다. 나는 정신이 얼떨떨하고 통증은 잘 못 느꼈던 것 같다. 순간, 도전에서 패한 쑥스러움이 통증을 막아주고 있었을까? 아무튼 나는 그랬지만 어머니는 많이 놀란 눈치였다. 눈썹 위를 이리저리 돌려보고 난 후 속히 구급약 상자에서 거즈를 꺼내 눈썹 상처 위에 붙이셨다. 그리고 이어 나를 등에 업고 뛰기 시작하셨다. 나는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불안한 마음이었고 어머니는 거리에서 거리로 계속 뛰고 또 걸으셨다.
외상을 치료해 줄 병원을 찾으셨던 것이다. 보기보다 상처가 깊었나 보다. 그 당시 내가 사는 곳엔 외과 전문병원은 없었다. 그저 간단한 봉합시술을 할 수 있는 동네의원들이 몇 곳 있었던 것 같다. 게다가 사고가 생긴 시간이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으니까 (어린 나이었기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을 것을 감안하더라도 8시는 넘지 않았을까 싶다) 그 시간에 갈 수 있는 병원을 찾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병원을 찾아 헤매던 중 중심가를 좀 벗어난 상가들의 끝자락에 아직 문을 닫지 않은 병원을 찾을 수 있었다. 병원이라기보다는 의원이라고 함이 맞겠다. 지금 기억으로 되짚어 보면 아마도 그 당시 진료 중이 아니라 이미 진료는 끝났지만 어떠한 이유로 조명만 켜 놓은 임시개문 상태였던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간호사와 직원들은 아무도 없었고 동네 아저씨처럼 생긴 의사 선생님이 앉아서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었다. 아무튼 어머니는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의원으로 들어섰고 얼른 내 손을 끌어당기면서 선생님에게 내 얼굴을 보이며 말하였다. "좀 봐주세요. 어떻게든 부탁합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정말 다급함에서 나온 절실한 부탁의 표현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좀 난처해하셨지만 그 당시 정이 많고 서민적인 지역사회 분위기 때문인지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 하셨던 것 같다.
하지만 외과진료를 주로 하였던 곳이 아니라서 안면부 봉합에 필요한 전용실과 바늘을 찾는데 시간이 꾀 걸렸던 것 같고, 때마침 마취액도 있지 않아서 난감해하셨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지체하면 얼굴에 흉터가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셨는지 마취를 할 수 없어도 봉합시술을 하기 원하셨다. 선생님도 동의하셨고 마취 없이 한 땀 한 땀 꿰매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는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눈물이 주르륵주르륵 흘러내렸고 어머니는 나의 손을 꼭 잡아주셨다. 눈물이 흘렀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계셔서 마음은 편안해졌다. 처음 바늘에 따끔한 통증이 찾아왔지만 몇 땀을 더하고 나니 얼얼한 느낌만 있고 바늘이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되었다. 그리고 곧 치료는 끝이 났다.
어머니와 함께 돌아오는 길. 괜한 장난을 걸어서 이렇게 된 건가 싶은 후회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품이 참 따뜻하고 안전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는 병실에 입원해 있다. 아프다. 발목에 골절이 생겨서 수술하고 수시로 주사를 맞으면서 치료를 받고 있다. 감싸두었던 붕대를 걷어내고 소독을 하면서 살갗에 까맣게 붙어있는 봉합실을 보았다. 수술 부위를 본다는 게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봉합실들을 보면서 40년이나 거슬러 올라가는 기억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지금은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곁에 계시지 않지만 그 당시의 어머니보다 더 나이가 든 현재의 나의 입장에서 어머니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그때 눈썹의 열상을 치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머니는 오늘 길 내내 "많이 아팠지? 고생했다."는 말을 연신하셨고, 집에 돌아와서도 얼굴과 손도 닦아주셨고 이불을 덮어주시며 잠이 들 때까지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리고 다음날도 아무 일 없는 듯이 웃으며 계란 반찬을 만들어 주셨다. 그 당시에 어린 나는 하염없이 좋았지만, 중년의 나이에 들어선 지금의 나로서는 마냥 즐거울 리 없는 일이다. 너무나 마음 아픈 일이다. 이국땅 멀리에 남편을 보내놓고 수년간을 혼자서 지내온 어머니에게 그날의 경험은 어떤 기억이었을까? 간담이 서늘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고가 날 때부터 병원을 찾아다니고 치료를 받는 동안 얼마나 많이 놀라고 긴장하고 있었을까? 주변에 어머니를 위로하고 달래줄 사람도 없었을 테고, 오히려 아이들 놀랠까 봐 표현도 못하고 인자한 표정으로 아이들 먼저 달래기에 바쁘셨다.
내가 그 당시로 돌아가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면 그 놀랐을 마음을 위로하고 정말 고생하였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따뜻한 사골국이라도 끓여서 마음을 풀어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