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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드리아나 Aug 29. 2024

바다가 젤리로 변했다!

2. 미완성의 화학약품

2. 미완성의 화학약품


  사람들은 5월을 장미의 계절이라고 했다. 해리네 집 돌담 가장자리에도 넝쿨처럼 자란 장미가 탐스럽게 필 준비를 모두 마친 듯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5월은 귤꽃 향기의 계절이라고 해리는 생각했다. 학교 울타리 왼쪽 골목을 끼고 그 주변은 모두 귤밭이다. 이 귤밭들은 돌담을 경계로 끝없이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학교를 나서면 진한 귤꽃 향기가 코끝을 자극하고 집으로 돌아와 바닷가로 내려가면 바닷물과 비릿한 해초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해리는 그런 냄새가 좋았다.


  해리와 라산은 할머니와 할아버지 두 분이 사시는 집을 사이에 두고 옆집이라 학교를 갈 때도 올 때도 같이 다니는 친구다. 처음에는 친구들이 사귀냐고 놀려댔지만 1년 넘게 같이 다니니 모두 그러려니 하고 더 이상 놀리지도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오히려 둘 중 한 명이 없으면 그게 이상해서 나머지 한 명에 대해 꼭 물어보는 것이 친구들의 일상이 되었다. 해리네가 이사 왔을 때 라산은 해리 보호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학교까지 가는 길, 동네 구석구석, 바닷가 탐방, 법환포구를 끼고 있는 올레길까지 모두 라산의 영역이었다. 라산은 학교 공부를 제외하고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귤꽃도 작은 몽돌해변도 모두 라산이 알려준 것이었다. 그리고 가장 좋았던 것은 - 어쩌면 이것이 단짝이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 라산이가 아기 고양이 토리를 해리네가 키울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해리네는 해리 동생으로 흰 푸들 강아지 해돌이를 키우고 있었다. 아빠가 해돌이를 데리고 왔을 때 해리는 첫눈에 이 녀석이 딱 맘에 들었고, 자기 이름의 ‘해’자 돌림으로 이름을 지었다. 토리가 오면서 해돌이 동생이 생긴 셈이었다. 어쨌든 라산과 해리는 공동연구자로서 그리고 바다지킴이로서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해리가 태어난 날은 5월 31일이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바다의 날이다. 우연의 일치이기는 하나 해리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빠는 해양과학자이고, 자신은 바다의 날에 태어났기 때문에 바다와 자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다에 대한 애착이 많았다. 어렸을 때도 바닷가에만 가면 물 만난 물고기처럼 좋아했다고 했다. 자신의 생일도 모르는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바다를 좋아했으니 이건 분명 ‘운명’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해리의 논리다.


  해리는 5월 31일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밑면이 넓은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는 신발’ 만들기에 집중했다. 아마도 그날이 되면 어느 정도는 완성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 아빠의 도움을 받아서 실험을 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어쩌면 성공할 수 있는 또 다른 아이디어가 나올 수도 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해리의 생일, 아빠는 마당에 미니수영장을 꺼내 물을 4분의 3가량 채우셨다. 아마도 700L쯤 될 것 같았다. 파라솔 탁자에는 소품 양동이처럼 생긴 여러 가지 분말 통들을 준비해 두셨다. 해리는 라산과 해돌이와 토리를 불렀다.


  “과연, 우리 아빠의 선물은 뭘까요?”

  “궁금하지? 일단 바닷물을 좀 만들고, 가만있어 보자! 바닷물의 염도, 3.5%로 맞추고, 음~ 수온이 조금 올라가면 그때 선물을 공개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빠, 저 가루통들은 다 뭐예요?”

  “저게 바로 아빠가 준비한 선물이지!”

  “저 가루들이요?”

  “우리 해리가 생일 때마다 바다 위를 걸을 수 있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지? 벌써 3년이 넘었네. 그래서 아빠도 해리처럼 틈틈이 연구를 했어. 바닷물을 단단한 겔 상태로 만들어 보려고.”

  “우와! 그럼, 저 가루들은 바닷물을 젤리처럼 만드는 가루약인 거예요?”

  “아마도 젤리보다는 더 단단하게 될 것 같은데!”

  “대~박!”

  해리와 라산이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와! 아빠, 정말요? 빨리 해봐요.”

  라산과 해리는 커다래진 눈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만약에 아빠가 연구한 대로 성공을 한다면 바닷물 속에 가루가 들어가면서 가루가 퍼지는 주변 일정 부분만 바닷물이 단단하게 굳어지게 될 거야. 그러면 바닷물 속에서는 모든 것들이 잠시 활동을 멈추게 되는 거지. 마치 냉동실에서 급속 냉동 상태가 되는 것처럼 말이야.”

  “그럼, 바다가 잠시 젤리처럼 되었다가 다시 풀어지는 거겠네!”

  “그렇지! 그런데 아직 다시 원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약품이 완전하지 않아서 아빠도 더 연구해야 해. 우리 딸 생일에 맞춰서 끝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쉽지가 않은 연구라 시간이 많이 걸리네. 그럼, 일단 겔 상태로 만들어 볼까?”


  해리는 체육대회 100m 달리기 직전처럼 심장이 마구 뛰어서 긴장감을 없애기 위해 해돌이를 꼬옥 끌어안았다.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정말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아빠가 분말 통 중 첫 번째 통의 가루 한 숟가락을 물에 넣었다. 그리고 가루들이 물속에 퍼지는 것을 확인하고 두 번째 통의 가루를 조금씩 넣기 시작했다. 마치 엄마가 요리를 하면서 간을 맞추기 위해 조미료들을 조금씩 넣는 것처럼 느껴졌다. 해리와 라산은 바짝 긴장한 상태로 지켜봤다. 두 번째 통 분말 두 숟가락 정도를 넣고 조금 기다려 보자는 말씀을 하셨다. 물이 서서히 반투명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아빠는 손으로 물을 눌러보라고 했다. 해리와 라산은 손으로 물을 눌러보았다. 정말 커다란 젤리가 된 것 같았다. 젤리처럼 매끄럽고 약간의 탄력도 느껴졌다. 과연 이 위를 걸을 수 있을까? 아빠는 약간의 시간을 두고 물을 좀 더 단단하게 굳게 한 후 해리에게 물 위로 올라가 보라고 하셨다. 해리는 해돌이를 라산에게 넘긴 후 아빠 손을 잡고 조심히 물 위로 올라섰다. 거대한 바닷물 곤약젤리 위를 신발 자국을 남기며 걷는 순간이었다. 아직 완전히 굳어지지 않은 약간의 바닷물이 있어 이 곤약젤리는 마치 빙하덩어리 느낌이었다. 해리는 빙하를 본 적이 없었지만 꿈속에서 봤던 북극곰의 빙하를 연상했다.


  “와~ 아빠, 진짜 바닷물 위를 걸었어요. 야호!”

  조심조심 걷던 해리는 좀 더 과감하게 바닷물 위를 폴짝폴짝 뛰면서 좋아했다.

  “라산! 완전 신기해! 너도 얼른!”

  해리와 교체하여 라산도 바닷물 위를 걸으며 엄지를 척 내보였다. 해돌이와 토리도 바닷물 위로 올라갔다. 해리가 다시 올라가도 단단한 바닷물은 탱글탱글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얘들아, 이 실험을 실제 바다에 했을 때는 결과가 좀 다를 수도 있어. 오늘은 바닷물처럼 만들어서 실험을 했지만 이걸 바닷가에서 한다면 꼭 이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지. 바다는 생물체처럼 계속 움직이며 활동을 하고 있어서 굳어지는 속도보다 약품의 효력이 더 빨리 떨어질 수도 있고... 아직 약품이 완전하지 않기도 하고!”

  “그래도 아빠, 너무너무너무 감사해요! 기분이 정말 좋아요!”

  “바다 위를 걸어본 사람은 지구에서 아마 우리뿐일걸요!”

  라산도 여전히 신기해하면서 거들었다.

  “너희들이 좋아하니, 아빠도 기분이 좋은데! 자~ 그럼, 굳어진 바닷물을 다시 풀어볼까?”

  모두 내려오게 한 후 아빠는 다른 통의 가루를 또 조금씩 넣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굳어졌던 바닷물은 뭉그러지면서 김치 만들 때 썼던 찹쌀 풀 같기도 하고 밀가루 풀 같기도 했다. 지난겨울에 엄마는 김치에 넣을 풀을 쑤다 실패해서 풀이 되직하게 되었는데 해리는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면서도 뭔가 실패했다는 느낌을 받고 막 웃었던 기억이 있다. 가루약품을 좀 더 넣고 나니 바닷물이 쌀뜨물처럼 되었다.

  “그런데, 아빠 바닷물 색깔이 원래대로 안 돌아와요?”

  “조금 더 기다려 볼까?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아빠 약품이 아직 미완성이라 약간의 부작용이 발생했나 보다!”

  아빠는 짐짓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씀하셨다. 바다 위를 걷는 신발도 미완성이기는 하나 해리는 자신의 12번째 생일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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