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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어문 Oct 20. 2021

인간실격

당신의 은하수가 배달되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것도 못됐어
결국 아무것도 못 될 거 같아
- 부정의 대사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 같다며, 아버지 앞에서 아이처럼 펑펑 우는 부정의 대사가, 내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전도연과 류준열 두 배우의 이름만으로도 기대가 되는 작품이었다. 예상보다 많이 우울해서 볼 때마다 감정 소모가 많은데, 그 우울이 너무 공감이 되면서 한편으론 위로가 된다. 나만 힘든 건 아니구나 하는 못난 위안이다.


강재와 부정의 내레이션이 많아 자칫 몰입을 방해할 수도 있는데 , 오히려 두 사람의 감정선을 쉽게 따라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어려운 말도 없고, 구구절절한 설명도 없지만, 듣고 있다 보면 내 마음을 따라가는 듯한 묘한 공감을 불러일으켜준다.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것도 못되었다는 거,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할 거 같다는 말.

내가 스스로에게 자주 해왔던 말과 많이 닮아 있다.

대학을 나왔더니 대학 나온 엄마, 대학원을 마쳤더니 대학원 나온 엄마가 되었다. 재취업에 도움이 될 거란 생각으로 학자금 대출까지 받으며 다녔던 대학원 졸업장과 영양교사 자격증은 시간 앞에서 아무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 내가 선택했던 진로는 10년 전도 20년 전도 현재도 여전히 최저시급이다.


어느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런 내 마음과 닿을 것만 같은 부정의 내레이션은 가여우면서도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부정이 다시 일어섰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나도 일어서고 싶어서.



뭐가 그렇게 슬퍼요?


부정은 작가이자 출판사 팀장이었다. 정확한 사연은 아직 알 수 없지만 정아란과의 악연 때문에, 직장도 아이도 자신도 잃어버리는 상황이 되었다. 정아란에게 매일매일 당신이 불행해지기를 기도한다는 악플을 쓰는 부정,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하루하루 죽은 듯이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은 늘 슬퍼 보인다.


책 만드는 일이 제일 좋았던 부정은 더는 그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아이를 잃은 죄책감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 부정이 그래도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면 아버지였다.  


자랑이자 전부인 딸이 무슨 이유인지 출판사를 그만두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한 마디도 물을 수가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웃는 딸이 안쓰러워, 사위에게 자세히 좀 봐달라는 말 밖에는 할 수가 없다. 딸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폐지를 주워 적은 돈이라도 힘이 되고 싶은 창숙, 하지만 그마저도 건강이 허락해주지 않는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함이 내내 맘에 걸려 뱉어내지도 삼키지도 못하는 강재는 슬픔을 드러내지 않는 캐릭터다. 툭툭 던지는 한 마디가 그래서 더 아프기도 하다. 그런 강재가 유일하게 마음을 보인 사람, 부정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우연히 알게 된 강재와 부정, 두 사람은 서로의 슬픔과 고독을 공감하게 된다.



당신의 은하수가 배달되었습니다.


우연하게 함께 별을 보러 가게 된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서로에게 한 발 가까워지게 된다.

강재는 아침이 되면 호박마차처럼 모든 게 사라져 버릴 것 같다. 함께 있는 텐트가 호박마차 같다는 강재는 아침이 되어도 이 호박마차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바라는 거 아닐까.


두 사람은 별을 보며 하룻밤을 보낸 후, 강재의 예감대로 함께 바다로 가지 못한다. 아버지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부정은 미안함과 아쉬움으로 가득하다. 괜찮다며 씁쓸하게 웃는 강재의 뒷모습이 유난히 외로워 보였다.


그렇게 아쉬운 이별 후, 강재는 자신이 전송받은 은하수 사진을 부정에게 보낸다.

밤하늘 사진에 찍힌 두 사람의 모습을 한참 들여다보는 부정, 그날의 그 밤하늘이 그리워 보인다. 답장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메시지를 보낸 후, 보고 또 보는 강재. 부정의 연락을 기다린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두 사람이 연인이 아닌 친구였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세상에 마음 열 사람 하나 없는 두 사람이 겨우 마음을 열게 되었는데, 이별이 없는 친구로 오래오래 서로를 응원하고 위로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현실이라면 그러면 좋겠지만, 드라마 속 설정이니 그럴 순 없을 것도 같다.


큰 사건은 없지만 대사 하나하나, 내레이션 하나하나를 곱씹어보게 되는 드라마이다.

부정이 가입한 자살카페의 이름이 할렐루야라는 것도 슬프다.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라지만, 사실은 마지막으로 삶을 붙잡고 싶은 마음 같아서, 누구보다 살고 싶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끝내 자살한 강재의 지인 정우의 사연이 알수록 더 안타까워지는 이유이다.


사는 게 외롭지, 외로워
그걸 왜 몰라,

이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색깔과 깊이만 다를 뿐, 저마다의 고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드라마는 현실이 아니지만, 드라마 속에서라도 그 고독이 조금은 작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는 게 외롭지 라는 부정의 아버지 대사는 현실 속 우리가 매번 느끼고 있는 감정 같다. 인정하고 싶지 않고 싶지만 함께 있어도 외롭고, 혼자 있어도 외로운 인간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감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신에게 배달된 은하수

그럼에도 우리가 찾고 싶은 사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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