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인기의 하락세는 현재진행형이다. 하락세의 원인은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마블의 팬들은 디즈니가 지향하는, '정치적 올바름 (Political Correctness)' 메시지의 과도함이 영화 자체를 망치고 있다고 주장하며, 디즈니라는 회사 자체가 마블을 망치는 주된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필자도 2019년에 개봉한 어벤저스: 엔드게임 이후로 극장에서 마블 영화를 보지 않게 되었다. 이유는 별개이지만.
CHATGPT 생성이미지 / 디즈니의 마블
일단 내가 마블 영화를 더 이상 보지 않게 된 이유는 첫째, 영화관람 이후에 찾아오는 피로감 때문이었다. 필자는 마블 세계관 자체의 팬이 아닌, 아이언맨이라는 히어로의 팬일 뿐인데 이상하게도 마블 영화는 세계관 자체를 이해해야만 영화를 즐길 수 있도록 스스로 진입장벽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내가 마블 영화를 안 보기 시작한 그 무렵부터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둘째, 창의성의 부재였다. 마블 영화는 주축 인물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의 퇴장 이후부터 새로운 주축 인물을 창조해야만 했는데, 마블은 등장인물의 매력적인 서사를 부여하려는 노력보다 '멀티버스'라는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비슷한 플롯의 히어로 영화를 마치 대량생산 제품처럼 쏟아냈다.
CHATGPT 생성이미지 / 마블의 멀티버스 세계관
멀티버스 시스템이 도입되며 야기된 문제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플롯의 자기 복제이다. 최근 마블 영화의 플롯은 작 중 중심 사건으로 인해 특정한 문제가 발생하면 영화의 주인공인 히어로가 단독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다른 우주의 히어로를 해당 영화의 우주에 편입시키며, 두 히어로가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플롯이 반복되고 있다.
셋째, 관객참여를 저해하는 세계관 자체이다. 이는 앞서 설명한 첫 번째 이유와 연결되는 문제이다. 회사나 학교, 사회의 인간관계에서 이런 경우가 있지 않은가. A라는 드라마가 전국을 강타하여 대다수의 국민이 그 드라마를 볼 정도로 메가히트한 드라마가 있는데 만약 그 드라마를 나 혼자 보지 못한 상황에서 찾아오는 소외감이 이와 유사하다. 마블 영화는 세계관 자체에 대한 이해를 강요하며, 라이트 팬이나 일반 관객을 소외시킨다.
그렇다면 현재 개봉한 <데드풀과 울버린>은 이러한 전철을 밟지 않고 창의적인 플롯을 보여주고 있었을까? 결론은 'NO'이다. 작 중 데드풀이 본인을 '마블 구세주'라고 표현하지만, 그는 마블 구세주가 아니라 그저 비주류히어로(이단아) 일뿐이었다. 그렇다면 데드풀은 왜 마블 구세주가 되지 못했을까?
그저 추억팔이를 활용한 그들만의 감동과 웃음
마블은 뿌리(origin)를 찾으려는 노력을 안 했다. 왜 과거의 마블 영화가 사람들을 감동하게 했는지, 그 이유의 본질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또 게으른 선택을 하고 말았다. '울버린'이라는 인기 캐릭터를 작 중 등장시키며, 이미 장대한 서사의 마침표를 찍은 울버린의 재등장을 정당화시키는 작업에만 몰두할 뿐 울버린이라는 캐릭터의 매력적인 서사를 부여하려고 노력하진 않는다.
예를 들어,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히어로인 아이언맨은 아주 매력적인 서사가 있다. 군수업체를 운영하며, 군사 무기를 팔아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 스타크는 부와 명예, 뛰어난 머리, 잘생긴 외모를 모두 갖춘, 흔히 요즘 언급되는 알파메일에 부합한 완벽한 남자이지만, 테러 사건을 통해 조국, 그리고 정의를 위해 쓰일 줄 알았던 무기가 사실은 민간인의 삶을 위협하는 테러 무기로 사용되는 모습, 그리고 자신과 함께 납치된 동료가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신을 살리는 모습을 목도하며 그는 영웅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CHATGPT 생성이미지
이와 대조되어 <데드풀과 울버린>에서의 등장인물의 서사는 평면적이다. 사례를 들자면, <데드풀과 울버린>의 주인공 울버린은 과거의 후회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으로 묘사되다가 다른 우주의 자신이 구한 등장인물의 조언으로 하룻밤 만에 실패한 과거에서 벗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인다.
데드풀도 마찬가지이다. 비주류인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긍정하며 재치 있게 유머로 승화하던 자발적 아웃사이더 데드풀이, 사실은 주류 히어로가 되고 싶었다는 생각 자체도 지금까지의 데드풀의 모습을 부정하는 서사이지만,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던 서사 자체도 너무나 조잡하여 실망스러울 따름이었다.
데드풀과 울버린(DEADPOOL & WOLVERINE, 2024) 중, 출처: 네이버
그렇다면, 마블은 아름답게 퇴장한 울버린이라는 캐릭터를 재등장시켰을까. 설령 이러한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관객이 보기엔 인기 캐릭터였던 울버린을 등장시켜 손쉽게 팬들과 관객의 사랑을 받으려는 의도로 읽힐 수밖에 없다.
또한, 엑스맨 시리즈를 꾸준히 챙겨본 사람만 느낄 수 있는 유머와 감동도 당연히 문제라고 생각한다. 영화라는 매체는, 드라마와 다르게 한 편으로 완결되어야 한다. 설령, 전작을 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대략적인 줄거리와 플롯이 이해되어야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그렇지 못했다.
매력적이지 않은 메인 빌런
어쩌면 히어로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빌런도 매력적이지 않았다. 엑스맨 시리즈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인 찰스 자비에의 쌍둥이 남매라는 설정으로 등장한, 카산드라 노바가 이 영화의 메인빌런이다.
이 인물은 서사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자신의 동생인 찰스 자비에를 탯줄로 죽이려 했을 정도로 태생부터 악한 존재라는 설명만 존재한다.
데드풀과 울버린(DEADPOOL & WOLVERINE, 2024) 중, 출처: 네이버
빌런이 매력적이지 않으니, 이러한 빌런과 맞서 싸우는 일련의 과정조차도 따분하다. 일련의 과정에 대해 세세히 묘사하는 것은 영화의 큰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이는 직접 영화를 보고 판단하시길 바란다.
아, 그리고 영화의 액션씬도 초반 인트로 액션씬만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따분했다.
이제 마블은 선택해야 한다. 기존 멀티버스 세계관을 과감히 버리고 작품의 유기적 연속성을 택하기보다 한 작품의 완성도에 집중하는 선택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확장성'이라는 측면에서 멀티버스라는 시스템을 선택하면 다양한 이점이 있지만, 결국 마블의 성공 요인은 대량생산 제품처럼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라 <아이언맨 1>처럼 웰메이드 작품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