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20]삶은 원래 완벽한 직선이 아니다.

by Ire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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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것들이 문득 끼어든다.

계획의 가장자리에서, 아주 사소한 오차처럼.

어제까지는 없던 변수가 오늘은 나타나고, 아무 문제 없던 길에 작은 돌멩이가 굴러와 발끝을 건드린다.

그 돌멩이가 크지 않다는 걸 우리는 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떤 날은 그 돌멩이가 마음의 중심을 흔든다.


그때 사람은 종종 묻는다.

왜 이게 생겼지.

이게 무슨 의미지.

누가 잘못한 거지.

어떻게 해야 균형이 맞지.


이 질문들은 겉으로는 이성의 질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마음의 질문인 경우가 많다. 마음은 불확실성을 싫어한다. “그냥 그럴 수 있는 일”이라는 결론은 너무 맨몸이라서, 마음이 기대어 쉬기 어렵다. 그래서 사건을 의미로 감싸고, 원인을 서사로 만들고, 책임을 분명히 해서 세계를 다시 단단하게 고정하려 한다. 불안은 늘 질서를 원한다. 그리고 질서는 때로, 집착이라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삶은 원래 완벽한 직선이 아니다.

인생은 늘 조금씩 흔들린다.

오차는 삶의 구성 요소이고, 변수는 인간의 일상이며, 예외는 세계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내가 정말 배워야 하는 것은 ‘오차가 없는 삶’이 아니라, 오차가 생겼을 때 마음이 무너져 내리지 않게 하는 태도인지도 모른다.


나는 요즘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인생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사람이 아니라, 통제할 수 없는 것 앞에서 부드러워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 부드러움은 체념이 아니라, 성숙한 선택에 가깝다는 것.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순간적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이 삶의 결을 바꾼다.

“왜 이런 일이 생겼지?”로 시작하면 곧 의미의 미로로 들어간다.

미로에서는 출구보다 해석이 많고, 해석이 많아질수록 마음은 더 지친다.

하지만 “살다 보면 그럴 수 있지”로 시작하면 미로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 말은 사건을 가볍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그 말은 사건을 현실의 자리로 돌려놓는다는 뜻이다.


그럴 수 있지.

인생이 원래 그래.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지.


이 질문은 삶을 살리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여기서부터 ‘통제 가능한 것’과 ‘통제 불가능한 것’을 나누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통제 가능한 것에는 행동이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절차, 내가 확인할 수 있는 정보, 내가 취할 수 있는 선택.

그리고 통제 불가능한 것에는 받아들임이 있다.

상대의 마음, 세상의 속도, 타인의 인식, 시스템의 오류, 때때로 찾아오는 운의 굴곡.

이 둘을 구분하는 순간, 마음은 이상하게 안정된다.

문제가 해결되어서가 아니라, 내 에너지가 쓸 곳을 다시 찾기 때문이다.


집착은 대개 이 구분이 흐려질 때 시작된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고 하면서 생긴다.

상대가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상대가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사건이 반드시 내가 납득할 방식으로 끝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들은 처음에는 ‘정당함’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마음의 늪이 된다.


인간관계가 그렇다.

누구나 한 번쯤은 안다.

지금 나는 늪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 사람과의 관계는 이미 나를 소모하고 있고, 나는 점점 작아지고 있고, 매일의 리듬이 흐트러지고 있다.

그런데도 끊지 못한다.

왜냐하면 끊는 순간부터 생각들이 덕지덕지 붙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내가 헤어지면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혹시 내가 성급한 건 아닐까.

조금만 더 참으면 달라질까.

내가 지금 지는 것처럼 느껴지면 어떡하지.

이렇게 끝내면 내가 바보가 되는 것 같지 않을까.


생각은 인간의 능력이지만, 때때로 생각은 끈이 된다.

그 끈이 발목에 감기면 “아는데도” 빠져든다.

이성으로는 출구를 보면서도, 감정으로는 늪의 가장자리에서 미련을 붙잡는다.


소송이나 분쟁도 똑같다.

숫자의 문제는 비교적 끝이 난다.

얼마를 받고, 얼마를 못 받고, 손익을 정리하면 된다.

하지만 감정이 붙는 순간, 그것은 숫자의 싸움이 아니라 정체성의 싸움이 된다.

내가 옳다는 것을 확인받아야 하고, 부당함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어야 하고, 상대가 사과해야 균형이 맞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면 싸움은 길어진다.

그리고 길어진 싸움은 내 삶의 다른 부분을 태운다.

이겼어도, 이상하게 지친다.

무언가를 얻었는데도, 내 안에서 잃어버린 시간이 더 크게 느껴진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는, 칼이 필요하다.

차갑고 잔인한 칼이 아니라, 삶을 살리는 칼.

생각의 끈을 끊는 칼.

감정이 붙을수록 더 깊어지는 늪에서, 나를 꺼내는 칼.


그 칼의 이름은 결단이다.


결단은 완벽한 확신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결단은, 확신이 없는데도 하는 선택이다.

“이게 맞는지”를 완전히 증명하기 전에, “이게 나를 살리는지”를 먼저 보는 선택이다.

결단은 승패가 아니라 생존을 기준으로 한다.

내 시간, 내 에너지, 내 하루의 리듬, 내 마음의 평온.

그것들이 무너지고 있다면, 그때는 ‘이겨야 한다’가 아니라 ‘나를 데려와야 한다’가 된다.


그래서 나는 요즘 이런 기준을 연습한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그 일을 ‘큰일’로 만들지 않는 연습.

문제가 생겨도 내 하루 전체를 담보로 잡히지 않는 연습.

내가 할 수 있는 것까지만 하고, 그 다음은 놓아버리는 연습.


해결해볼 데까지 해결해보고,

안 되는 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 문장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이 문장은 인생을 운영하는 방식이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오히려 통제 가능한 것에 더 집중할 힘을 얻는다.

그리고 그 힘이 삶을 앞으로 밀어준다.


인생의 아름다움은,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흘러갈 때가 아니라

원하지 않았던 변수가 생겼는데도 내가 무너지지 않을 때 피어난다.

완벽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다시 균형을 찾는 과정이 아름답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더 유연해지고, 조금씩 더 단단해진다.


오늘도 변수가 생길 것이다.

작은 오해, 작은 오류, 작은 지연, 작은 불편.

그때 나는 이렇게 말해보고 싶다.


그럴 수 있지. 인생이 원래 그래.

자, 그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지.


그리고 그 일을 하고 나서,

나머지는 하늘처럼 넓은 영역에 잠시 맡기고

나는 다시 내 하루로 돌아오는 것.


그게 내가 배우고 싶은 삶의 태도이고,

아마도 인생이 우리에게 조용히 가르치는 아름다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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