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26] “그럴 수도 있지.”

by Ire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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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주 착각한다. 인생 전체를 한 번에 들여다볼 수 있을 것처럼, 인생이란 거대한 지도 한 장을 펼쳐놓고 길을 고르기만 하면 될 것처럼. 그런데 실제로 내가 만지는 삶은 지도 전체가 아니라, 지도 위에서 딱 손끝이 닿는 한 점이다. 오늘 하루.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순간에 내가 어떤 생각을 붙잡고, 어떤 말로 상황을 해석하고, 어떤 행동을 선택하느냐. 결국 삶은 그 작은 선택들의 연쇄로 만들어진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고통과 고난과 문제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갖추는 때가 있다. 놀랍게도 그 순간은 대개 ‘무언가 나쁜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일어난 일이 내 기대와 어긋났기 때문’이다. 나는 사건 자체보다 기대의 붕괴에 더 크게 다친다. 기대는 예측이고, 예측은 내 마음속에서 이미 한 번 완성된 시나리오다. 그러니 현실이 그 시나리오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때, 마음은 현실을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배신으로 받아들인다.


여기서 인생의 갈림길이 생긴다. 똑같은 상황을 두고도 삶이 완전히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상황을 붙잡는 방식,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상황에 붙이는 첫 문장이다.


“이거 어떡하지?”


이 문장이 입 밖으로 나오거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 세계는 갑자기 무거워진다. 문제는 문제로만 남지 않고, 나의 능력과 미래를 시험하는 거대한 시험지가 된다. 해결하지 못하면 큰일이 나는 것 같고, 원하는 방향으로 되돌려 놓지 못하면 인생이 망가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여기서부터 삶은 ‘해결해야만 하는 것’들의 덩어리로 변한다. 하루는 시작부터 빚이 된다. 마음은 갚아야 하는 돈처럼 바빠지고, 숨은 얕아지고, 눈앞의 사건은 필요 이상으로 커진다.


반대로 같은 상황에서 다른 첫 문장이 있다.


“아, 이렇게 됐네.”

“그럴 수도 있지.”


이 문장들이 가진 힘은 대단히 조용하고, 그래서 더 강하다. 이 말들은 문제를 부정하지 않는다. 현실을 미화하지도 않는다. 다만, 현실을 ‘내가 통제해야만 하는 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저 현실을 현실로 놓아 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묻는다. 왜 이렇게 됐을까. 지금 가능한 선택은 무엇일까. 무엇을 바꾸고, 무엇은 받아들일까. 그러면 상황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지만, 마음이 상황의 포로가 되지 않는다.


이 차이를 구조로 보면 더 명확해진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마음속에서는 거의 자동으로 세 단계가 작동한다.


첫째, 사건이 들어온다.

둘째, 해석이 붙는다.

셋째, 감정과 행동이 따라온다.


나는 종종 사건이 감정을 만든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해석이 감정을 만든다. 사건은 재료이고, 해석은 조리법이다. 같은 재료도 어떤 조리법을 쓰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음식이 나온다. 삶도 그렇다. ‘이거 큰일이다’라는 조리법을 쓰면 삶은 위기라는 맛이 난다. ‘그럴 수도 있다’라는 조리법을 쓰면 삶은 다소 거칠어도 삼킬 수 있는 맛이 된다. 삶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 삶의 맛이 달라진다.


그렇다면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은 체념일까. 받아들이는 태도를 ‘포기’로 오해한다. 그러나 받아들임은 포기가 아니라 출발선이다. 포기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겠다는 선언이지만, 받아들임은 지금 여기서 움직이기 위해 현실을 정확히 놓아두는 작업이다. 현실을 부정하면 에너지가 현실과 싸우는 데 새고, 현실을 인정하면 에너지가 방향을 찾는 데 쓰인다. 받아들임은 삶의 동력을 낭비하지 않게 해주는 가장 실용적인 태도다.


여기에는 또 한 겹 더 깊은 층이 있다. 내가 고통을 느끼는 이유는 ‘예상과 다른 결과’ 때문이라기보다, 그 결과를 ‘나에게 일어난 일의 의미’로 과잉 해석하기 때문이다. 일이 틀어지면 그 순간부터 사건을 넘어서서 나를 평가하기 시작한다. 내가 부족해서, 내가 잘못해서, 내가 운이 없어서, 나는 늘 이런 식이라서. 사건은 어느새 ‘나에 대한 판결문’이 된다.


그런데 “아, 이렇게 됐네”라는 말은 판결을 유보한다. 해석의 속도를 늦춘다. 삶이 무너지는 이유는 사건이 아니라 속도다. 너무 빨리 결론을 내리고, 너무 크게 의미를 붙이고, 너무 멀리까지 불행을 예측하는 속도. 받아들이는 말은 그 속도를 줄인다. 그래서 삶이 덜 아프다. 덜 아프면 더 잘 본다. 더 잘 보면 더 좋은 선택을 한다. 결국 말 하나가 삶의 방향을 가르는 것은, 말이 ‘감정의 온도’를 바꾸고 ‘행동의 질’을 바꾸기 때문이다.


나는 종종 ‘인생은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라는 문장을 떠올린다. 하지만 여기에도 구조가 있다. 아무렇게나 떠내려가는 것은 방치에 가깝다. 반면 흐름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방향을 잡는 것은 항해다. 강물은 어차피 흐른다. 문제는 내가 그 강물과 싸우며 물을 거슬러 오르려 하느냐, 아니면 흐름을 읽고 노를 젓느냐의 차이다. 받아들임은 강물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노를 젓는 일이다. “그럴 수도 있지”는 노를 놓는 말이 아니라, 강물과 싸우느라 부러져가던 노를 다시 쥐게 해주는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인생을 잘 산다는 것은 인생 전체를 잘 설계하는 일이 아니라, 매 순간의 ‘첫 해석’을 잘 선택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문장을 조금만 바꾸는 것.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그 상황을 고통의 증거로 삼지 않는 것. 그저 현실의 한 장면으로 두고, 그 장면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다음 동작을 찾는 것.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해석이라는 말은 너무 흔해서 종종 가볍게 들린다. 하지만 가벼운 말은 가볍게 살 때만 가볍다. 삶의 중심이 흔들리는 순간, 그 문장은 비로소 뼈의 무게로 돌아온다. 그때 필요한 것은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 입술에 붙는 한 문장이다.


“어떡하지” 대신 “아, 이렇게 됐네.”

“망했다” 대신 “그럴 수도 있지.”


그 문장들은 현실을 바꾸지 않는다. 다만 현실에 붙는 공포의 장식을 떼어낸다. 그리고 삶은 장식이 떨어진 만큼 가벼워진다. 가벼워진 삶은 잘 움직인다. 잘 움직이는 사람은 결국, 자기 쪽으로 조금씩 삶을 끌어당긴다.


인생은 거대한 결심보다 작은 문장으로 나뉜다. 하루는 거창한 목표로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하루는 아침에 떠오른 첫 생각, 입안에서 굴러나온 첫 말, 그 말이 만든 첫 감정에서 시작해 서서히 기울어진다. 그러니 인생을 다시 세우는 방법도 멀리 있지 않다. 오늘, 지금, 이 순간. 내가 세상과 나 사이에 어떤 문장을 놓을지 고르는 일. 그 고르는 일이 쌓여, 결국 인생이 된다.


흘러가는 대로 산다는 것은 그냥 두는 것이 아니라, 흘러감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움직임을 선택하는 것이다. 인생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날이 대부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대부분의 날에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그날을 ‘고통의 날’로 부를지, ‘그런 날’로 부를지. 그리고 그 이름을 붙이는 순간, 삶은 조용히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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