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데블스 애드버킷에서 악마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허영심,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각이지.”
그 한 문장은 마치 오래된 거울처럼 내 앞에 놓였다. 닦이지 않은 유리 너머로 비친 것은 누군가의 그림자가 아닌, 내가 오랫동안 외면해온 내면의 미세한 균열들이었다. 악이란 결코 천둥처럼 요란한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은 속삭임으로 다가오고, 부드럽게 감싼 뒤 어느덧 마음의 중심에 자리를 잡는다. 그 얼굴은 어쩌면 허영심의 얼굴일지도 모른다.
과거 허영심을 특별히 경계해 본 적이 없다. 누구나 마음 한편쯤 품고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삶에서 ‘성공’이라는 이름의 빛이 강해질수록 그 뒤에 드리운 그림자 또한 더욱 짙어졌음을 부인할 수 없다. 성취는 분명 삶의 원동력이 되었지만, 그 아래에서 교만은 잿빛 씨앗처럼 자라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지 나를 더 잘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자라날수록, 나는 점점 ‘나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은 삶’을 살고 있었다. 영화 속 케빈이 ‘승률’이라는 숫자에 자신을 가두었듯, 나 역시 일이 잘 풀리기 시작하면 그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끝없이 자신을 몰아붙였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지?”
겉으로는 의문을 품었지만, 속에서는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조용히 목을 조여왔다. 내가 그것을 ‘목표’ 혹은 ‘책임’이라 부르던 순간부터, 허영심은 나를 가장 교묘하게 다루는 방법을 찾아냈다.
종종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땐 어쩔 수 없었어. 상황이 그랬으니까.”
하지만 영화 속 악마는 날카롭게 말한다.
“난 무기를 제공했을 뿐이다. 방아쇠를 당긴 건 당신이지.”
그 말 앞에서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상황은 늘 존재했지만, 선택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성찰은 시작된다.
삶은 결국, 내면에 공존하는 두 존재와 함께 걷는 여정이다.
빛을 품은 천사와 그림자 속의 악마.
그들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그러나 똑같이 ‘나’라는 얼굴을 하고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의 목소리에 더 자주 귀를 기울이느냐, 그리고 어떤 감정에 더 많은 시간을 내어주느냐의 문제다.
질투와 집착,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늘 악마의 옷을 입고 다가온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상처 입은 채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어린 나의 모습이 숨어 있다. 반면에 한 걸음 물러나 조용히 나를 바라보려는 의식은 천사의 언어로 속삭인다. 삶은 이 두 존재 사이에서의 작은 선택들이 층층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임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특히 허영심은 여성인 나에게 더욱 섬세하고도 위험한 얼굴로 다가왔다. 허영심은 때로 나를 빛나게 하는 장식이 되었지만, 때로는 그 장식이 너무 무거워 나의 자유의지를 가려버렸다. 그것은 단지 예쁜 포장처럼 보였지만, 실은 나를 조용히 가두는 덫이었다. 아름다움과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달콤한 향기를 품고 나를 유혹했지만, 결국 그 속삭임은 내 삶의 방향을 교묘히 틀어놓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감정을 잠시 내려놓자 삶은 놀랍도록 가벼워졌다. 깊은 숨이 트였고, 다시 나의 속도로 걸을 수 있었다. 허영심이 어떻게 내 감정의 바람을 틀어버리고 있었는지, 비로소 맑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조용히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누구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가?
내 안의 천사인가, 아니면 악마인가?
지금 내가 내리는 선택은 나를 자유롭게 하는가, 아니면 허영심의 그림자를 더 짙게 드리우는가?
내 안의 악마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아니면 고요한 마음의 천사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는가?
그 질문을 잃지 않는 한, 언제든 내 삶의 중심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허영심에 흔들리는 삶이 아니라, 진짜 ‘나’의 의지로 걸어가는 삶으로.
https://medium.com/@irenekim1b/in-front-of-the-mirror-named-vanity-99dd86cc29d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