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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옙히 Jun 02. 2021

[알바;썰] 알바몬, 은행원이 되다

사무보조와 여신상담 사이

금융권에 대한 로망이 있다면 부수길 바란다.


주변만 봐도 금융권으로 진로의 방향을 잡은 친구가 많다. 돈을 많이 벌어서, 보람을 느낄 수 있어서 등의 다양한 이유로 이 길을 희망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의외로 안정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누가 그랬듯 안정적인 곳의 다른 말은 '나도 안 잘리는데, 쟤도 안 잘린다'이다. 은행은 군대와 다를 바 없는 막힌 조직이었다.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방송기자가 꿈이었다. 그래서 신문을 굉장히 많이 읽었는데, 입대를 할 때까지도 경제면의 기사들은 도통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군대에 오지 않는 친구들에게 뒤쳐지는 기분을 느끼기 싫었고, 전역 후에 어떠한 경쟁력을 갖기 위해 입대 후 638일 동안 6개의 자격증을 땄다. 그중 가장 오랜 기간 공부한 것이 경제였다. 7개월이나 공부했다. 의무경찰로 복무하며 시위를 막고 철야를 하는 피곤한 상황 속에서도 미국 대사관 앞에 쪼그려 앉아 가로등 아래에서 공부를 했었다. 지금처럼 핸드폰이 있던 시기도 아니어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고 정말 책 하나를 수십 번 읽으며 스스로 이해했다. 그렇게 목표했던 점수를 얻었고 기특하다며 특박도 받았었다.


경제에 대한 이런 추억을 바탕으로, 언젠가 금융권 언저리에서 일을 해보고 싶었다. 학원 회계팀 아르바이트가 그래서 반가웠지만, 돈에 대해 일할 뿐 경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마침 집 바로 앞에 있던 은행에서 사무보조 아르바이트를 뽑기에 지원했고, 덜컥 뽑혔다. 처음부터 은행의 인상이 좋았다. 대외활동을 하면서 면접비를 받은 적은 있었지만,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고 돈을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출근 후에도 나름의 회사에서 근무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고, 그만큼 위계질서가 뚜렷했다. 책상 배치만 봐도 높으신 분들은 제일 뒤에서 창구를 바라보는 모양새였다. 이곳에서 내가 했던 일은 다음과 같다.


▲ 내가 앉았던 창구의 모습.


1. 사무보조

서류를 정리하고 전표를 스캔하고 구멍을 뚫어 책으로 만들고 창고에 날짜별로 구분해 정리한다. 몇 십억에 이르는 대출은 한 번에 돈을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절차를 거쳐 대출이 집행되기 때문에 몇 백장의 서류가 발생한다. 이를 철해 창고에 정리해놓는데, 다음 대출일이 되면 그 서류들을 다시 몽땅 찾아서 담당자에게 갖다 줘 야한다. 


2. 감정평가 팩스

'탁감'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던 업무다. 아침이 되면 전날 보냈던 감정평가 팩스의 답변을 듣는다. 감정평가사들이 큰 건을 맡기 위해 작은 건들을 무료로 감정해준다. 은행 직원 중 높은 분들이 대출 직전에 담보의 예상 가치가 전문가들의 눈에도 비슷하게 보이는지 확인하기 위해 최소 세 군데의 감정평가법인에 팩스로 담보의 내용을 보내 답을 듣는다. 아침에 맡기면 점심이나 오후, 빠르면 오전에도 답을 받을 수 있는데, 답이 돌아오면 어떤 법인에서 얼마의 가치로 예상했는지 정리해 업무를 시킨 담당자에게 서류로써 알려드렸다.


3. 여신상담

상담의 범위를 넓게 본다면 내가 했던 업무는 여신상담이 맞는 것 같다. 대출에 있어 어떤 서류를 준비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간단한 상품 소개 정도를 해줬다. 보통 다른 행원을 거치지 않고 나한테 바로 오시는 분들은 기존에 대출을 받았는데 추가로 대출을 받으러 오시는 분들이라 가져온 서류가 절차에 적합한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사실 나는 받는 대로 서류를 정리하는데, 이 과정에서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경우 내가 손님의 편을 들어 결제를 해주실 차장님이나 전무님에게 좋게 말해주면 의외로 대출이 진행되기도 했다. 그래서 손님들이 일개 아르바이트인 나에게 아주 친절했다.


4. 디자인 작업

어느 날 포토샵을 할 수 있냐고 기획팀 직원과 전무님이 물어보셨다. 그래서 단순하게 할 수 있다고 했더니, 각종 포스터, 현수막, 팸플릿 제작을 내가 하고 말았다. 전문 디자인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의 퀄리티는 나와야 한다며(?) 은행 본사의 홍보물 데이터베이스까지 개방해줬다. 인쇄소에서 종이를 고르는 것부터 색, 크기, 배달까지 모든 업무를 나 혼자 해야 했다. 난 미대 출신도 아닌데 해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내가 만든 홍보물이 집에 배송되었을 때 약간 설렜다.


5. 운전

은행에 차가 많았다. 본점은 어떤 동네에 있었고, 4~5개의 분점이 있었다. 이 분점을 돌며 물건을 전달하거나 받아서 이동시키는 일을 하기도 했다. 돈을 나르기도 했었다. 이 경우에는 다른 직원과 함께 2인 1조로 움직인다. 고객을 늘리기 위해 동네 성당의 헌금을 대신 통장에 넣어주는 일도 했었다. 그래서 성당을 돌며 돈들을 받아 은행으로 가져오기도 했다. 처음에 일할 때는 본점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분점으로 출근하라며 본점으로 출근해 차를 갖고 분점으로 이동하는 게 하루 업무의 시작이 되었다.


이 외에도 창고에 있는 뒤죽박죽 얽힌 자료들에 고유 코드를 붙여 위치를 도서관처럼 위치를 파악하는 시스템 구축에도 참여했다. 단순 사무보조로 아르바이트를 고용했는데 의외로 일을 잘하자 전무님께서 "대학을 중퇴하고 입사해라"하고 여러 번에 걸쳐 설득하셨다. 굉장한 제안이긴 했지만, 2학년을 마치고 휴학 중 인터라 중퇴라는 조건이 만족스럽지 않았고, 무엇보다 다른 직원들은 열심히 경쟁해서 입사했는데 공개적으로 그런 말을 들으니 너무나 은행이 부담스러워졌다. 


오래 살던 동네에서 좋은 경험을 하게 되었고, 지역 사회가 돌아가는 중심이 은행이라는 것을 굉장히 크게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은행의 업무를 직접 느끼면서 배운 점이 많아, 만약 금융권으로 확고하게 진로를 향하고자 한다면 해볼 만한 아르바이트다. 다만 은행은 굉장히 경직된 조직이라서 내부적으로 실망한 부분도 많을 것이다. 그 각오가 되었다면 지원하면 좋겠다.


■ 은행 아르바이트

장점 : 유급휴가, 주휴수당, 배우는 것이 많은 점, 알게 모르게 받는 다양한 복지

단점 : 은행은 문을 4시에 닫지만 정리하는데만 3시간 걸리는 전산처리, 단돈 1,000원을 입금하기 위해 소리를 지르고 우기는 다수의 손님, 경직된 조직, 회사 속에서 겪을 어려움들

시급 : 약 14,000원 (2018년. 시급은 10,000원이었으나 주휴수당이 포함되고 4대보험에 가입되어 실제로 수령한 급여를 일한 시간으로 나눈 금액이다. 월 급여는 180만원에서 200만원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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