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2학년 때 쯤 군대를 갔다 복학을 했다. 한창 복학 준비를 하고 있는데 서희 누나한테 연락이 왔다. 서연이 누나가 결혼을 한다는 것이었다. 상병 때 쯤 면회를 와서 서연이 누나가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알려준 것은 기억이 났는데, 세어봐도 누나가 그 남자를 만난지는 채 1년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 조금 성급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떤 남자를 만나든 내가 누나한테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누나는 내 가족이고 누나가 만날 사람이 나쁜 사람이 아니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누나가 만날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졌다. 어차피 누나가 상견례를 위해 세 달 후에 가족들이 다 모일 수 있는 일정을 잡아뒀기에, 그 때 가서 대충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상견례라는 게 원체 딱딱한 자리일테니 자연스러운 모습은 나오지 않겠지만, 나는 사람이 어차피 오래본다고 크게 달라질 것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굳이 따지자면 큰 누나랑은 제일 덜 친한 사이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기도 하고, 누나나 나나 워낙 조용한 성격이라 둘이 있으면 침묵이 흐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누나가 어떻게 사는지 대강은 알고 있었지만 세세한 정보는 몰랐는데, 결혼 소식에 이어 서희 누나가 알려주는 정보들은 그야말로 새로운 것들의 향연이었다. 서연이 누나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 중에 유일하게 성당에 다녔다. 서윤이 누나는 투쟁적인 무신론자이고, 교회든 성당이든 예수쟁이로 매도하는 우리 아버지 때문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나나 서희 누나, 엄마까지도 우리집은 종교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집안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서연이 누나가 중학생 때 쯤 성당에 다니는 것을 들켰을 때 아버지는 성당에 더 이상 못 나가게 하려고 막으셨지만, 누나는 대학교에 가자마자 다시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 다녔던 것은 알았지만 성인이 된 후에 다시 성당에 나가고 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일이었다.
그래도 대충 누나가 성당에 나갔던 이유는 짐작이 간다. 누나는 우리 중에 나이가 가장 많고, 우리 세대 누구든지 우리 아버지가 집안에서 하는 행동들이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라는 점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누나라고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내가 태어난 후로 서윤이 누나처럼 누나가 아버지에게 적극적으로 대드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잘못된 것임을 아는 사람이 단 한 번도 그것에 대들지 않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고, 심지어 서희 누나도 한 번 정도는 대든 적이 있었다. 그 후에 굴종을 했지만, 아무튼 단 한 번도 대들지 않는 것은 인간인 이상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누나가 그러는 것은 정말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크게 두 가지의 추측을 했다. 내가 기억 못할 정도로 어릴 때 그 사건이 있었거나, 아니면 누나가 정말 태생적으로 수동적인 사람이라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겸허히 받아 들였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했다. 어느 쪽이든 문제 의식은 남아 있기에, 누나는 정신적인 해법을 택한 대가로 현실과의 괴리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한 의존 대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게 성당, 다시 말해 종교일 것이라 추측했다.
누나에 대해서 말할 게 그 외에 또 뭐가 있을까... 그래, 서연이 누나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내가 본 사람 중에서도 가장 '평범한' 사람인 것 같다. 누나는 성격적으로 강력한 상승욕구를 지니지도 않았고, 따로 본인이 좋아하는 일이 있어 그것을 꼭 해야한다는 신념이 있는 사람도 아니다. 공부도 평범하게 했고, 취미도 나처럼 그림을 그리는 독특한 것보다는 TV를 보거나, 쇼핑을 하는 등 남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대학교도 점수를 맞춰서 간호학과에 갔는데, 아무리 봐도 예전부터 누나가 간호사가 되고 싶었기에 된 것 같지는 않다. 적당히 현실적이고, 적당히 어른스럽고, 어느 집단에 데려다 놓아도 무난하게 지내고, 크게 싫어하는 사람이 없는 완벽한 평범함, 그게 우리 큰 누나다. 스스로 감추는 부분도 있고, 그래서 나는 누나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살고 싶은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런데 누나가 유일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얘기했던 것이 하나 있다. 누나는 우리끼리 있을 때도 입버릇처럼 자기는 나중에 '행복한 가정'을 꾸릴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우리집은 행복하지 않은 가정이 되는 것인가 싶긴 하지만 일정 부분 사실이니까 아무도 그 부분에는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는 그 행복한 가정의 의미가 무엇인줄 안다. 누나가 말하는 행복한 가정은 바로 우리 집의 대척점일 것이 확실했다. 내게는 그 말이 진정한 행복을 논하는 것보단 지금 우리 집처럼 불행하지는 않으면 좋겠다는 얘기로 들렸다. 그런 점에서 큰 누나는 서윤이 누나처럼 우리 집이 문제가 있다는 것에는 똑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인간은 본인에게 결여된 것을 추구한다고 하던가? 허나 큰 누나의 현 상황에 대한 투쟁심은 서윤이 누나처럼 적극적인 방식이 아니라 큰 누나의 성격을 따라 이후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윽고 상견례 날이 되었다. 누나가 데려온 남자는 안경을 쓰고 단정한 상고 머리를 했고, 키는 누나보다는 미세하게 크지만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보였다. 피부는 약간 까무잡잡했고, 살집이 거의 없는 마른 몸매였다. 그리고 직장으로는 꽤 유명한 시장형 공기업에 다니고 있었고, 아버지는 그 부분을 특히 흡족해하셨다. 아버지의 반응을 보고 시부모가 될 상대방의 부모들은 자기 자식 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누나의 예비 장인이 말했다.
"우리 한영이가 내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신랑감으로는 너무 훌륭해서 아까울 정도입니다. 사돈, 복 받으신 거예요."
아버지가 대답했다.
"그럼요. 우리 서연이가 조금 어리숙한 구석이 있어서, 앞으로 서연이를 좀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사실 서연이가 누굴 데려올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너무 기대 이상이라 놀랐습니다. 올해 들어 가장 기쁜 순간 중 하나인 것 같네요. 허허"
엄마가 끼어들었다.
"그래도 우리 서연이가 똑똑한 앱니다. 자기가 간호사가 되고 싶어서 성적을 손해보고 대학에 들어가서 그렇지, 원래는 훨씬 좋은 학교에 갈 수 있었던 애예요. 그리고, 손재주도 좋아요. 우리 집 애들이 다 나를 닮아서 손재주가 좋거든요. 우리 아들도 A대 산업디자인학과에 다니는데..."
엄마의 말 중에는 거짓말도 있었지만, 나도 우리 누나를 깎아내리고 예비 매형을 치켜세우는 광경이 아니꼬왔기 때문에 그 때 만큼은 엄마의 허세 섞인 주접이 보기 싫지 않았다. 누가 감히 남의 집 귀한 자식한테 저런 식으로 말을 할 수 있는지... 하지만 아버지는 바로 엄마의 말을 끊으며,
"이 사람이 무슨, 누가 봐도 우리 한영군이 훨씬 잘났구만. 사위가 잘났으면 칭찬을 하면 되는 거야. 이 사람아. 서연이도 자기 남편될 사람 칭찬하는데 좋지, 안 좋겠어?"
그 말을 들은 엄마는 입이 삐죽 나왔다. 서연이 누나가 입을 뗐다.
"당연히 우리 오빠가 저보다야 훨씬 낫죠. 저는 오빠가 어른스럽고 힘들 때도 제가 항상 믿을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주는 사람이라 좋아요. 오빠는 제가 본 사람 중에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거든요."
누나 본인 마저 저러는 게 나는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서윤이 누나가 이 자리에 안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누나의 예비 장모가 말했다.
"아이는 몇 명이나 낳을 거니? 저번에 한영이한테 물어보니 둘 정도 생각하고 있다고는 들었는데."
누나가 대답했다.
"네, 들으신대로 저희끼리는 이미 어느 정도 얘기가 된 내용이라서요. 두 명 정도 낳을 생각이에요."
"둘이면 딱 좋구나. 그런데, 서연이 너는 일을 계속 할 거니? 애가 둘이면 손이 많이 갈 텐데 말이야."
그 남자가 대신 대답을 했다.
"저는 서연이가 굳이 일을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제가 벌면 되니까요. 서연아, 집에서 쉬어도 돼. 내가 예전에도 말했었지?"
저 사람은 대체 왜 남의 대답을 대신하는 것인지 의아했다. 그리고 쉬긴 뭘 쉰다는 것인지? 설령 그만두더라도 애를 키우기 위해서 부부끼리 합의해서 한 명이 전략적으로 선택을 한 것인데, 육아가 휴가라도 된다는 것인가? 내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누나가 대답했다.
"알겠어. 오빠. 저도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한테 집중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요. 때 되면 제가 결정을 내릴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부부가 될 사람들이 부모의 의중을 크게 거스르는 것이 없으니 상견례 자리는 무탈하게 지나갔다. 매형과 양가 부모를 배웅하고, 모인 김에 서희 누나의 제안으로 우리는 남매끼리만 근처 카페에 가서 대화를 나누었다.
"누나, 진짜 일 그만 둘 거야? 누나가 돈을 더 적게 벌 거 같지는 않은데, 애를 키우려면 시간도 들어가지만 돈도 많이 들잖아. 더 소득이 높은 사람이 그만 두는 게 맞는 거야?"
"나 간호사 국시 준비할 때 오빠가 많이 도와줬어. 난 너희들처럼 머리가 좋지 않잖아. 오빠가 없었으면 어차피 못 붙었을 걸? 그리고 오빠 닮은 아이를 낳으면 정말 행복할 거 같아. 그 애들한테 집중하는 게 돈 이상으로 나한테 주는 게 많을 것 같아."
"언니가 머리가 안 좋긴 뭐가 안 좋아. 스스로를 너무 낮추지는 마. 언니, 창수말처럼 일 그만두는 건 다시 생각을 한 번 해봐. 경제력이 없으면 사람이 얼마나 비참해지는지 우리는 알고 있잖아. 엄마가 예전에 했던 말 기억 안 나?"
"우리 집이랑은 달라. 오빠는 진짜로 믿을 만한 사람이야. 행동 하나하나 배려가 있고, 그 어떤 것도 강요가 없어. 진짜 나쁜 사람이었으면 그 성질을 못 감춰서 진작에 안 좋은 점이 드러났을 거야. 그리고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도 다 나한테 좋은 사람 만났다고 하던 걸."
확실히 종교인들은 보통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끼리 결혼하니, 누나가 결혼하는 것이 인생의 큰 목표라면 그 테두리 안에서 찾는 게 맞긴 했을 것이다. 다만, 같은 집단 안에서의 칭찬은 항상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나는 이미 그 나이에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에 걱정이 되었다.
"서윤이 누나는 오늘 왜 안 왔어? 누나 결혼하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
"아니, 말은 해줬어. 그런데 서윤이가 이번 주에 해외출장을 간다고 하기도 했고, 사실 결혼식에도 내가 굳이 안 와도 된다고 말했어. 너도 알다시피 서윤이랑 아빠랑 같은 자리에 있을 수가 없잖아. 서윤이가 나중에 따로 자기는 축하해주겠다고 했어."
이제는 내가 이러쿵저러쿵 말할 단계는 지난 것 같았다. 솔직히 애초에 내가 관여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누나의 행복을 비는 수밖에는 없었다.
"둘째 누나 만날 때 나도 불러줘. 맛있는 것 좀 얻어 먹게, 헤헤. 그리고 누나 결혼하는 것도 서희 누나보다 늦게 알았는데 나도 이제 낄 수 있을 때마다 전부 껴서 누나 최대한 축하해줘야지. 미리 결혼 축하해, 누나."
"언니 나도 축하해. 아무튼 언니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한 거야. 언니는 내 또 다른 엄마 같은 사람이야. 결혼해도 자주 놀러가도 되지?"
"그래, 고마워. 얼마든지 놀러와도 되지. 결혼 좀 한다고 내가 아무렴 너희랑 멀어지겠어? 너희도 내 소중한 가족 중 일부분이야. 걱정하지마."
누나는 그 남자와 얼마 안 가 예정대로 결혼했다. 1년 쯤 지나고 첫 애를 낳았고, 2년 터울로 둘째를 낳았다. 일은 이미 첫째를 낳았을 때 그만두었다. 애를 키우는 것은 누나의 몫이었다. 매형은 지방으로 순환근무를 하는 탓에 근무지가 일정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누나는 매번 이사를 다녀야했고, 나와 나머지 누나들과는 갈수록 만나기 힘들어졌다. 더 큰 문제는 시가였다. 시가는 누나가 일을 그만두자 시댁 행사나 아이 관련된 일에 누나를 당연한 듯이 끌어다 썼다. 일을 하지 않아 자유로운 누나는 역설적으로 자유롭기에 가장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되었다. 명절에도 누나는 오지 않거나, 잠깐 들렀다가는 수준으로 갈수록 누나의 삶에서 시가와 아이가 차지하는 비중은 커져갔다. 정확한 내막은 모르지만 누나는 철저하게 그 집안에 종속되어 가는 것 같았다. 누나는 가끔 서희 누나나 엄마에게 전화해서 하소연을 했고, 나는 그럴 때 마다 그 둘의 입을 통해 서연이 누나의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확실한 것은 누나의 삶은 경제력을 상실한 후 그 자구력을 잃고 끊임 없이 심연으로 추락해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박서연이라는 인간은 복잡한 유기체에서 '엄마', '며느리', '아내'라는 성별에 기반한 세 가지 정체성으로 정의되는 단순한 생물이 되었다.
나중에 내가 지혜랑 결혼을 고민할 때, 나는 상담이나 한 번 받아보고자 당시 누나가 살고 있었던 경주로 내려갔다. 누나는 애들 때문에 못 나오니, 내가 누나 집으로 찾아갔다. 누나는 오랜만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 기뻐보였다.
"많이 컸네. 애들은 좀 키울만 해? 지쳐보인다."
"이제 좀만 더 크면 유치원도 보내고 숨통이 트일 것 같아.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응, 근데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누나 얘기부터 들어보자. 매형은 보통 몇 시에 들어와? 여기는 누나든 매형이든 연고지도 아니라 시부모님도 근처에 안 계시잖아."
"요즘 본사로 와서 일이 바빠서 은근히 야근이 많더라고, 빨라도 8시 정도에 퇴근하는 거 같아."
"뭐? 그럼 누나는 대체 하루에 몇 시간 동안 혼자 있는 거야? 괜찮은 거야?"
"괜찮아. 이제는 익숙해져서 문제 없어. 그리고 오빠가 퇴근하고 나면 많이 도와줘서 그렇게 힘들지는 않아."
도와주긴 뭘 도와준다는 건지... 매형한테도 남의 일이 아닌데 누나 일을 도와준다는 것처럼 말하는 게 신경쓰였다. 내가 예민한 것일 수 있지만, 애를 같이 낳은 것이지 혼자 낳은 건 아닌데 말이다. 그래도 돈을 벌어오는 쪽도 당연히 나름의 고충이 있을 테니 누나도 다 감안해서 하는 얘기이길 바랐다. 누나가 이어서 말했다.
"창수야, 잠깐만 권이 좀 안고 있을래? 누나가 좀 할 게 있어서."
"어어. 근데 할 게 뭔데? 내가 도와줄까?"
"아니야, 아직 경주 내려온지 얼마 안 되어서 말이야. 어머니가 황남빵 좀 보내달라고 하셔서 인터넷으로 주문 좀 하려고."
"엄마가? 그런 건 그냥 전화로 직접 해도 되지 않나? 요즘 제주도에서도 다 택배로 받을 수 있는데."
"아니, 시어머니 말이야. 이런 거 잘 못하셔. 그리고 내가 직접 보내준 게 더 맛있다고 하시더라고."
예전에 나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했던 카페에서는 업무가 보통 계산하는 사람과 음료를 제조하는 사람, 청소하는 사람으로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는데, 모두 힘 쓰는 일이 약간 씩 필요했기에 유일한 남자 아르바이트생인 나는 사장이 어느 곳에 배치를 해도 다른 쪽이 아쉬워진다며 '지원'이라는 일을 맡겼다. 문제는 그 '지원'이라는 직책은 사실상 잡부에 가까웠다. 확실한 내 일이 정해져 있지 않으니 어디에든 불려가서 갑작스레 일을 했고, 숨 돌릴 틈이 없었다. 다른 아르바이트생들이 언제 부를지 몰라 항상 5분 대기조처럼 기다리는 긴장 상태의 연속이었고, 커피를 만들어 보고 싶어서 시작한 아르바이트는 지금도 그렇게 내게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누나의 지금 모습이 딱 그 때의 내 모습이랑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알다시피 아이를 키우는데는 부모의 엄청난 노동이 그 대가로 따른다. 그 노동 강도는 기업에서의 업무와 비교해도 전혀 떨어질 것이 없다. 다만 본인의 선택이기에 그것을 감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출산과 육아는 국가의 유지를 위해 기여한다는 국익을 위한 성격을 띄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집에서 육아를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가정과 사회로부터의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누나에게는 그러한 지원이 철저하게 결여되어 보였고, 오히려 카페에서의 나처럼 고립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국가에게도 가족에게도 버림 받은 것이 지금의 누나였다. 내가 그 때 생각한 것을 누나가 과연 모르고 있었을까? 아니다. 이미 되돌아 가기엔 늦었고, 이런 생각은 누나의 정신을 더 힘들게 만들 뿐이었을 것이다. 호랑이 등에 탄 누나는 좋든 싫든 이제 혼자서 헤쳐나가야 했을 것이다. 나는 혹시 결혼을 하게 되더라도 이 날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심했다. 나는 다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회의 지원까지는 내가 맞춰줄 수 없는 부분이다. 누나에겐 미안하지만 내 아내, 혹은 내 자신이 누나처럼 되는 것은 볼 수 없었다. 혹시 아이가 태어난다면 당연히 사랑하겠지만 내 자신보다 사랑할 자신이 있는지는 당장 확신이 없었고, 설령 그렇더라도 나는 누나와 달리 저렇게 되면 애꿎은 아이를 원망할 것만 같았다.
매형이 오기 전까지 최대한 아이를 함께 보다가 신경주역에서 막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결혼에 대한 상담은 거의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매형은 나를 역에 데려다 주며 자기 커리어에 대한 얘기를 하고 내 전공 분야에 대한 전망을 자기가 아는대로 멋대로 떠들었다. 도착해서 내리기 직전에는 오늘 고생했고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당신이 감사해야 할 사람은 기껏해야 하루 좀 도와준 내가 아니라 당신의 아내일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올라가는 기차에서 창밖을 보며 깨달았다. 서윤이 누나와 시작점이 같았던 큰 누나의 행복한 가정에 대한 맹목적 추앙은 결국, 매형이라는 가짜 메시아에 대한 의존으로 나타났으며 우리 집안의 불화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누나는 모습만 약간 다를뿐인 또 하나의 우리 집을 경주에 만들고 말았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