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서른 살, 두 아이를 둔 쌍둥이 아빠다.
대기업에서 10년간 열심히 일하다가 오늘부로 1년간의 육아휴직을 시작한다. 회사 생활에 익숙해진 나에게, 이 육아휴직은 마치 처음 경험하는 낯선 쉼표와 같다. 이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해, 나는 글을 써보기로 했다.
그 시작은 10년 전, 나의 첫 회사 생활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등학교 졸업 후, 2014년 3월 3일.
그날은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다. 교복밖에 없던 우리를 위해 인턴 기간에 맞춰준 고가의 갤럭시 정장을 입고출근 전 나는 거울 속 낯선 자신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어색한 정장 차림에, 회사 생활을 위해 꼭 필요하다며 엄마가 챙겨준 하얀 손수건을 가슴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섰다.
그 손수건은 마치 나를 위한 일종의 부적 같았다. 나는 회사 건물 앞에 서서, 언젠가는 이 회사의 사장이 되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곧 알게 되었다. 회사 생활이란 이상과는 다른 현실이었다.
20살부터 2년 동안 나는 오전에는 사내 대학 강의를 듣고, 오후에는 사무실로 복귀해 일을 했다. 그 당시의 조직 문화는 지금으로선 상상도 못 할 그런 정말 tv에서 농담 식으로 "라떼는 말이야~" 하면서 부장님들이 말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미투 운동이 막 활발해지기 시작했던 때라, 회사 안팎에서 변화의 바람이 불었지만 여전히 막내는 모든 것을 감내해야 했다. 가장 먼저 출근해 사무실 불을 켜고, 가장 늦게 퇴근해 불을 꺼야 했다. 주중 회식은 기본 4~5번, 많을 때는 주말까지 겹쳐서 회식을 뛰어다녔다. 하루에 두 탕을 뛴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2년을 버티며, 지금 돌이켜보면 왜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지 이해할 수 없는 날들이 있었다. 인격 모독을 당하면서도 퇴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까지 무모하게 일을 한 이유를 생각해 보면, 답은 명확했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나는, 아직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사회에 던져진 상태였다. 그런 나에게 회사는 모든 것이었고, 첫 번째 상사는 알에서 깨어나 처음 마주친 어미 새와 같은 존재였다. 그들의 말이 곧 진리였고, 나는 의심 없이 따랐다. 그 모든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다.
정신없이 2년이 흐른 후, 나는 사내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가야 했다. 입사 동기들과 함께 회사에서 정해준 일정에 맞춰 군 입대를 했다. 우리들은 '특기'가 없었다. 대학 전공도 없었던 우리에게 남은 것은 다양한 사회 경험이었지만, 그것이 직업적 특기가 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은 없어진 102보충대를 거쳐 2사단 신병교육대로 배정되었고, 3포병여단에서 K9 자주포 조종수 겸 포수로 군생활을 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군생활은 나에게 오히려 쉬운 시간이었다. 대기업이라는 무한 경쟁의 압박 속에서 2년을 보낸 후, 군대에서의 생활은 상대적으로 평화롭고 단순했다. 훈련소에서 조교가 “군대 2 회차냐”는 농담을 할 정도로 나는 여유롭게 군생활을 했다. 선임들에게도 사랑을 받으며 즐겁게 2년을 보냈다. 그렇게 전역을 하고, 일주일 만에 빡빡머리 상태로 다시 회사로 복귀했다. 내 의지라기보다는 회사의 요구였다.
복직 후, 나는 같은 시기에 입사한 대졸 공채들이 이미 승진을 했거나 승진을 앞두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동기는 아니었지만, 함께 어려운 시기를 겪으며 정이 든 이들도 있었다. 회사에서의 직급 체계와 내 위치는 그때부터 더 명확히 다가왔다.
그리고 지금, 10년이 지나 두 아이의 아빠가 된 나는 이 과거를 되새기며 새로운 장을 열려고 한다. 글을 쓰는 이 순간, 나는 더 이상 그때의 내가 아니다. 그러나 그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내일은 육아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오늘은 여기서 글을 마친다. 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지금 이 쉼의 순간에 서로 얽혀 있다.
다음 이야기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