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안 써진다는 건 글에 맥락이 없다는 뜻일까

끝장을 봐야 하는 여인네의 끝장나는 하루 일기

by 교양있는 개구리

'사람 인'은 서로가

기대어 선 모양이라지만

힘이 들면 기댈 곳이 먼저

생각나기 마련이지만,

하루를 살아도 힘든 일은 너무 많다

그때마다 당신 한 켠을 바란다면

나조차도 버거운 나를 그대가

더 버거워하지 않을까

그래서 가장 힘든 날

나를 버려두고 가지 않을까

그 괴로운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며

오늘도 꼭꼭 씹는다

혼자 숨을 틔운 날처럼,

세상에 혼자인 밤을


남아 있는 잉크펜을 보고 앞으로는 두 장씩 일기를 적어야 하나 싶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이번에 뜯은 잉크펜을 다 쓰고 싶기 때문이다. 난 끝을 볼 때 느껴지는 희열을 즐긴다. 볼펜보다 더 직관적으로 잉크 줄어드는 게 잘 보이는 잉크펜 촉이 투명해질 때, 쭉쭉 눌러쓰고도 부족해 반으로 갈라 치약을 사용할 때, 같은 맥락으로 화장품 케이스를 분해해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 내는 나의 집념. 이는 단순한 절약정신을 넘어선다. 하루빨리 끝을 보고 싶어 치약도 한가득, 크림도 한가득 듬뿍듬뿍 사용하기 때문이다. 하루라도 빨리 끝을 보고 싶다. 이렇게 성격이 급한 사람이다 나는. 그런데 웬걸, 아주 오랜만에 썸남이 생겨버렸다. 그것도 아주 잘생긴. 사안이 사안인만큼 이를 장기 프로젝트로 진행하기로 마음먹었고, 최소 한 달은 썸을 진행해 보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갤럽의 강점진단 결과, 나의 두 번째 강점은 '행동'이다. 하고 싶은 게 생기면 바로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썸을 타려면 두 수 정도는 내다볼 줄 알아야 하고, 밀당도 해야 하고 피곤하다. 그래서 찾은 방법이 바로 글쓰기다. 혼자 글을 쓰다 보면 부릉부릉 거렸던 엔진이 차가워진다. 빨리 새카맣게 채워지길 바라는 다이어리와 빨리 닳아버리길 바라는 잉크펜을 가지고 주절주절 썸남에게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적어 내려가다 보면 다시 그의 속도를 배려할 수 있게 된다. (P.S. 챗GPT에 그의 사주와 천궁도를 돌려 본 결과, 그는 너무 무겁지 않게 천천히 다가가는 걸 선호하는 사람이다. 완전 나랑 반대. 나는 '아이는 몇 명 낳을까요?'같은 대화 주제를 좋아하고, 아주 거칠게 다가간다.) 관계는 둘이 만들어 가는 것이니 내 마음대로만 행동할 수 없다. 급한 성격이 나만의 기질인 것처럼, 상대방 또한 그만의 색이 있을 것이고, 우리 관계의 역동성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이 쉬운 사실(이지만 실천은 어려운) 하나를 실천 못해서 탈이 났던 게 아닌가.

20대 초중반의 나를 생각하면 웃음밖에 안 나온다. 불완전함에 허덕이며 불안해하던 나, 나를 붙잡아줄 지렛대 같은 남성을 찾아 헤매던 순간들. 이런 글을 적어 내려가다 몇 년 전 끄적인 위의 시가 떠올랐다. 저리도 나약했던 내가 이제는 관계의 속도도 조절할 줄 알고, 배려도 할 줄 안다. 십 년은 강산을 바뀌게 하고, 이불킥이란 단어가 딱 어울리는 부끄러운 순간들은 나를 깎아내고 연단했다.

29살이 코앞이다. 아홉수라느니, 서른이 코 앞이라느니 다 산 것 같이 말하는 것은 지양하고 싶다. 그저 이렇게 말하리라. 목적이야 어찌 됐든(잉크펜 빨리 쓰기냐, 일기 쓰기냐) 노트에 글을 적고, 이를 브런치에 옮겨 적는 내가 자랑스럽다. 28살은 정말이지 내 삶에 한 획을 그을 만했던 것 같은데 더 나아진 모습으로 맞이할 29살은 더 기대가 된다. 나이 듦이 기대된다. 날마다 더 나아지는 내가 기대된다. 더 이상 기댈 곳이 아닌 단단한 뿌리를 키우는 내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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