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껴안은 서사, 구원이 된 연대
영화 <썬더볼츠>는 우리가 알고 있는 마블 영화의 껍질을 두르고 있지만, 그 속은 전혀 다른 온도로 숨 쉬고 있는 작품입니다. 거대한 빌런도, 화려한 영웅담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그런 것들이 사라지고 난 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리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에게 다가가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이들은 모두 무언가를 상실한 경험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가족을, 누군가는 명예를, 누군가는 자기 자신을. 그리고 그 상실은 각자의 내면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결핍을 남깁니다. 영화는 그 결핍을 덮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관객들로 하여금 그 결핍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게 합니다.
어쩌면 『썬더볼츠』는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삶에 확신이 없는 사람들, 과거의 실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기 안의 공허와 트라우마를 어떻게든 외면하고 버텨온 사람들. 영화는 그들이 다시 어딘가에 속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는 인물들이 상처를 모두 극복했기 때문에 성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상처를 있는 그대로 마주했기 때문에, 불완전한 자신을 숨기지 않고, 과거의 실패와 흔들림을 외면하지 않은 채, 자신과 서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서로에게 다가섰기 때문에 치유하고 성장할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훌륭합니다.
<썬더볼츠>는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서로를 향해 손을 뻗고, 말하고, 부딪히고, 껴안으려는 그 몸짓들이 얼마나 큰 용기이며 위로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이 공허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가장 바라고 있었던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영화는 옐레나의 독백으로 시작됩니다. 언니의 죽음 이후, 그녀는 세계를 떠돌며 끝없는 임무에 자신을 던지지만, 마음속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공허는 옐레나만의 것이 아닙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 존 워커, 고스트, 레드 가디언, 버키 반스까지 모두 비슷한 감정을 품고 있습니다. 하나의 팀이라기보다는, 어쩌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이들이 도착한 마지막 방처럼 보입니다.
이들이 마주한 인물은 '밥'입니다. 한때 실험의 결과였고, 이제는 통제할 수 없는 힘의 소유자가 된 존재. 그는 강력하지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른 채 방황합니다.
발렌티나는 그를 무기로 활용하려 하지만, 이 팀은 밥 안에 있는 인간적인 흔들림을 외면하지 못합니다. 영화는 전투 장면보다, 이 인물들이 서로의 아픔을 어떻게 마주하고 견디는지를 길게 비춥니다.
격렬한 액션보다도, 서로를 바라보며 나란히 앉아 있는 장면, 그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는 장면이 더 오래 남습니다. 결국 이들은 힘을 모아 폭주하는 센트리를 저지하고자 합니다.
『썬더볼츠』는 우리가 상실 이후에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영화입니다. 이들이 겪은 상실은 사랑하는 사람이나 과거의 영광을 잃은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게 된 사람들입니다.
명확한 목표도, 방향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지만, 그 안에 깊은 허기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허 속에서, 그들은 스스로 끊임없이이, 무엇으로 하루를 버텨야 하는지를 묻게 됩니다.
영화는 그 질문에 뚜렷한 답을 내리지 않습니다. 대신, 답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따라갑니다. 이들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감정을 말로 꺼내는 것도 서툴고, 때로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불완전함 속에서도 서로를 이해하려는 작은 시도가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그저 불편함을 견디는 일이지만, 서서히 마음을 여는 몸짓이 되고, 결국은 관계를 회복하려는 용기로 변합니다.
이 변화는 누군가의 지시나 정답 같은 말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센트리에게 무너진 옐레나가 감정적으로 폭발한 이후, 조용히 다가온 레드 가디언의 말 한마디에 마음을 여는 순간처럼, 변화는 감정의 마찰 끝에서 시작됩니다.
이들은 누구도 완전히 변하지 않지만, 그 변화는 아주 작고 분명하게 존재합니다. 바로 그런 진심 어린 반응과 움직임이,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타인에게 다시 마음을 열며, 삶을 다시 견디려는 회복의 시작이 됩니다.
그 변화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감정입니다. 인생에서 어느 순간 이유를 모르겠는 공허가 찾아올 때, 우리는 명확한 해결책보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더 깊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썬더볼츠』는 바로 그런 마음의 작고 진실된 떨림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따라갑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무언가를 '해결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직 그 상태로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체념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며 찾고 있는 진짜 위로에 가까운 태도일지도 모릅니다.
목적 없이 살아가는 날들에도, 우리 곁에 누군가 있어줄 수 있다는 사실. 『썬더볼츠』는 우리가 완전히 괜찮지 않아도, 서로에게 기대고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가능성은 공허한 삶을 단번에 바꾸는 힘은 없지만, 무너지는 하루로 고통받는 누군가에게 아주 작지만 분명한 숨 쉴 틈이 되어줄 수는 있습니다.
전형적인 마블 영화에서라면, 갈등은 늘 외부에서 옵니다. 적이 있고, 위협이 있고, 그에 맞서 싸우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썬더볼츠』는 그런 전개를 의도적으로 피합니다.
이 영화에서 진짜 적은 어디까지나 내부에 있습니다. 누군가의 공격이 아닌,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 만드는 기억, 죄책감, 공허함, 그리고 자신이 사라져도 괜찮을 거라는 무력한 마음이 인물들을 서서히 무너뜨립니다.
특히 밥, 센트리라는 인물의 변화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극적으로 응축합니다. 그는 기억을 잃고 공허 속에 방치된 그는 점점 자신을 잃어갑니다. 무너진 자아는 점점 스스로를 해체시키고, 결국 그는 공허 그 자체가 되어버립니다.
그 순간, 영화는 마침내 시각적으로 이들의 싸움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거대한 폭력이나 절대악이 아니라, 말로 설명되지 않는 텅 빈 감정, 누구도 손 내밀지 않은 기억의 잔해와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공허가 된 밥은 자신을 구하러 온 친구들을 위해 공허를 힘으로 없애려 합니다. 하지만 그가 공허를 때릴수록, 그의 몸은 점점 공허로 물들어갑니다. 이 장면은 공허라는 감정은 억누르고 억지로 밀어내려 하면 할수록 우리 안으로 더 깊이 침투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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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밥이 공허에게 잠식되지 않도록 막은 건 억압이 아니라 포옹이었습니다. 썬더볼츠 멤버들이 무너진 그를 향해 달려가 끌어안는 순간, 공허는 힘을 잃고 사라집니다.
그들을 가두고 있던 어두운 공간도 서서히 무너져 내립니다. 내 안에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꺼내고, 함께 존재하고, 붙잡아주는 것. 그것이 공허를 이기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것을 영화는 이 장면을 통해 보여줍니다
『썬더볼츠』는 히어로와 빌런의 대결이라는 익숙한 서사 구조를 빌려,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해냅니다. 공허와 트라우마라는 추상적이고도 개인적인 감정을, 영웅 서사의 언어로 풀어낸 이 영화는 정서적 회복의 서사를 마블 세계관 안에 절묘하게 담아냅니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싸워야 할 진짜 대상은 타인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자라나는 무력감과 자기 혐오이며, 그 감정은 억압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꺼내고 나눌 때 비로소 작게나마 희미해집니다.
이 영화는 그러한 감정의 흐름을 영웅 서사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히어로 장르가 감정적 치유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히어로가 세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은 이들이 서로를 구하는 이야기.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어벤저스가 세상을 구하는 것보다 훨씬 느리고 어렵지만, 어쩌면 지금 현대사회에서 공허라는 감정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필요했던 위로였는지도 모릅니다.
최근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복잡해진 멀티버스 구조, 힘만 강할 뿐 정서적으로 비어 있는 캐릭터들, 그리고 서사 없이 쏟아지는 설정 중심의 이야기들까지. 관객들은 점차 마블 영화에서 길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그 속에서 『썬더볼츠』는 마블이 한때 가졌던 서사의 강점을 다시 꺼내보려는 시도로 읽힙니다. 이 영화는 겉으로는 또 하나의 팀업 무비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결핍과 상처를 가진 인물들이 서로를 통해 회복해가는 이야기가 섬세하게 놓여 있습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어벤져스』 초기 작품들처럼, 마블이 과거에 강점을 보였던 건 강한 능력치가 아니라 각기 다른 배경과 결함을 지닌 인물들이 서로를 이해해가는 감정의 서사였습니다.
『썬더볼츠』는 바로 그 감정을 다시 꺼내 듭니다. 옐레나, 워커, 고스트, 레드 가디언, 밥. 이들은 모두 한 번쯤 실패했고, 한 번쯤 버림받았으며, 자기 안의 공허를 감추려 했던 인물들입니다.
그들이 조금씩 마음을 열고, 때로는 어설프게 부딪히고, 최후에는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과정의 감정선은 최근 마블 영화에서는 분명 보기 힘들었습니다. 이 감정선은 과거 마블이 가장 잘해냈던 감정 중심 서사의 복원처럼 느껴집니다.
특히 센트리가 공허에 잠식되어가던 순간, 그를 쓰러뜨리는 대신 껴안는 방식을 선택했다는 점은 유독 인상 깊었습니다. 강력한 존재를 제압하는 대신, 상처를 가진 하나의 사람으로 마주하고, 감정을 흘러가게 두었다는 점.
이 장면은 마블이 빌런을 물리치는 기존 방식을 고려할 때 이례적이면서도 깊은 울림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은 마블 서사가 오랫동안 놓쳐왔던 감정의 밀도를 되찾는 장면처럼 느껴집니다.
『썬더볼츠』는 마블이 여전히 감정과 이야기를 회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최근 마블이 빠져 있었던 스펙터클 위주의 서사, 설정 과잉의 구조, 감정 없이 반복되는 전투 장면들과는 거리를 둡니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기억하던 마블의 감동은 언제나 '힘'보다 '사람'에 있었습니다. 『썬더볼츠』는 그 사람들의 서사를 다시 중심으로 불러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마블의 황금기, 즉 인물들이 서로를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던 그 시대의 감정선을 이 작품은 다시 꺼내듭니다.
과거의 실수와 상처를 끌어안고도 다시 걸어보려는 이들, 그들이 서로를 구하려 애쓰기보다 곁에 머무는 일 자체를 선택하는 이야기는, 지금의 마블에게 잃어버린 언어였고, 지금의 우리에게는 더없이 필요한 위로처럼 느껴집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공허와 외로움 같은 감정들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그 감정들이 너무 무겁고 복잡해서, 스스로도 왜 그런지 설명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말없이 마음 한구석을 움켜쥐고 살아가는 날들이 반복되기도 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무너지기 직전인 순간들이 있죠.
누구나 마음속 깊은 곳에는 말로 꺼내기 어려운 트라우마 하나쯤은 품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작든 크든, 오래된 일이든 최근의 일이든, 우리를 계속 흔들고 있는 감정들 말입니다.
그런 감정들은 결코 지워야 할 것도, 없애야 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의 나를 이루는 조용한 조각들이고, 때로는 나를 더 따뜻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준 시간들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그런 감정을 받아들이고 살아간다는 건, 완벽한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불완전한 나를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품겠다는 태도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썬더볼츠』는 그런 감정을 향해 다가가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악당을 무찌르고, 세상을 구하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이야기입니다.
무너진 사람들, 흔들리는 마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상처를 지닌 이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이해하려 하고, 마지막에는 서로를 안아주며 곁에 남아주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짜 바라고 있었던 히어로의 모습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인사이드 아웃』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감정이라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세심하게 다뤘던 그 영화처럼, 『썬더볼츠』도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속 가장 약한 부분을 꺼내 보여줍니다.
슬픔도, 외로움도, 공허함도 사라져야 할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감정들이라는 걸 들려줍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완전히 없애는 게 아니라, 누군가와 나누는 순간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다는 걸 이 영화는 보여줍니다.
결국 이 영화는 히어로가 되는 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상처를 지닌 채로도 서로를 이해하고, 그 곁에 머무는 사람이 되는 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세계를 구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무너지는 마음 옆에 그냥 남아주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용기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