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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정 Aug 24. 2021

영화 <존 말코비치되기> 감상평



영화의 오프닝은 인형극이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인형조종사의 집에서 이뤄지는 연극. 그 인형극 속에서 주인공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보고 난 후 모든 것을 파괴한다. 그리고 극이 종료된 후 인형조종사(크레이그)는 잠이 든다. 인형극은 크레이그라는 인물을 대변하는 것으로 영화 속에서 등장한다. 돈을 벌지 못하는 삶, 아침마다 자신을 불편하게 깨우는 동물, 아기를 갖자는 아내, 같은 직업의 사람이 TV에 나올 때 느끼는 자괴감등이 그를 인형극으로 도망가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의 제목은 ‘존 말코비치 되기’이다. 누군가가 된다는 제목과 극 속 인물이 가진 인형조종사라는 직업이 갖는 공통적인 맥락은 비단 여기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이 영화를 보고 든 생각은 ‘이상하다’라는 것이다. 왜 이상한 느낌이 드는지 궁금증이 들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사람들이 말코비치가 되려는 이유 중 하나는 영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연적으로 이 영화는 ‘외로움’이란 결핍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15분에 200불이라는 거금을 들여서 존 말코비치가 되려는 이유는 무엇일지에 대해서 우선 살펴보자. 사람들은 배우 말코비치의 삶을 들여다보는 호기심과 관음에서 더 나아가 ‘누군가가 된다는 것, 타인이 된다는 것’ 자체에 희열을 느끼는 것으로 영화에서 표현된다. 처음 말코비치의 관문을 다녀온 라티는 자신이 말코비치가 됐다는 것에 광분하지만, 이내 남편 크레이그가 그것을 수정해주자 말코비치가 됐던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 이것이 영화 속 라티와 크레이그의 차이점이고 그것으로 인해 부부였던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결말을 맞게 된다.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타인이 된다는 것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과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바탕으로 한다.  그 말을 뒤집어 보면, 지금의 현실과 나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밑 빠진 독과 같은 만족감의 최대 점은 타인이 돼보는 것이었을 것으로 영화는 선정하고 있으며, 그것의 환상성과 시각화된 것들을 감독은 영화 속에서 관객에게 준다. 더불어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한다는 지점은 공허가 있다는 것이다. 이 결핍은 인물들 마음속에 하나씩 존재하는 것으로 그려지며 이것을 채워나가는 공통분모로써 캐릭터인 배우 존 말코비치가 존재한다.  인물의 그룹은 라티, 크레이그라는 첫 번째 그룹과 말코비치, 원숭이 그리고 맥신이라는 두 번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그룹으로 본 영화는 라티와 크레이그의 사랑과 전쟁과 같이 묘사된다. 라티는 동물을 보살피고 그들에게 애착을 보인다. 그녀의 집에는 앵무새, 강아지, 원숭이, 이구아나 등이 함께 살고 있으며 그녀는 아이까지 갖고 싶어 한다. 그녀는 사랑을 쏟아 붓는 유형이다. 그녀의 사랑해야할 목록에는 남편인 크레이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크레이그는 첫 번째 인형극에서 보였듯이 자신에 대한 자괴감을 갖고 있으며, 두 번째 인형극에 나타난 것처럼 섹슈얼 적이고 금기시된 사랑을 꿈꾸는 인물이며 인형극 속에 살고 있기에 그녀에게 사랑을 줄 수 없는 인물로 여겨진다. 그러던 그녀가 극중에서 처음으로 자신에게 먼저 사랑 고백하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비록 말코비치의 의식 속에 있던 그녀였으나 라티는 신경 쓰지 않고 말코비치를 통해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라티는 초반 말코비치가 되는 것에 대해 집착을 보인다. 그 관문을 통해서만 맥신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후반 맥신이 당신과 나의 아이이며 두 엄마가 돼보자고 하는 말을 듣고 나서야 말코비치가 되는 것을 포기한다.


이에 비해 크레이그에게 맥신은 본인이 가졌던 환상에 가장 잘 부합되는, 금기시되는 사랑을 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극 초반 관문을 발견하고 난 후 맥신이 “당신이 필요해, 믿을 사람은 당신뿐이야.”라고 크레이그에게 말한다. 이 지점에서 크레이그는 자신의 사랑에 대한 희망을 가졌을 것이며 실제 주인공은 자신이면서도 무대에서는 박수 받을 수 없는 인형조종사라는 삶에서 벗어나고 ‘자신’을 믿어주고 필요로 하는 사람을 찾았음에 기뻤을 것이다. 초반 크레이그는 관문을 발견하고 난 후 맥신과 라티가 서로 사랑에 빠지기 전까지 말코비치의 관문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하면 영화의 흐름과 함께 크레이그는 점점 누군가가 된다는 것과 그 결핍을 점점 크게 느끼는 인물로 그려진다.

두 번째 그룹은 존 말코비치, 원숭이, 맥신이다. 이들의 공통지점은 ‘대상’이라는 것이다. 애착의(원숭이), 수단의(말코비치), 사랑(맥신)의 대상이란 의미다. 심지어 존말코비치라는 인물은 극중에서 배우로 등장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연극에 그는 등장하지 않으며, 배우라는 직업은 감독과 대본에 얽매여있는 인형극의 인형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는 영생을 이루게 해주는 존재이며, 크레이그와 라티에게는 맥신과의 사랑을 이뤄주는 수단의 존재이다. 맥신은 두 사람의 사랑을 받는 대상이며, 또 다른 말코비치를 임신하고 있는 대상으로 등장한다. 그 외의 역할은 하지 않는다. 캐릭터의 생성이유가 이것 외에는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가장 독특한 대상은 원숭이다. 반려동물로 잘 키우지 않는, 인간과도 유사한 원숭이를 등장시키는 이유와 영화 중반에 뜬금없이 보이는 가족과의 이별 장면을 원숭이의 시점으로 그리는 이유에 대해서도 궁금했다. 극의 초반 크레이그는 원숭이에게 “의식이란 저주가 없어서 운이 좋은 줄 알아”라고 말한다. 크레이그에 의해 갇힌 라티의 밧줄을 풀어주는 행위를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을 통해서 의식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의식이 없다고 취급했던 그를 비웃어 주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면, 존 말코비치와 원숭이는 일련의 일직선상의 대칭점에 서 있는 존재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몸은 비록 케이지에 갇혀있고, 가족과의 이별을 통해 트라우마를 갖고 있지만, 가족과의 기억을 갖고 있는 원숭이와 몸은 자유로우나 자신의 의식 속에 누군가가 몰래 들어와 조종당하며, 점점 의식을 잃어가는 말코비치의 공통점은 타인에 의해 빼앗긴 것들이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누군가가 되길 소망하면서도 자신의 모습과 소망을 지키려고 한다. 이것은 모순이다. 자신의 사랑하는 과정 중에서 자신은 절대 타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지점의 시작에 대해 사람들은 타인의 동일성, 이질감에서 오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깨지는 순간, 사랑의 유효기간도 끝난다고 했다. 모든 상황은 ‘나’에 대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타인이 된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부족하고 싫어하는 자신이 있기에 타인이 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생기는 것이다. 극에서는 이 모순의 시작점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결핍을 가진 캐릭터들을 등장시킨다. 이 부분은 자신의 애착에 대한 것으로 표현되는데, 말코비치가 자신의 관문으로 직접 들어갔을 때, 만난 것이 수많은 자신들이 가득 찬 세계였음이 이 지점을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캐릭터 외에 형식 또한 인상적이다. 영화는 스튜디오에서 대부분 촬영됐다. 넓은 공간이라고는 관문에서 떨어지고 난 후의 고속도로일 뿐이다. 그 외에는 좁은 공간이 주된 배경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캐릭터와 카메라의 거리가 좁다. 마치 바스트 샷이 최저 마지노선인 듯이 인물들을 가까이 잡는다. 공간의 영향도 있겠다. 이런 방식은 관객에게 또 다른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줌에 방점이 있을 것이다. 말코비치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 회사사람들과의 대화등도 외딴 곳에 있는 효과를 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영화는 자신을 받아들인 라티와 맥신의 행복한 삶과 그녀들의 딸의 의식 속에 사는 크레이그의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레스터 선장의 설명에 따르면 크레이그는 이제 딸의 의식에 전염되어 사라 질 것이다.  결국 존 말코비치 되기는 타인과 나 자신의 동일성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영화다. 동일화를 원하는 것 자체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지점을 극단적인 설정을 통해 설명하는 영화 같다. 이런 모순을 설명하는 영화의 방식이 독특하기 때문에 관람 후 이상하고 기괴하다는 느낌이 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영화의 설정은 특이하여 이해를 하기 어려웠으나, 가만히 생각하면 영화의 인물들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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