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선 -Sümpfe der Verzweiflung -9(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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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삿짐을 정리하던 중, 벽장 깊숙한 곳에서 낡은 박스가 하나 나왔다.
테이프 자국은 굳어 있었고, 상자는 눌린 부분이 많아 형태가 약간 뒤틀려 있었다.
뚜껑을 열자 파란 뚜껑의 CD-R이 층층이 들어 있었다.
비닐은 전부 뜯겨 있었고, 케이스에는 미세한 균열과 물얼룩이 남아 있었다.
플라스틱 틈에는 오래된 먼지가 끼어 있었다.
집 안의 데스크톱은 여전히 부팅되었다.
바탕화면 아래에는 CD-ROM 드라이브(D:)가 표시되었고,
CD를 넣자 회전음이 일정하게 울렸다.
파일 목록은 금세 나타났지만
파일명은 대부분 깨져 있었다.
확장자만 식별 가능했다. MPG, AVI, ZIP.
몇 개 파일은 클릭 즉시 오류를 냈다.
영상을 하나 열었다.
저해상도 화면, 반복되는 노이즈, 단순한 벽지.
공간 구조로 보아 저가 숙박업소였다.
창문 밖 간판의 일부에서 일본어가 잠깐 비쳤다.
다른 영상들도 구도와 높이가 거의 같았다.
방의 종류만 달랐다.
촬영자가 동일인임을 짐작하게 하는 규칙성이 있었다.
기록된 날짜는
1997년 말에서 1998년 초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이후 시점의 파일은 없었다.
나는 박스에서 다른 CD를 꺼냈고,
확인하기 위해 드라이브를 다시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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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자료만으로 당시의 상황을 완전히 복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행동의 반복과 장비의 흔적을 통해
촬영 방식은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
초기 영상의 짧은 목소리는
히카타 일대의 방언과 유사했다.
단문과 명령조 어조가 반복되었고,
표준 일본어의 억양은 거의 없었다.
노이즈와 화면 구성으로 보아
장비는 Hi8 또는 초기 DV 계열이다.
카메라는 대부분 고정된 위치에서
문틈, 복도, 출입구를 일정한 각도로 촬영했다.
초반 영상이 도촬 목적의 기록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일정 시점 이후
촬영 장소는 좁은 범위 안에서 다양해졌다.
후쿠오카 항만 주변의 숙박업소,
도심과 항로 사이의 창고로 보이는 공간,
환기가 되지 않는 단층 구조의 방 등이 등장한다.
공간은 바뀌었지만
촬영 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그 무렵부터
촬영자의 목소리는 줄고
광둥어·푸젠어 계열의 고함이 녹음되기 시작한다.
내용은 잡음에 묻혀 식별되지 않았지만
지시나 명령의 억양이었다.
촬영자가 조직의 기록 담당으로
편입된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파일명도 흐트러졌다.
초기에는 날짜와 숫자였으나
후기에는 의미 없는 문자열 또는
깨진 이름만 남아 있었다.
저장 환경이 통제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마지막 두 영상은 이전과 달랐다.
하나는
카메라가 기울어진 채 흔들렸고,
짧은 발걸음 소리와 호흡음만 들렸다.
프레임 드롭이 빈번했다.
도주 과정에서 기록된 것으로 보였다.
최종 영상에서는
카메라가 삼각대 위에 고정되어 있고,
촬영자가 화면 중앙에 묶인 채 있었다.
주변에는 오래된 철제 도구들이
트레이 위에 정리되어 있었다.
광둥어 억양의 고함이 들렸지만
대부분은 노이즈에 묻혀 있었다.
그 이후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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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이후 이 디스크들이
2012년 한국의 박스 속에 들어오기까지의 경로는
자료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시 비공식 물류 구조를 고려하면
추정 가능한 흐름은 있다.
후쿠오카—시모노세키—부산 구간은
중고 전자 부품과 스크랩 디스크가
저렴하게 이동하던 해상 루트였다.
일본의 중고 도매상에서는
포장 상태가 불량한 공디스크 묶음이
박스 단위로 거래되었고,
그 일부는 용산·남대문 도매상에게
낮은 단가로 넘어갔다.
해당 CD들도
그 유통망 속에 섞여 이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표면 산화, 라벨 벗겨짐, 케이스 균열은
오랜 방치와 반복된 이동의 흔적과 일치한다.
고모부가 공디스크를 매입하던 시점과
그러한 유통 구조의 활성 시기는 겹쳤다.
그는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재고를
박스 단위로 들여오곤 했다.
2012년 나는
그 박스를 발견해 몇 장의 내용을 확인한 뒤
모두 다시 넣어 폐기했다.
이후 디스크가 어디로 이동했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사실은
1998년 한 개인의 기록이
14년 동안 다양한 유통망과 방치를 거쳐
한국의 가정집 구석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점뿐이다.
그 이상의 정보는
남아 있는 자료로는 확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