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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통증'과 통증의 미학

서로의 결점을 보완해가는 공동체에 대한 연대의 정신이 필요...불완전한 인간이기에          


2011년 개봉한 영화 ‘통증’은 만화가 강풀의 원작을 바탕으로 곽경택 감독의 수려한 연출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가슴이 먹먹하리만치 슬프지만 아름다운 한 편의 사랑 이야기이다. 영화는 인생의 유실되거나 때론 조각난 기억의 파편들을 복원해 주기도 한다.     



영화‘통증’도 그러했다. 우리는 대부분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더 좋은 것, 더 높은 곳만 바라보며 쉼 없이 달려간다. 그러는 사이 삶의 소중한 존재와 가치들을 망각하기도 하고 놓쳐버리기도 한다. 담담한 만족함에 지독히도 야박한 삶의 태도를 성찰하게 해주는 영화 ‘통증’은 아프지 않고, 살며, 사랑하는 것이 그 얼마나 위대하고 축복받은 일인가를 자각하게 한다.     



누군들 가슴 아프지 않았던 청춘이 없겠지만 영화 속 주인공들의 애절한 사랑에는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존재한다. 어릴 적 자신의 실수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죄책감으로 온몸의 감각을 잃어버린 ‘남순’은 통증을 못 느끼는 무통각증 환자이다. 그러하기에 타인의 아픔에 둔하며 어떠한 공감도 느끼지 못한다. 슬픔도 알아채지 못한다. 사채업자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그에게 어느 날 피가 나면 멈추지 않아 작은 통증조차 치명적인 혈우병 환자인 여자 ‘동현’이 나타난다.     



‘남순’은 자신과 극과 극인 고통을 가진‘동현’과의 일상에서 난생처음 가슴에 지독한 통증을 느끼게 된다. 그건 ‘사랑의 통증’이었다. 그랬다. 무통각증 환자는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설정된 과한 사랑의 발견이지만 영화이기에 가능할 것이다. 사랑은 본디 강한 동질성을 기초로 확장된다. 그러다가 더더욱 강한 서로의 차이점을 격렬하고 가슴 아프게 발견하는 과정이다. 영화 속 그들이 그러했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사랑은 완전해지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이며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이라고 표현했다. 영화 ‘통증’은 그의 말을 반증한다.     



의학적으로 통증은 실제 또는 잠재적인 신체 손상과 관련된, 불쾌한 감각이나 감정적 경험을 의미한다. 통증은 그 자체로 질병은 아니다. 하나의 증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통증이 있는 환자는 보통 통증이 있는 부위를 만지게 되고 신체 활동은 줄어들며, 통증을 유발하지 않는 자세를 취하게 되니 자연스레 모든 일상이 움츠려 들기 마련이다. 사랑도 때론 이별의 고통을 수반하며 존재를 버겁게 하니 정신과 신체의 통증은 늘 연계된다.     



통증은 환자가 의사에게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파악하기 쉽지 않다. 사실 의사와 환자의 친밀도와 진료 상황에 따라서 통증을 가늠하는 평가가 매우 주관적일 수 있다. 그래서 통증 평가의 객관성을 높이기 위한 통증의 불편 정도를 평가하는 다양한 설문지들이 개발되어 임상과 연구에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 한계는 명확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마다의 기질과 성향이 천차만별일진대 어찌 인간의 통증을 객관화할 수 있단 말인가.     



현실을 살아가면서 세속적인 가치에 눈이 멀어 진정 소중한 것들을 잃어가는 우리들도 어쩌면 ‘남순’처럼 무통각증 환자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한다. 통증의 근본적인 치료는 원인 질병을 완치하거나 호전시키는 것이다. 마음의 통증도 그러할 것이다.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남자와 피가 멈추지 않는 혈우병으로 유리 같은 여자와의 사랑을 그린 영화 ‘통증’. 현실을 살아가면서 세속적인 가치에 눈이 멀어 진정 소중한 것들을 잃어가는 우리들도 어쩌면 ‘남순’처럼 무통각증 환자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결점을 보완해가는 공동체에 대한 연대의 정신이 필요하다.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그렇다. 그것이 통증의 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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