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 선 자의 시선(視線)
필명 유인(幽人)에 대하여~
- 경계(境界)에 선 자의 시선 -
내 글의 끝에는 항상 ‘유인이 쓰다‘에 필명 유인(筆名 幽人)이 있다. 필명이라는 이 두글자는 내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자, 글을 쓰는 이유이며, 스스로를 지키고자 하는 약속이다. 필명의 연원을 묻는 이들을 위해, 나의 짧은 사유의 여정을 기록한다. 나의 첫 필명은 고반(考槃), 지상(知常), 열정(洌井)등을 거쳐 가돈(嘉遯)에 이르렀다. 주역에서 빌려온 이름으로, 그 원전의 의미는 혼탁한 세상으로부터의 아름다운 은둔 또는 도피를 말하는 것이다. 나도 그즈음이 은퇴를 앞둔 시점이라 세속을 등지고 스스로를 지키는 행위에서 나름 의미를 찾는 것이 삶에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돈(遯)자에 아무리 아름다운 수식을 붙여도 ‘달아난다‘는 행위의 그림자를 지울 수는 없었다. 백이숙제(伯夷叔齊)가 떠오름을 피할 수 없듯이. 인간은 홀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평범한 진리 앞에서 도피가 아닌 공존(共存)의 지혜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난 유인(幽人)이 되었다. 유(幽)는 ‘그윽하다’ ,‘깊다‘는 뜻을 품고 있다.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숨는 행위(遯)가 아니라, 세상의 소음이 닿지 않는 깊고 그윽한 공간(幽)에 머무는 상태를 의미한다. 유인은 세상과 담을 쌓은 은둔자가 아니다. 오히려 세상의 가장자리, 경계에서 세상의 중심을 가장 선명한 눈으로 바라보는 관조자다. 이제 세상의 주연이 되어 무대에 서기보다, 나이와 분수에 맞게 한 걸음 물러나 묵묵히 지켜보고 성원으로 동참하는 것. 그것이 내가 ‘유인‘으로서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다. 나는 세상과 온전히 호흡하되 그 안에 함몰되지 않기를, 뜨겁게 공감하되 냉철한 거리를 잃지 않기를 소망한다. 나의 글은 그 ‘유(幽)한 공간에서 피어나는 사유의 기록이다. 이 기록이 또 다른 ‘유인(幽人)’으로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위로와 공감이 되기 바랄 뿐이다.
2026 2月初, 겨울밤이 깊어간다
獨樂齋에서 幽人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