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컨설팅의 역사 - B컷>을 시작하며
언제부터 글쓰기를 시작했는지 여러분은 기억하시나요? 처음 글씨를 쓴 순간이라면 비교적 명확합니다. 한글을 배우며 쓴 글씨가 첫 번째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저는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글씨를 배웠습니다. 요즘과 달리 예전에는 저같이 늦깎이로 한글을 배우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그 무렵에 썼을 '가나다라'가 처음 쓴 글씨이지 않을까요. 하지만 별다른 의미 없이 글자를 옮겨 적었을 뿐이니 이를 글쓰기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처음 쓴 글은 일기인 것 같습니다. 일기 쓰기는 학교 숙제였고 성실한 학생인 저는 빼먹지 않고 매일매일 일기를 썼습니다. 첫 시작은 그림일기였습니다. 한 페이지의 절반은 그림을 나머지 절반은 원고지 칸에 큼직한 글씨를 채워 넣었습니다. 글보다는 그림을 더 열심히 그렸습니다. 수월하게 그릴 수 있는 그림과 달리 글쓰기는 쉽지 않은 과제였습니다. 선생님은 일기에 '참 잘했어요'라는 문구의 큼직한 도장을 찍으시곤 맞춤법에 안 맞는 글을 빨간색 글씨로 고쳐주셨습니다.
점차 학년이 높아지면서 글로만 일기를 썼습니다. 초등학교 무렵의 일기는 저 혼자만의 비밀이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은 매일 모든 학생의 일기를 거둬서 보시고 때로는 빨간색 글씨로 감상을 적어주셨습니다.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구나!' 혹은 '어린 동생을 돌봐주다니 참 착하다!'라는 감상과 칭찬이 적혀 있는 날이면 어린 마음에 너무나 뿌듯했습니다. 선생님께 잘 보이기 위해서 어떤 내용을 일기에 써야 할지 고민했던 기억이 납니다.
중학생이 되면서 점차 일기 쓰기에 소홀해졌습니다. 일기는 더 이상 숙제가 아니었고, 성실하지만 부지런한 학생은 아니었던 저는 자연히 일기 쓰기에서 멀어집니다. 이 무렵에 제가 가장 많이 한 쓴 글은 독후감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숙제에서 일기가 빠진 자리를 독후감이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처럼 컴퓨터를 널리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200자 원고지를 펼치고 책을 읽은 소감을 썼습니다. 숙제답게 원고지의 분량은 10매, 20매 등으로 정해져 있었기에 이를 채우는 일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책을 읽은 계기로 시작해서 책의 내용을 다소 길게 요약하고 마지막에는 저의 감상을 짧게 덧붙이는 요령으로 분량을 채웠습니다.
독후감뿐만 아니라 각종 글짓기도 과제 혹은 숙제로 나왔습니다. 통일을 위한 노력, 내가 어른이 된다면 등의 글감이 학생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운 좋게 과제로 제출한 글이 뽑혀서 백일장에 나가기도 했습니다. 과거에 응시한 선비처럼 운동장 혹은 공원 바닥에 모여서 글감을 받아 들고 원고지를 채우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납니다. 글쓰기는 여전히 쉽지 않았고, 탈락을 면하기 위해서 내용을 부풀려서 분량을 채우는데 급급했습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여전히 글을 써야 했습니다. 제가 대학을 준비하던 시기는 학력고사가 폐지되고 수학능력평가(수능)가 도입되던 무렵이었습니다. 수능만 보면 좋으련만 일부 대학교들은 본고사라는 이름으로 각자 제출한 문제로 학생들을 뽑았고, 본고사의 국어 과목에서 논술이 차지하는 비중은 컸습니다. 거창하게 논술이라고 불렀지만 실상은 글짓기와 다르지 않았기에 글쓰기는 입시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신문의 사설을 오려서 읽으며 논술식 글에 익숙해져야 했습니다. 주어진 글감을 정해진 시간 내에 분량을 맞춰서 쓰는 연습을 반복적으로 해야 했기에 글쓰기는 여전히 어려운 숙제였습니다.
논술을 위해서 맹렬하게 글쓰기 연습을 한 보람도 없이 수능만으로 들어간 대학교에서도 글쓰기는 계속되었습니다. 공대생이었건만 글과 삶, 말과 삶이라는 이름의 국어 수업은 교양 필수 과목이었기에, 대학생이 되어서도 글쓰기는 여전한 숙제였습니다. 그간의 숙제와 입시 준비로 이력이 날만도 하건만 글쓰기는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았고 버거웠습니다.
가끔씩은 잘 쓴 글로 뽑혀서 친구들 앞에서 낭독을 했습니다. 남들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내성적인 성격에 부끄럽기도 했지만, 또래들 앞에서 뽐낼 기회가 없던 평범한 학생으로서는 처음 받는 주목인지라 우쭐하기도 했습니다. 입시로 억눌려있던 감성이 폭발하던 시기에 저의 글은 항상 과도한 감정이 넘쳐났고, 교수님과 친구들이 보인 관심은 기름을 붓는 격이 되어서 활활 타올랐습니다. 이때가 처음으로 글쓰기의 재미를 느낀 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고학년이 되면서 글쓰기와 다시 멀어졌습니다. 교양 필수 과목의 자리는 전공 필수 과목이 차지했고 글쓰기 숙제는 전공 리포트로 대체되었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석사 논문을 써야 했지만 석사 논문의 팔 할은 글쓰기가 아닌 자료 찾기였습니다. 심오한 이론을 써 내려가기는 역부족이었고, 수많은 참고문헌에서 문장을 따왔고 출처를 기재하는 기계적인 작업이었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우여곡절 끝에 경영 컨설턴트가 되었습니다. 경영 컨설턴트로 일하며 수많은 보고서를 썼습니다. 하지만 컨설팅의 보고서 작성은 글쓰기와는 동떨어진 일이었습니다. 수많은 장표를 작성해야 했지만 글의 비중은 크지 않습니다. 장표의 제일 위에 쓰는 한 문장의 거버닝 메시지를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은 숫자를 분석하고 그림을 작성하는 일이었습니다. 긴 호흡의 글을 쓸 일은 없었고 짧은 문장과 단어의 나열이 반복되었습니다.
컨설팅 보고서에 나의 생각을 오롯이 담을 수 없다는 아쉬움도 컸습니다.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팀 단위의 일이었기에 여러 사람의 주장을 모아야 했고, 고객사와 컨설팅사의 생각이 다를 때에는 대부분 고객사의 의견을 따라야 했습니다. 누구의 논리가 맞느냐는 문제보다는 누가 이 일을 책임질 것인가가 더욱 중요했습니다. 컨설팅사는 최선의 조언을 내놓지만 결국 이를 실행하는 일은 고객사의 몫입니다. 정답이 분명하지 않은 경영 의사결정에서 고객사의 선택은 컨설팅사의 조언에 우선합니다.
컨설턴트로서 가장 힘들었던 프로젝트 중의 하나에서 의욕 없이 시간만 보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고개를 들었습니다. 고객사이건 누구이건 눈치를 보지 않고 나만의 생각을 펼치고 싶었습니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의견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의미 없는 장표를 쏟아내며 나의 여생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의 일상을 지탱해 줄 보람 있는 일이 절실했습니다. 그래서 글쓰기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글감을 찾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경영 컨설턴트로 일을 시작할 무렵부터 항상 품어온 궁금증을 글감으로 선택했습니다. '이런 거지 같은 일을 도대체 누가 만들었지?'라는 의문이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살인적인 야근에 신음하던 주니어 컨설턴트 시절에 떠올린 질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화풀이의 대상을 찾고자 했지만, 컨설턴트로서의 경력이 쌓이면서는 점차 순수한 궁금증으로 변해갔습니다. 항상 고객사의 산업과 사업을 분석하는 컨설턴트로서 정작 내가 일하는 업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컨설팅의 시작과 발전 과정을 연대기적으로 살펴보는 역사책을 쓰고 싶었습니다. 책을 쓰기도 전에 제목부터 정했습니다. <25가지 사건으로 살펴보는 경영 컨설팅 연대기>
글짓기를 위한 자료를 찾는 시간은 제법 오래 걸렸습니다. 컨설팅에 대한 국내 서적은 <맥킨지는 일하는 방법이 다르다>, <로지컬 씽킹> 등의 컨설턴트답게 일 잘하는 방법을 다룬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경영 컨설팅의 역사에 대한 문헌은 좌절스러울 정도로 적었습니다. <전략의 제왕>, <마빈바우어 맥킨지의 모든 것> 등의 몇 권이 제가 찾을 수 있는 컨설팅 역사서의 전부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해외로 눈을 돌렸습니다. 아마존과 인터넷에서 Management Consulting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했습니다. 컨설팅 기법에 대한 문헌이 대부분인 것은 국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몇 권의 책을 건질 수는 있었습니다. 1900년대에 시작한 컨설팅이 1960년대의 황금기를 거쳐서 2000년대에 엔론사태를 맞이할 때까지의 기간을 다룬 <The world's newest profession>은 완벽하지는 않아도 제가 알고 싶던 컨설팅의 역사를 오롯이 다룬 유일한 책이었습니다. <The oxford handbook of management consulting>은 컨설팅의 역사만 다룬 책은 아니었으나 <The world's newest profession>의 빈 곳을 일부나마 채워주었습니다. 두 권의 책이 다루지 않은 내용은 개인적인 노력으로 메꿔나갔습니다. 저서에서 인용한 논문을 검색해서 읽고, 논문에서 인용한 참고자료를 다시 찾아서 읽는 지난한 작업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필요한 자료가 어느 정도 모이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개략적인 목차를 정하고 글을 써 내려갔습니다. 일필휘지로 쓰고 싶은 의욕과 달리 글쓰기의 진도는 좀처럼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한 페이지는 고사하고 한 문장도 완성하지 못해서 끙끙대는 일의 반복이었습니다. 어렵게 만들어낸 문장도 다시 읽어보면 너무나 어색해서 계속해서 고쳐야 했습니다. 끙끙대며 생각한 내용이 아까워서 모두 적다 보니 문장이 길어지고 구조는 복잡해졌습니다. 문장이 길어지자 주어와 서술어가 짝을 잃고 각자 따로 놉니다. 뜻은 대충 통하는데 우리말 같지 않고 기계가 번역한 문장 같습니다. 생각을 길게 써 내려가기에 저의 문장력은 너무 비루했습니다. 결국 긴 문장은 포기하고 단문으로 끊어서 적기 시작했습니다. 문장이 짧아지니 쓰기는 조금 수월해졌습니다.
단문을 꾸역꾸역 지어내서 한 챕터를 완성했습니다. 전체 목차를 5개의 챕터로 구성했으니 5분의 1을 완성한 셈이었습니다. 일부나마 해냈다는 뿌듯함에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다시 읽어본 초고는 처참했습니다. 오십 쪽 가량의 짧은 글이건만 맥락 없이 문단을 나열해서 좀처럼 읽히지 않았고, 중복하거나 생략한 내용이 많아서 작성한 저조차도 이해하기 힘든 지경이었습니다. 문단의 순서를 뒤바꾸고 중복된 내용을 삭제하고 비어있는 내용은 채워 넣는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초고만큼 오래 걸려서 고쳐 쓴 내용은 분명히 나아졌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식으로 헤매면서 쓰다가는 도저히 책을 완성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글쓰기가 익숙하지 않은 제가 샛길로 빠지지 않게 길잡이 역할을 해줄 무엇인가가 필요했습니다. 결국 개략적으로 정한 목차를 더욱 세부적으로 나누고 어떤 내용을 배치할지를 정해 나갔습니다. 각각의 챕터에서 다룰 내용을 5개의 절로 나누었습니다. 5개의 절은 다시 3~4개의 꼭지로 나누고 어떤 내용을 적을지 대략의 내용을 적었습니다. 챕터 하나를 통째로 쓰기는 어렵지만 15~20여 개의 꼭지로 잘게 나누어서 글을 쓰기는 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하나의 꼭지는 1쪽 내외의 분량으로 정했습니다. 길이가 짧기에 횡설수설하기 전에 글을 마무리할 수 있다는 기대였습니다. 이렇게 글을 써보니 한결 편합니다. 긴 문장보다 짧은 문장이 쉬웠던 것처럼, 글도 짧아지면 쓰기가 쉬워진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글을 쓰다가 막히면 다시 꼭지를 나누는 식으로 토막 내면서 책을 채워나갔습니다.
헤매며 시작한 글쓰기는 꼬박 2년이 걸려서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고작 초고를 썼을 뿐인데 벌써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이제 책을 낼 출판사만 정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종합 출판사 다섯 곳을 뽑아서 원고 투고 메일을 썼습니다.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컨설팅 지망생 위주의 꾸준한 수요가 있는 소재이며, 유사한 도서가 없다는 점이 저의 셀링 포인트였습니다. 전문 작가가 아니라서 많이 다듬어야 하지만 초고는 완성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초고의 절반을 첨부해서 발송 버튼을 눌렀습니다. 금방 연락이 올 것만 같았습니다.
2주일이 지나도 연락은 오지 않았습니다. 한 달이 다된 무렵에야 출판사 한 곳에서 답신이 옵니다. 귀중한 원고를 투고해 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로 시작해서 당사의 출판 방향성과 맞지 않아서 출간은 어렵다는 거절로 맺는 이메일이었습니다.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메일을 보내지 않았던 나머지 종합 출판사의 문도 두드립니다. 경영경제 전문 출판사와 역사 전문 출판사를 조사해서 닥치는 대로 메일을 보냅니다. 35개의 출판사에 메일을 보냈으니 설마 한 군데라도 연락이 오겠거니 싶습니다.
다시 한 달을 기다렸건만 연락을 해준 출판사는 없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35개의 출판사 중에서 7곳이 거절 메일을 회신했고, 나머지는 무회신으로 거절의 뜻을 밝혔습니다. 이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출판사에 돈을 주고 출판을 의뢰하는 자비출판이 있다고 합니다. 가격을 검색해 보니 500만 원 내외입니다. 또다시 고민에 빠집니다. 무수히 많은 출판사가 거절한 원고입니다. 베스트셀러는커녕 원금 회수도 불가능하겠다 싶습니다. 그동안 쏟아부은 노력의 값어치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지만 500만 원을 쓰면서까지 낼만한 책인지 확신이 서질 않았습니다.
결국 마지막 남은 방법인 자가출판을 선택했습니다. 자가출판은 인쇄 직전까지의 모든 일을 작가가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고는 있으니 내지 편집과 표지 디자인을 해야 합니다. 내지 편집은 글꼴 검색부터 시작했습니다. SM신신명조 같이 어여쁘고 잘 읽히는 글꼴을 쓰면 좋으련만 돈을 내야 합니다. 수많은 무료 글꼴을 다운로드하여서 원고에 적용하면서 검토했습니다. 결국 KoPub 글꼴을 선택했습니다.
글꼴을 선택한 이후의 내지 편집도 또 다른 어려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장평, 자간, 줄간에 대한 감이 없는지라 대충 인터넷에서 추천하는 수치를 넣고 편집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막상 편집된 결과물을 보니 전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글자 사이가 너무 멀어서 치열이 고르지 못한 이빨을 보는 듯한 기분입니다. 장평과 자간을 다시 조정해 보았습니다. 아! 조금 나아 보입니다. 하지만 전체 쪽수가 달라집니다. 페이지의 제일 위에 있어야 할 소제목이 중간 즈음으로 밀려납니다. 앞에서부터 다시 보면서 편집을 해나갑니다.
천신만고 끝에 완성한 원고를 자가출판사에 제출했습니다. 오분도 안되어 연락이 왔습니다. 원고를 반려했으니 다시 제출하기 바랍니다라는 이메일입니다. 이메일을 열어보니 글꼴이 문제입니다. KoPub 글꼴이 출판사의 인쇄기에서 잘못 출력되는 일이 있기 때문에 글꼴을 바꿔야 한다는 안내입니다. 눈앞이 아득해졌습니다. 그간 무수히 해온 삽질로 글꼴을 바꾸면 편집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는 정도는 깨우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수많은 검토를 통해서 선정한 무료 글꼴로 편집을 다시 해야 했습니다.
처음 해보는 표지 디자인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컨설턴트로 수십 년간 파워포인트를 만져왔기에 손쉽게 할 줄 알았습니다만 디자이너의 세계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낑낑거리며 메인이 되는 도안을 그렸지만 어딘가 많이 부족합니다. 빈약한 미적 감각을 메우기 위해서 수백 번의 수정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예상과 다르게 인쇄된 색상의 표지는 번번이 좌절감을 안겨주었습니다. RGB와 CMYK의 차이를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내지와 달리 표지에는 명조체를 쓰기 쉽지 않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수십 개의 고딕체를 적용해서 어울리는 글꼴을 골라냈습니다. 도안, 색상, 글꼴을 오가며 반복하는 수정에 지쳐서 거의 될 데로 되라는 식으로 포기할 지경이 되어서야 인쇄에 넘길 수 있었습니다.
ISBN을 부여받은 첫 책을 출간한 지 일주일이 되지 않은 시점입니다. 실시간은 아닙니다만 판매 실적을 보니 지금까지 단 1권이 팔렸습니다. 아직 판매 실적을 예단하기는 이른 시점입니다만 그리 좋을 것 같지 않습니다. 35여 개 출판사의 전문 편집자들이 판단한 상업성이니 믿을 수밖에요. 출간된 책의 품질도 조금 아쉽습니다. 못 볼 수준은 아닙니다만 아무래도 전문 출판사의 인쇄소에서 만들어낸 책과는 차이가 있음이 느껴집니다.
예전과는 책을 보는 눈이 달라졌기 때문에 더 민감하게 느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책을 집어 들면 제본 방식과 책날개에 눈이 갑니다. 가격이 저렴한데도 양장제본을 한 책을 만나면 사고 싶은 마음이 한 뼘은 자랍니다. 간혹 약표제지나 표제지가 없는 책을 만나면 넣지 않은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내지에 어떤 글꼴을 사용했는지 몇 개나 썼는지 눈여겨봅니다. 내지마저 컬러로 인쇄한 책은 부럽기까지 합니다. 얼마나 많은 수고와 비용이 들어가는지 알게 되었고, 상업성이 낮은 저의 책은 가장 저렴한 방식으로 제작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뿌듯합니다. 2년 여의 고생 끝에 만들어낸 저 혼자만의 결과물입니다. 어찌 보면 제 유전자의 절반만 받은 자식보다도 저와 더 밀접합니다. 저의 책은 오롯이 저만의 생각으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달랑 1권만 팔렸습니다만 월급 이외의 수입이라는 점도 근사합니다. 1권의 인세라봐야 소주 한 병 사 먹을 돈 입니다만 액수보다는 돈이 생겼다는 자체가 신기합니다. 어쩌면 매일매일 1권씩 팔려서 평생 저의 술값 정도는 벌충해주지 않을까라는 상상을 해봅니다.
무엇보다 글쓰기가 조금은 편해졌습니다. 한 줄도 마무리하지 못하고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던 예전과는 다름을 저 스스로 느낍니다. 여전히 볼품 없어서 남에게 보이기는 부끄러운 문장입니다만 저의 생각을 적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습니다. 고쳐 쓰다 보면 언젠가는 좋아지겠지요. 헤밍웨이 마저 '모든 초고는 쓰레기다'라고 말했다고 하니 초보 작가 주제에 한 번에 쓴 명문을 바라는 것은 과욕을 넘어선 탐욕이겠지요.
꾸준히 글을 쓰고 계속해서 책을 내려합니다. 주제를 정하지는 않았습니다만 다음 출간은 출판사를 통하고 싶습니다. 표지와 내지 편집은 한 번의 경험으로 만족하고 싶습니다. 출판사를 통하려면 팔리는 책을 써야겠지요. 제가 쓰고 싶은 내용은 첫 번째 책에 적었으니 두 번째는 남이 읽고 싶은 책을 쓰려고 합니다. 그래서 브런치를 개설하고 글쓰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아무래도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는 저의 글에 대한 독자의 반응을 살피는 편이 빠르겠다는 생각입니다. 혼자만의 글쓰기에서 빠지기 쉬운 나태함을 예방하는 효과도 있겠지요.
일단은 제가 출간한 책인 <거의 모든 컨설팅의 역사>에서 미처 풀어내지 못한 이야기부터 시작하려 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책에 쓰지 못한 내용이 꽤 있습니다. 유사한 내용이 중복되어서 삭제하거나 자료의 근거가 부족해서 삭제한 경우가 제일 많습니다. 하지만 책에 적기는 너무 민감하거나 어쩌면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기우로 한 자기 검열 때문이기도 합니다. 저도 아직 현역인데 컨설팅 업계의 미움을 사고 싶지는 않습니다. 컨설팅사로부터 자칫 소송이라도 당하면 낭패입니다. 그래서 종이책보다는 부담이 적은 온라인으로 이런 내용을 다뤄보려 합니다. <거의 모든 컨설팅의 역사 - B컷> 정도라고 할까요.
그래서,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