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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로지 Oct 25. 2024

열두 살이 정의한 비극

비장애 형제자매 이야기

#scene 1. 열 두살 때의 기억


나는 차가운 파란 방에 있다. 벽지는 서늘한 하늘색, 이 방의 공기는 웃풍 때문인지 한기가 돈다. 나는 책이 가득한 책장을 마주 본 긴 책상 앞에 앉아있다. 내 몸집에 비해 책상과 의자가 너무 크다. 책상의 가로길이가 내 팔을 양쪽으로 쭉 핀 길이보다 길만큼.


나는 의자에 굳이 무릎을 꿇은 자세로 앉는다. 언제부터인가 이게 습관이 되었다.

무릎을 꿇으면 발목이 엉덩이와 허벅지의 무게에 짓눌려 압박감이 드는데, 이게 왠지 모르게 나한테 안정감을 주는 것 같다.


저녁 8시쯤 되었을까. 머리와 마음은 싱숭생숭하고 무언가에 몰입할 기색이 아닌데 나는 이 방에서 숙제를 해야한다. 나는 놀고 싶고 산만하게 굴고 싶은데 이 방을 나갈 용기는 없다. 재미없는 문제집의 소리들 사이로 내 연필이 둥글게 둥글게 굴러간다. 문제집을 쳐다보고 있지만 내 머리는 허공을 본다.


"읅--!!!!!!"


둔탁하게 참는 소리.


동생의 울음이 터지기 직전에 나는 소리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드나보다. 마음에 안 들면 보통 손과 팔을 깨물면 저런 소리를 낸다. 있는 힘껏 팔을 깨물면 동생의 머리가 부르르 떨린다. 너무 힘을 많이 줬기 때문에 깨물고도 남은 에너지가 몸을 떨리게 하는 거다. 그런 소리를 내고 나면 어김없이 걱정과 두려움이 어린 눈으로 주변을 쳐다본다. 가족들이 좋아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동생도 알고 있다.


발이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탕, ... 탕, ...


일정한 간격으로 바닥에 부딪히는 둔탁한 음 사이로 동생의 커다란 울음이 비집고 나온다.


그 소리에 충격받고 동생의 몸을 걱정하는 마음이 무뎌진지는 오래다.

그 다음은 허리를 숙이면서 온 몸을 비틀 것이고 동생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겠지.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못 견디는 듯 고통에 찬 소리, 비틀리는 몸, 긴장되어 뻣뻣해진 근육, 집 전체에 퍼져나가는 끔찍한 소리, 소리, 더 큰 소리 ...

집 전체가 진동하는 것 같다.


엄마가 동생을 달래는 소리가 들린다. 왜 그래, 하는 엄마의 피곤한 말소리. 대답이 돌아올 거라는 기대감은 없다. 동생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걸 알지만 '왜'라는 말을 참을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제발, 어느 누구라도 알려줬으면.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으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게.. 주었으면.


내 귀에는 그런 외침으로 들린다.

사실 내가 그런 뜻으로 끊임없이 '왜'를 외니까.

물음으로 발전한 날 것의 고통인 거다.


"아 왜애애-- 도대체 왜-!!!!"


"말을 해야 알 거 아냐!"


"말을 하라고! 말을! 왜 그러는데!"


"엄마 힘들어!! 제발 좀 그만해!"


참다참다 분출되는, 용암같 절망이 흘러내린다.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든다.


동생은 엉엉 울고, 엄마는 소리를 지르고, 이 분위기는 내가 닫아놓은 방문을 넘어 온 방을 홍수처럼 침습하는 듯 느껴지지만 한편으로 나는 이 시나리오와 철저히 격리되어 있다. '너 할 일을 잘 하는 것이 돕는 것이다' 라는 말이 가슴에 콱 박혀서 떨어지지 않는다. 한 발짝이라도 움직였다간 내게도 되레 큰 폭격이 날아와 꽂힐까 무섭다. 무엇이 나를 움직이기 어렵게 하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자신이 없고, 이 상황 안에서 방관자가 내 역할이다. 섣불리 참여했다가는 더 악화될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는 이 안에서 안절부절 못했지만 지금은 익숙하다. 나는 주변 일에는 전혀 신경도 안 쓰는 사람처럼 내 마음과 온 신경을 '돌이다'하며 최면 걸듯 생각하곤 한다. 그러면 모든 것이 무뎌지고 나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사람이 된 것 같다. 그러면 좀 살 거 같아서, 내가 생각해낸 생존전략이다. 그마저 안 될 정도로 심각해지면 나는 두 귀를 틀어막고 눈을 질-끈 감는다. 못 견디겠을 때는 입에서 소리없는 중얼거림이 새어나올 때도 있기는 하다.


'제발, ... 제발, .... 제발....!'


'제발 그만 좀...!'


그 때 아빠의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 그 만 좀 해 !"


"너 뭐 때문에 그러는데, 뭐!"


"너 이리로 와, 안 되겠다, 너 좀 혼나자!"


빵 !


결국 마지막 폭탄이 터져버렸다.

오늘은 한 단계 더 가는구나. 돌처럼 만든 몸이 섬짓, 일순간 흔들렸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을 더욱 굳힌다. 표정을 굳히면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 상태로 접어들기 쉽다. 이 생존전략에 흠이 있다면 일상에서 좋은 것도 점점 잘 안 느껴진다는 점이다. 최근에는 꽃과 자연을 보고도 감흥이 없는 나를 보며 스스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뭔가 느껴져야할 것이 안 느껴진다고.


좀 양호할 때는 동생만 터지고 다른 사람들은 달래는 입장이 되는데, 오늘처럼 모두가 지쳐있는 날에는 한 명이 터지면 연쇄반응이 일어난다. 뿌드득 뿌드득, 삐그덕 삐그덕, 맞지 않는 불편한 음이 들리는 것만 같다.


나는 절대로, 여기서 같이 터지지 않는다. 참고 참고 또 참아야지. 그리고 나는 짜증이 나고 화가 난다기보다 스트레스 받고 긴장하는 쪽에 가깝다. 온 몸이 안으로, 안으로, 숨어드는 것 같다. 가끔은 "제발 조용히 좀 해 -!!!" 라고 시원스레 소리를 지르는 상상도 하지만, 결코 입밖에 내 본 적은 없다. 동생의 울음소리, 신경질 소리, 뻗대는 소리로도 엄마 아빠가 충분히 힘겨워 못 견디시는데, 거기서 나까지 얹을 수는 없다.


이럴 때는 나의 안전을 위해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없는 사람처럼 있는 것이 상책이다. 상황의 해결을 위해 한 톨도 나를 보태지 않는 것이 도움이다. 나는 이 상황을 잘 풀어갈 자신이 없고, 섣불리 굴었다가 악화시킬 가능성만 크다고 생각하는, 좋게 말하면 조심스럽고 나쁘게 말하면 겁쟁이다. 더구나 지금은 온몸이 굳고 긴장하고 불안해서 제대로 생각이 돌아가질 않는다. 이런 상황은 매일같이 일어나지만, 그때마다 자연재해가 지나가듯 책상에서 몸을 웅크리고 그저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늘 기다린다. 견디고, 견디고, 또 견딘다. 이 집에서 나만 그런 것도 아니니까, 유난히 힘들다고 응석을 부릴 수는 없다.

여기서 내가 제일 안 힘든 사람이니까.


'비극이다.'


돌처럼 아무것도 안 느끼고 가만히 문제집을 보는 것에 성공한 줄 알았더니 아닌가보다.

문득 뇌리에 저 한 문장이 스치면서 오늘은 왠지 좀, 자꾸만, 슬퍼지는 것 같다.

'동생도 이해되고 엄마도 이해되고 아빠도 이해되는데.'

나는 훌쩍이듯 생각한다.


'동생은 짜증이 나고 화가 나는데 말은 못하겠고, 가족들 힘들게 하고 싶지 않은데 자기도 어쩔 수 없어보여. 엄마도 저렇게 소리지르면 엄마 마음이 아플텐데, 너무너무 지치고 피곤하고 견디기 힘들어서 그런 거야.아빠도 맨날 회사 갔다가 저녁 늦게 집에 들어오는데 제대로 쉴 수도 없고. 얼마나 힘들겠어. 짜증 한 번 잘 안 내는 아빠가 얼마나 참다참다 저러겠어.'


'서로 다 사랑하는데, 저렇게 화내고 나면 자기도 아플텐데, 사실은 서로한테 화가 난 게 아니라 도저히 못 견디겠어서 그러는 건데, 왜 아무도 나쁜 사람이 아닌데 우리는 이렇게 아프지? 슬프지?'


'이런 게 진짜 비극이구나. 이게 진짜 비극이야. 비극은 동화 속처럼 절대적으로 나쁜 사람이 있어서 한 쪽이 잘못해서 생기는 게 아니네.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생길 수 있는 게 비극이잖아. 빠져나갈 구멍은 참 도저히 안 보인다. 우리 가족은 왜 서로 사랑하면서도 이렇게 서로를 아프게 해야 하는 거지?'


'왜?'


'왜?'


답을 구하려는 질문이라기보다 막막함에 허공을 보며 슬픔을 되뇌이듯 그렇게 질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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