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히지 않게, 흐르지 않게
어떤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생생하게 남지만,
대부분의 기억은 조금씩 빛이 바래고 흐릿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잊히지 않게, 흐르지 않게,
나를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처음엔 일기였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그날 있었던 일을 적는 단순한 습관이었다.
별것 아닌 듯 보였지만,
한 줄 한 줄이 쌓여 나를 만들어갔다.
회사에서 힘들었던 날,
누군가의 말에 상처받은 날,
혹은 예상치 못한 칭찬을 들은 날.
그날의 감정과 상황을 기록하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글로 적으면 더 이상 내 안에만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기록이 나를 위로하는 것을 경험했다.
기록은 나의 분노를 흘려보내고,
슬픔을 붙잡아 의미로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덕분에 상처는 흔적으로 남되, 아물어갈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 다시 그 기록을 읽으면,
놀랍도록 새로운 감정을 느끼곤 했다.
그때는 분명 아프고 힘들었는데,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저 성장의 증거처럼 느껴졌다.
기록이 아니었다면 그 깨달음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다.
기록을 하다 보면 ‘나는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를 알게 된다.
무심히 흘려보낸 날들은 글로 남지 않는다.
반대로 나를 흔든 사건,
나를 울린 말, 나를 설레게 한 순간은 반드시 기록된다.
그렇게 기록이 모이면 나라는 사람의 지도가 그려진다.
내가 어디서 웃고, 어디서 멈추고, 어디서 다시 일어섰는지 그려진다.
그리고 그 지도는 앞으로의 길을 선택하는 데 중요한 나침반이 된다.
솔직히 말하면, 기록은 귀찮다.
바쁘다는 핑계로,
피곤하다는 이유로 몇 번이나 멈추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과거의 기록이 나를 다시 책상 앞으로 데려왔다.
몇 년 전 일기장을 우연히 펼쳐봤을 때였다.
나는 거기서 울고 웃던 나를 만났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아, 이래서 기록을 해야 하는구나”라는 것을.
기억은 배신하지만 기록은 배신하지 않는다.
머릿속에서 희미해진 추억도,
다짐도, 글로 적어두면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짧게라도 매일 적는다.
요즘은 기록의 방식도 다양하다.
손으로 쓰는 노트도 좋고,
휴대폰 메모장에 적는 것도 좋다.
중요한 건 방식이 아니라 ‘멈추어 기록하는 시간’ 그 자체이다.
기록은 내 삶의 속도를 조절하는 브레이크 같다.
무조건 달리기만 하던 날들에
잠시 멈추어 숨을 고르게 해 준다.
그리고 멈춘 자리에서 내가 누구였는지를 돌아보게 해 준다.
내가 기록을 시작하고 가장 크게 변한 점은 ‘자존감’이다.
타인의 시선에서만 살던 내가,
기록을 통해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게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예전엔 실패를 부끄러워했다.
남들보다 느린 나를 탓했다.
하지만 기록을 보니 실패의 과정에도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는 걸 알았다.
남과 비교해 흔들릴 때,
과거의 나를 기록한 글을 읽으면 힘이 난다.
“저때도 해냈잖아. 이번에도 괜찮아”라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다.
그 목소리가 나를 다시 일으킨다.
누군가는 기록이 그저 자기만족이라고 말한다.
맞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해본 사람은 안다.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내 중심을 잡는 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새벽에 눈을 뜨면 메모장을 연다.
어제의 나를 돌아보고 오늘의 다짐을 적는다.
그렇게 하루의 시작을 기록으로 연다.
언젠가 이 기록들이 나를 대신해 말해줄 것이다.
내가 어떤 길을 걸었고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기록은 삶을 특별하게 만든다.
아무것도 아닌 하루도 글로 적으면 무언가가 된다.
흐르는 시간을 붙잡아
내 삶의 일부로 만드는 작업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기록한다.
잊히지 않게, 흐르지 않게.
그리고 단단한 나를 만들기 위해, 조용히 펜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