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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길 위의 시간들16

아! 이스탄불

by 전지은


도시 가득한 기도 소리에 잠을 깬 새벽. 차이 한잔을 마시며 머리를 맑게 해 본다. 이정미 가이드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전날. 오늘 만나야 할 장소를 자세히 알려 주었다. 탁심(Taksim)에서 기차를 타고, 카바타스(Kabatas)에서 내려서, 갈아타고 슐탄메트(Sultanahmet)에서 하차하면 길 건너 광장이 보이고, 광장의 가운데쯤에 게르만 분수가 있는데 그 앞에서 만난다고. 약속 시간은 8시 30분. 숙소를 떠나 만남의 장소 까지는 30분이면 충분할 거라고 했지만 로마에서 기차를 타며 실수를 했던 기억이 있어, 여유 있게 떠나기로 했다. 근처에 가서 아침 요기를 하자며. 호텔 프런트에서 다시 한번 확인하고 길을 나선다. 기차를 갈아타는 것보다 내리막 길을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걷자는 의견. 그렇게 20여분 걸었을까, 카바타스 정류장이 보였다. 확인을 하고 기차에 오른다. 출발역이어서 자리는 넉넉하다. 이스탄불 구도심에 가까울수록 여행 잡지나 유튜브 채널에서 보았던 풍경들이 가까워 온다. 어디를 보아도 둥근 지붕의 모스크들.


기차에서 내려 길을 건너자 광장이 나왔다. 이른 시간이어서 카페들은 오픈 전이다. 만나는 장소를 확인하고 주위를 기웃거리다, 광장까지 의자를 내놓은 카페 하나를 찾았다. 커피와 차이와 빵을 사, 나무 의자에 앉는다. 여유 있게 아침을 즐기며 가이드를 기다린다. 그때 누군가 게르만 분수에서 물을 받는다. 커다란 물통이 여러 개. 식수로 사용 가능한가? 싶었다.

1900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이스탄불 방문을 기념해 세워졌다는 팔각정 분수. 가까이 가서 보니, 돔 내부의 황금 모자이크가 인상적이었다.


가이드를 만나 수신기를 받고 이어폰을 꽂으며 주위를 살펴보니, 우리와 비슷한 연배의 팀이 한 팀 더 있다. 내심 반가웠다. 가는 곳마다 우리 6명의 나이가 제일 많아서 부담스러웠던 것이 사실. 그룹의 속도를 못 맞추면 어쩌나, 혹 넘어질까 봐, 조심 또 조심. 가이드 옆에는 미남형의 젊은 튀르키예 청년이 한 명 서 있다. 튀르키예는 현지 가이드를 반드시 동행하게 돼 있단다. 로마와 피렌체에서도 그랬다. 현지 가이드는 늘 동행했다. 현지 가이드는 관광법으로 정해져 있어, 이렇게 동행을 하며, 자신들의 고용 기회도 충분히 보장받는단다. 서로 상부상조하며 여행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시스템.


2-3분 걸었을까, 히포드럼(Hippodrome)이 나온다. 로마시대에는 검투장으로, 비잔틴 시대에는 전차 경기장이었다. 이 광장에는 대표적인 조형물이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는 오벨리스크. 또 하나는 청동 기둥이다.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3등분 해서 가져왔다고 한다. 저 높고 무거운 것을 어떻게 운반해 왔을까? 대단하다는 생각. 또 하나 이 광장이 유명한 이유는 영화 ‘벤허’에 나오는 마차 경기장의 실제 모델이 된 곳이라서란다. 4만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고 40줄의 계단식 좌석이 있었다지만 지금은 모두 파괴되고 매립되어 넓은 광장이 되어 옛이야기만 전하고 있다. 벤허의 한 장면을 추억하며 인증샷 하나 남긴다.


채 5분도 걷지 않았는데, 커다란 모스크가 나온다. 블루 모스크, 세계에서 가장 아름 다운 모스크라는 평가를 받는 곳. 원명은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Sultan Ahmet Mosque). 1609년 착공, 7년의 공사 기간을 거쳐, 1616년에 완공되었다. 모스크 안 벽면이 온통 푸른빛의 도자기 타일을 붙여놓아, 말 그대로 푸른색의 사원이다. 중앙 대형돔을 중심으로 5개의 반돔이 둘러싸고 있다. 높은 첨탑을 이고 낯선 여행객과 기도자들을 반긴다.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는 복장을 검사한다. 미리 알았기에 긴바지를 입었고, 머리카락이 들어 나지 않는 모자를 썼지만 민소매여서 팔을 감출 수 있는 토시를 꼈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입장한다. 발 디딜 틈 없이 꽉 찬 모스크의 실내. 인파 속에서도 기도하는 공간이 따로 있다. 단상 가까운 곳에는 남자들이, 건물의 맨 뒤쪽 따로 마련된 공간에는 히잡을 쓴 여인들이 기도 중이다. 이 많은 인파들의 소음 속에서 의연하게 앉아 기도하는 그들에게서 경건함이 묻어난다. 어쩔 수 없는 여행객인 우리들은 푸르고 조화롭고 아름다운 벽 내부 모습을 열심히 찍는다.


이어 톱카프 궁전(Topkapi Palace)이다. 15-19 세기 사이, 오스만 시대의 술탄들이 이곳에 모여 생활하며 정치를 했던 궁정. 그들의 야심과 , 아름다운 여인들과 음모를 꾸몄던 탐관오리들의 생활관. 궁전 안에는 화려한 정자, 보석 가득 찬 보물 창고, 제국을 운영하던 궁전 등등. 가이드는 쉼 없이 설명을 이어간다. 무슨 보물이고, 어떤 단검이고, 누구의 필사체이고, 어떤 정원이며, 모자이크는 비잔틴 양식이고, 돔은 하늘과 가장 가깝게 맞닿아 신을 향한 인간의 마음을 표현했다 등등. 2시간은 금세 갔고 자유 시간이 조금 주어졌다. 젬마는 딸에게 줄 팔찌를, 나는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로 목걸이와 팔찌를 구매. 가이드가 하고 있었던 팔찌가 참 특이하고 예뻤던 것이 우리들의 구매욕을 자극했다. 우리 둘은 가이드 것과 거의 똑같은 것을 구매하며 참 예쁘다를 연발했다.


튀르키예가 가지고 있는 유적 중 보석만 팔아도 전 국민이 4년 동안 먹고살 수 있는 금액이란다. 입이 딱, 벌어진다. 그렇게 많은 보물이? 이 국가가 보유하고 있는 보물의 상징성이 어마 어마 한 것 같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보석 컬렉션을 가지고 있는 궁전 안의 역사박물관. 많은 창과 검, 눈이 휘둥그레지게 화려하거나 섬세한 보물들이 그야말로 끝도 없다. 긴 줄을 따라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가이드. 눈요기도 충분히 했고 여기서 찍은 사진만 100장이 넘는다. 오스만 제국의 찬란한 부귀영화가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싶다.


중동을 제패하고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하던 제국, 오스만 터키. 1450년 이후에야 이스탄불이라고 불린다. 로마제국 시절, 기원 후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제국의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콘스탄티노플이라 불렀다. 로마를 흡수할 수 있는 위치어야 하고, 기독교의 성지를 대신할 수 있는 곳이어야 했으며, 아시아와 유럽이 교차하는 지점, 실제로 콘스탄티노플은 지정학적으로 그런 위치에 있다. 제국의 거점이었던 콘스탄티노플은 그 자체가 박물관이었고, 유흥과 사치, 중세에 가장 명성이 높은 도시였다. ‘신이 가호하는 도시’ 콘스탄티노플. 1000년 이상 지켜왔던 왔던 왕국의 수도를 빼앗기며 동로마 제국은 멸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노플의 화려했던 과거는 이스탄불이라고 이름만 바뀌었을 뿐, 과거의 영화가 그대로 톱카프 궁전에 남아 있는 것 같다. 아직도 튀르키예 사람들은 콘스탄티노플이라 불리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도 곁들인다. 많은 전쟁과 세월이 지났음에도 함락된 도시의 유물들이 완전 파괴가 아닌, 유지의 상태를 이어가는 일도 경이롭다. 어쩌면 그 화려한 과거에 기대, 오늘의 튀르키예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관문에서 세계인들에게 볼거리를, 이야깃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계사 공부를 좀 더 심도 있게 해야 할 것 같다는 마음이 문득 든다.


다음 장소는 아야 소피아(Hagia Sophia Mosque). ‘성스러운 지혜’라는 의미. 튀르키예에서 가장 중요한 박물관이자 종교 시설. 웅장한 내부, 화려한 조명, 종교와 연관이 있는 이야기들. 성모 마리아와 알라가 함께 공존하는 곳. 모스크 안에서 만나는 예수. 예전엔 성당이었던 걸 지금은 모스크로 사용하면서 성화 위에 회칠을 해 천장이 얼룩덜룩하다. 본연의 모습 대로 복원 중이라고 하지만 현재는 모스크이니, 그 작업은 언제 끝날지, 끝이 나기는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완전히 지워버리지 않은 것 과 남아 있는 성당의 흔적들을 감사하며 종교의 공존이 함께, 오래가기를 기도한다. 박물관이었던 곳을 모스크로 환원하며 튀르키예 정부는 모슬림의 기도 시간에는 모자이크를 가리고 성화의 대부분을 커튼을 쳐서 가렸고 바닥에는 융단을 까는 조치를 취했다. 모스크의 규정에 따라 가이드는 함께 입장할 수 없고, 밖에서 설명을 들은 후 우리끼리 입장했다. 인파를 따라가며 보는 박물관. 이스탄불 최고의 건축물이자 이스탄불 구도심의 하이라이트. 비잔틴 제국의 최고의 걸작으로 불리는 곳. 비잔틴 제국 시절 그리스 정교회 교회로 만들어졌다가, 가톨릭 성당이 되었고, 이후 15세기 오스만 제국이 만들어지면서 무슬림의 모스크로 개조가 되었던 곳이며 박물관이기도 한 곳. 이슬람과 기독교가 공존하는 전 세계 유일무이한 건축물은 한 편의 영화와 같은 스토리가 있는 곳, 이라는 설명을 기억한다.


점심시간 시간이 지나고 오후에는 예레바탄 지하 궁전(Basilica Cistern). 콘스탄티노플 대제가 착공하였고, 6세기 비잔틴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완공한 거대한 물 저장소. 약 200여 년에 걸쳐 만들어진 지하 저수 시설. 도시의 안전한 수자원 확보를 위해 만들어진 이 건축물에는 약 8만 톤의 물 저장이 가능하단다. 336개의 대리석 기둥이 12줄, 28열로 약 5미터 간격으로 서 있다. 기둥의 모습들은 제각각이다. 로마 등 이웃 나라의 폐건물에서 하나씩 뜯어다가 잇고 붙여서 지은, 말하자면 건축물 재활용 공간이다. 그들의 재사용 방법과 실천에 감탄을 할 수밖에. 현재는 물 저장소로는 사용하지 않고, 관광객들을 위해 낮은 수위로 물이 채워져 관광용으로만 사용된다. 관람객들이 잘 지나갈 수 있도록 철 다리가 놓여 있고, 그 아래로 은은한 조명 시설이 이어져 있다. 빛은 푸르고, 초록이었다가, 황금색이었다가, 주홍색으로 바뀌는 등 그 신비스러움이 몽환적이다. 미끄러운 부분들이 많이 있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긴다. 다리 아래로 가득 떨어져 있는 동전들. 방문객들은 동전을 떨구며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충분히 더위를 식혀줄 지하 공간의 마지막 장소는 메두사의 머리가 거꾸로 있는 공간이다.


다음 장소는 신시가지에 위치한 돌마바흐체 궁전(Dolmabahce Palace). 기차를 타고 이동한다. 수신기를 통해 하차하라는 곳에서 내려 조금 걷자 궁전의 입구. 1843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에 의해 건축되게 되는데, 파리 유학 시절 베르사유궁을 보고, 충격을 받고 귀국 후 건축했단다. 착공 13년 만에 완공된 궁전. 1923 년부터는 튀르키예 대통령 궁으로 사용하였다. 튀르키예 수도가 앙카라로 이전된 후부터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어 박물관으로 사용한다. 작은 수목원과 정원이 예쁘고 술탄들이 살았던 주거 공간도 잘 정돈 돼 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궁전 내부는 촬영금지. 고급스러운 조화를 이룬 내부와 유물들을 사진에 담을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이며 파리의 베르사이유 궁전보다 100배 이상 아름답다는 칭송을 전해주는 가이드. 한국어 오디오를 들으며 관람할 수도 있다는데, 오디오를 따라 걷다 보면 2시간 반이상이 소요된단다. 궁전의 출구는 바다와 연결 돼 있다. 보스포러스 해안과 맞닿아 있는 하얀 대리석 문과 어우러지는 바다 정원. 웨딩사진 찍기에 최적이라는 곳. 그 앞에서 가이드와 헤어질 시간이다.


우리들의 숙소가 탁심에 있는 걸 아는 가이드가 기차역까지 동행해 준단다. 걸으며 잠시 개인사를 듣는다. 튀르키예 낭군을 만나 인형 같은 아이들을 낳고 한국인 여행객들에게 친절한 길라잡이가 되어 주는 젊은이. 그녀에게는 직업이겠지만 낯선 곳을 여행하는 우리들에게는 좋은 인문학 선생이었다. 티 내지 않고 우리의 보폭을 맞추어 주었던 그녀의 배려심. 어쩌면 작은 것일 수 있지만, 그녀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며 종일 고마웠다. 그녀는 투어 내내 웃었고 친절했다. 짜증 한번 안 내고 웃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 그게 비록 하루였다 할지라도 우리들에겐 인생여행의 한 부분 아닌가. 인증샷들을 다시 들추어 보며 그녀의 따뜻한 마음, 새삼 느끼는 저녁이다.


분홍색 노을이 지던 튀르키예의 그날. 찰랑거리던 바닷물결은 화려한 과거를 해안에 부려두고, 낮은 언덕들을 오르며 새 기지개를 켠다. ‘희망’이라는 이름은 모스크의 첨탑 끝에서 황금색 아우라를 두르고 푸른 하늘로 향한다. 잠시 다녀가는 여행객이지만 그 옛날의 명성을 함께 그리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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