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애도, 남자의 애도
배우자를 잃었을 때 남성과 여성, 어느 쪽이 더 힘들까요?
그 고통과 슬픔을 객관적인 수치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저는 남성이 더 힘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성은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고, 감정을 처리하는데 익숙하고, 남성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남성들은 적절한 위로를 받지 못하거나, 받지 않고, 주로 혼자 그것을 삭이고 견뎌 나가야 합니다. 사회 통념, 관습, 관행이 그렇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여성들이 더욱 힘든 부분도 물론 있습니다. 슬픔을 삭이거나 견디는 것은 여성이 남성보다 나을 수도 있겠지만, 살아간다는 현실적인 문제는 여성이 훨씬 더 힘든 경우도 많겠지요. 아무리 양성 평등시대라 해도, 남성은 가장이라는 통념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여성이 배우자를 잃었을 경우, 가장으로서 가정을 이끌어야 하는 부담, 대표적으로 경제적 문제가 심각할 수 있습니다. 독립하지 못한 자녀가 있는 경우는 더욱 힘들겠지요. 그래서 주변에서 배우자를 잃고도 슬픔에 잠기기 보다는 씩씩하게 이겨 나가는 모습을 보이는 여성들을 많이 봅니다. 그들이 겉으로 나타내 보이는 씩씩함 뒤에 숨겨진 그 아픔은 누가 알겠습니까?
아무튼 감정을 다스리는 것은 여성보다는 남성이 더욱 서툴다는 생각입니다.
제 아내는 수목장을 유언했고, 그에 따라 용인 모 수목장 공원에 안치했습니다. 작은 나무 한 그루에 한 평도 안 되는 손바닥만한 공간이 유택의 전부입니다. 그곳에 앉아서 아내와 말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 그나마 조금은 위로가 됩니다.
거기 있다 보면 꽤 흥미로운 사실이 눈에 띕니다.
남자들은 주로 혼자 온다는 것입니다.
반면 여성들은 친지들과 함께, 자녀들과 함께, 또는 누구든 함께 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혼자 가서 때로는 그녀가 그렇게 좋아했던 커피 한 잔 놓고 하염없이 앉아 있다 오곤 했습니다.
어느 날 햇살 따뜻한 봄날 그렇게 앉아 있는데, 멀리 한 쪽에 또 다른 남자 한 사람이 보였습니다. 평일이라 그 사람과 나 외에는 주변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새 소리, 벌레 소리, 바람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리고 짐승처럼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남자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아내 이름을 크게 외쳐 부른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한번 아내 이름을 부르고는 터덜터덜 걸어 내려갔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얼마나 사무치는 그리움이었을까요?
그 아픔과 슬픔을 혼자 삭이다가, 여기서, 아내가 묻힌 곳에 와서 어쩌면 먼저 가버린데 대한 원망이 담긴 한번의 울부짖음으로 아내 이름을 목놓아 부른 것입니다. 나는 그 마음, 그 슬픔, 그 아픔을 고스란히 같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아내 이름을 소리쳐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아내가 생의 마지막 한 달을 보냈던 호스피스병원에서는 매년 추모 또는 자조 모임을 개최합니다.
거기서 생을 마친 사람의 유족들을 초청해서 힐링의 시간을 갖는 것이지요. 아내가 하늘나라로 간 다음 해 저도 초청장을 받았습니다. 고인을 추모하는 시간, 명상의 시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었고, 다과와 선물까지 준비돼 있는, 생각보다 알찬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여성이고 남자는 딱 저 혼자 뿐이었습니다. 주최측에서도 남자 참석자는 제가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남자들은 아내를 잃어도 슬퍼하지 않는 것일까요?
저만 유난스레 슬프다고 울고 다닌 것일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수목장 공원에서 아내 이름을 목놓아 부르던 그 남성도 있지 않습니까? 다만 이런 추모, 또는 자조 모임에 나오지 않을 뿐인 것이지요.
그것은 남성과 여성의 감정을 다루는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한국이나 미국이나 아니면 그 어떤 다른 나라든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나온 책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오니까요.
보통 남자들은 모든 사안을 이성적으로, 여성들은 감성적으로 대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책을 잠깐 인용하면,
“남성의 애도는 여성과 다릅니다. 그들은 종종 사적이고 상징적인 의식에 몰두하는 경향을 보이며 조용하고 외롭게 문상을 합니다. 그들은 애도에 인지적 방식으로 접근하려는 경향이 있어 차갑고 무심하다며 오해를 사곤 합니다. 그들은 혹독한 감정을 겪는 중이라도 그 상실감의 깊이를 가까운 사람에게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남성들은 지지 자원을 찾기보다 ‘참고 견디는’ 편입니다. 하지만 일단 지지 네트워크를 찾으면, 대다수는 다른 남성과 강한 유대감을 갖고 감정을 표현할 안전한 장소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대부분 남성들은 배우자의 상실에도 혼자 끙끙 앓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저는 인성 검사에서 감성적인 측면이 강하다고 나왔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MBTI에서 뭐라고 나왔는데 기억은 할 수 없고, 아무튼 감성적인 측면에서 여성과 가까운 면이 많아서 또래 남성들보다는 여성과 더 잘 어울린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아내의 상실에 의한 애도 과정이 그렇게 힘들었고, 유달리 슬픔을 많이 표현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다른 남성들이 저처럼 슬픔을 많이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슬프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수많은 남성들이 슬픔과 고통 속에서 홀로 몸부림치고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하겠지요.
다시 앞의 책에서 인용해보자면,
“여성들은 주로 대화하고 탐색할 상대를 구하는 반면, 남성은 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일반적으로 남성들은 ‘감정을 느끼고 이를 표현’하기 전에 ‘문제를 풀고 생각’하려 합니다. 애도에 직면했을 때에도 남성들은 감정을 탐색하기 전에 어떻게 가족을 부양하고 자리를 잡을지 찾아내려고 합니다.
많은 남성이 자신에게는 가족을 돌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믿음은 부양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 감정을 내보이기 더 어렵게 만듭니다. 많은 경우, 죄책감으로 인해 이것은 더 복잡해집니다. 가정의 ‘보호자’로서, 가까운 가족이 사망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거나 자신이 실패했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문제를 대하게 된 남자들이 가장 흔하게 보이는 반응은 행동으로 옮기거나 해답을 찾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도 제가 아내를 더 잘 돌보지 못하고, 더 일찍 발병 사실을 알아낼 수 있도록 신경을 쓰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많이 괴로웠습니다. 한 마디로 아내가 그렇게 떠나버린 것은 제 책임이라는 것이었지요. 내가 남편으로서 사회적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탓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것이 암이 되었을 것이란 자책이 나를 괴롭게 했습니다.
암 진단을 받은 후에도 내가 그녀를 잘 돌보지 못했던 것 같다는 자책, 혹시 보다 일찍 대안 치료를 모색했더라면 더 오래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자책, 차라리 내가 24시간 간병하지 않고 간병인을 썼더라면 그녀가 더 편안하지 않았을까 하는 자책…
한 마디로 했던 모든 행동을 후회하고, 하지 않았던 모든 행동을 후회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이렇게 위로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또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후회할 것이라고…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맞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후회하고 자책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튼 내 탓이라는 죄책감은, 남녀 구별 없이 유족이라면 모두 느낄 수는 있겠지만, 가족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인식이 있는 남자들에게서 특히 더 심한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그러나 이런 모든 사실,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슬픔은, 남녀 불문하고, ‘나의 슬픔’이 가장 크다고 해야 하겠지요.
애도하는데 있어서 남녀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은 단지 표면적으로 그렇게 보일 뿐인 것 아니겠습니까…?
슬픔이란 주관적인 감정이니까요.
여성과 남성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