했던 모든 것, 하지 않았던 모든 것을 후회한다
뼈저린 후회와 자책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 슬픔을 더욱 크고 깊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후회와 자책감입니다.
흔히 “했던 모든 일을 후회하고, 하지 않았던 모든 것을 후회한다.”고 합니다.
사실 의사가 아닌, 보통 사람으로서, 아니 어쩌면 의사라 할지라도, 사랑하는 이가 죽어가는 동안에 뼈저리게 느끼는 것은 무력감입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그저 열심히 시중 드는 것 외에는…
밥 먹이고, 대소변 받아내고, 욕창 생기지 않도록 이리저리 돌려 눕히고, 따뜻하게 대화해주고…
하지만 이런 시중 듦이 그 사람의 병을 낫게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릴없이 둘러보면 의료진은 모두 컴퓨터 화면에 머리를 박고 있습니다. 때때로 간호사가 와서 투약을 하거나 주사를 놓는 것 외에는 그다지 분주하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답답한 하루하루가 지나고, 환자는 나날이 쇠약해가면서 죽음으로 가까이 가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일 없이 그저 옆에서 시중이나 드는 사람으로서는 미칠 노릇입니다.
‘보호자’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의료진이 제시하는 물음에 답변 또는 선택하는 것 뿐입니다. 그것도 대부분 이미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냥 절차로서 동의하는 것 뿐이지요.
마지막 선택은 퇴원해서 호스피스 병원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아니 한 가지 선택할 수는 있습니다. 옮겨갈 곳을 선택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갈 곳이 정해지고, 때가 되어 병실을 떠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죽으러 가는 것’입니다. 피눈물이 나는 일입니다.
저의 경우, 무엇이라도 해봐야 하겠다는 절박한 마음에 발버둥쳐 봤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말기 암환자가 다시 일어났다는 어떤 병원, 대체 의학, 기적의 약이나 음식 레시피… 이런 것이 모두 거짓이거나 소용이 없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그런 기적이 통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단 일분도 간병인을 쓰지 않고, 직접 수발을 다하면서 간병했습니다. 그렇게 병원 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 하나는 병명이 같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똑 같은 증세, 똑 같은 과정을 겪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6인실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 병실에는 여성 폐암 환자만 모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증세와 병의 진행이 달랐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생각해보면, 발병한 부위가 모두 다르고 사람의 체질도 모두 다르니, 병의 진행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기적적으로 나았다고 해서, 그 기적이 모두에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아니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시간은 흐르고, 의료진이 예측한 남은 시간이 지나고, 거의 정확하게 그 시점에 임종을 맞게 됩니다.
그렇게 부여잡고 함께 여기까지 왔지만, 이제 마지막 순간, 아무리 굳게 손을 잡아도 더 이상 같이 갈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사랑하는 사람은 떠납니다.
왜 좀더 일찍 발병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돌이켜보면 그런 증상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신호를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랑한다면서 그렇게 그 사람의 건강에 무심했던 스스로에게 너무 화가 납니다.
확진을 받고 나서도, 막연히 나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의료진을 믿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대체요법이나 기적의 약물을 찾았어야 했습니다. 설악산 쪽에 모 박사가 운영하는 그런 자연치유를 선택했으면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너무나 괴롭습니다.
어차피 이렇게 가는 것을, 왜 그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를 했을까? 자연요법을 했다면 좀더 편하고, 나을 수 있지 않았을까?
혈관에 주사를 심고, 머리에 주사를 심고…
어차피 이렇게 가는 것을, 왜 그런 고통을 주었을까?
그동안 병원에서 했던 모든 것들, 그것이 모두 헛된 것이었고, 그 사람에게 고통만 주었다는 생각에 미칠 듯이 괴롭습니다.
아, 갖가지 자연치유, 대체요법, 기적의 약물, 암을 죽이는 음식들… 제대로 해주지 못했던 것들이 너무나 아쉽고, 죄스럽습니다.
모두가 나 때문입니다. 내가 좀더 노력했으면 살릴 수 있었습니다.
했던 모든 일이 후회스럽고, 하지 않았던 모든 일이 아쉽습니다. 그랬다면, 그러지 않았다면…
장례 절차가 모두 끝나고 조문객과 가족 친지들까지 모두 떠나고 나면, 혼자 그녀가 없는 삶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진짜 슬픔’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렇게 온전히 슬픔과 마주하게 되었을 때, 이런 후회와 죄책감이 엄습하게 되는 것이지요.
후회, 죄책감, 스스로에 대한 분노…
‘죽음’은 절대 돌이킬 수 없는 일이기에, 이 모든 것은 더욱 뼈아픈 고통이 되어 온 몸과 마음을 찌릅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너는 정말 최선을 다 했어.”
이런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병원에서 의료진은 물론 다른 환자나 환자 가족들은 그 사람에게 “세상에 없는 남편을 둔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간호사들도 “어머님은 참 행복하게 가셨어요.”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위로의 말이었겠지요.
그러나 그런 말들이 후회와 죄책감을 덜어주지는 못합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책망하면서 후회로 몸부림치면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옅어져 가는 것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옅어져 갈 지언정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알아야 합니다.
가지 않았던 길을 갔다고 해서 다른 결과가 있었을 것이란 보장은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만약 항암을 하지 않고 대체요법이나 자연치유를 택했다가 좋지 않은 결과를 맞았다면 똑같이 항암을 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할 테이니까요.
대부분의 경우, 선택은 불가피한 것이었고, 다른 선택을 했더라도 다른 결과는 얻지 못했을 것이 거의 분명합니다. 불가항력이라는 것이지요. 운명론자처럼 보이겠지만, 거부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일이 있는 법입니다.
후회와 죄책감, 스스로를 향한 분노… 결국 그것도 그냥 견디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굳이 그 어떤 행위에 당위성을 부여하려고 노력할 것도 없고, 변명거리를 생각해 낼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 봤자 자기 합리화에 그칠 뿐이니까요. 어차피 답은 없고, 답이 있다고 한들 돌이킬 수도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결정적인 잘못을 저질렀을 수도 있고, 결정적으로 판단을 잘못하는 경우도 있겠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예컨대 암이나 다른 불치의 병인 경우, 병의 진행에 따라 자연스럽게 쇠약해지고, 몸이 망가지고, 그렇게 목숨이 다해갑니다.
자책과 후회, 피할 수는 없지만, 그것도 그냥 애도 과정에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과정이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