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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아무것도 되지 못한 이름

by 잎새달 이레

유난히도 흐렸습니다.
햇빛은 하루 종일 숨을 죽이고,
하늘은 낮게 깔려 마치 오래된 기억을 덮어두려는 듯 회색을 흘렸습니다.


그날의 공기는 묘하게 눅눅했고,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오래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조용히 깨어나는 소리를 나는 들었습니다.


낯선 번호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잠시 주저하다가,
익숙하면서도 어쩐지 멀게만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첫 직장에서 함께 젊음을 시작했던 사람,
같은 시간,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서투른 걸음으로 꿈을 밟던 그 시절의 동료였습니다.


그의 안부는 밝고 단정했습니다.

말끝마다 단단히 다져진 시간이 느껴졌습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
무엇이 되어 있는지,
내가 그토록 달려온 길이 정말 길이었는지 묻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는,

뭐라도 될 줄 알았습니다.
아니, 당연히 그럴 거라 믿었습니다.


남들보다 조금 빠른 시작이
내게 특별한 의미를 줄 거라고,
세상은 반드시 노력에 대가를 안겨줄 거라고
어린 나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빛나는 줄 알았습니다.
앞날은 언제나 환할 거라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지금의 나를 얼마나 무겁게 만드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는 오랫동안 창밖의 흐린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구름은 낮고, 바람은 길을 잃은 것처럼 천천히 흘렀습니다.


그 풍경이 내 마음 같아 서글펐지만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습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그림처럼,
마치 내가 지금 서 있어야 할 자리처럼.


나는 무엇이 되었을까요.

무엇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
나는 아직도 되어가는 중일까요.


어쩌면
평생 그렇게 되어가는 중으로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어느 날은 길을 잃고,
어느 날은 다시 길을 찾으며.


그러다 언젠가,
이 흐린 날의 기억을 떠올리겠지요.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았던 이 시간조차
내가 되어가는 과정의 한 조각이었다는 것을,
그때서야 나는 알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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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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