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어느 날, 세영이와 함께
‘오부세’Obuse를 여행지로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어찌보면 이유랄 것도 없다. 고향 1년 후배(고영목 건축사)의 아내분의 일본 고향마을이었고, 달리 가고싶은 곳이 있지도 않은 상황에서 선택지는 그냥 ‘오.부.세’였다. 넉넉히 5박6일을 꽉 채워 이곳에서 휴가를 다 쓸 생각으로 떠난 여행. KTX 2시간, 비행기 2시간, 기차를 3번(3시간 반) 갈아타고서야 도착할 수 있는 곳, 일본의 지붕으로 불리는 나가노현의 한적하지만 붐비는? 시골마을 ‘오부세’이다.
숙소는 오부세역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방베르'Vent Vert. ‘녹색바람’이라는 뜻으로 주인장의 커피맛 만큼이나 감각적인 작명솜씨가 돋보인다.(이유는 이 글을 읽다보면 차차 알게될 것 같다) 나는 도착 하루만에 완벽하게 ‘방베르'Vent Vert(녹색바람)의 평범한 식객이 되었다. 햇빛이 잘 드는 1층 테라스엔 생기 넘치는 꽃화분이 과하지 않게 놓여져 있고 지나는 이들도 자연스럽게 가까이 다가가 즐기는 모습은 이곳 ‘바람결’만큼이나 부드럽고 여유롭다.
2~3개의 턱 낮은 계단을 올라 오래된 나무바닥(아마 밤나무Chestnut로 만들어진 듯하다. 오부세는 밤Chestnut 주산지이다)의 1층 테라스를 성큼 걸어 지나면 ‘방베르’ 안으로 들어가는 미닫이문을 만나게 된다. 잘 관리된 듯 ‘스르르’ 옆으로 밀고 들어간 1층 실내는 프랑스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으로 운영되고 있다.
부모로 보이는 노부부가 아침과 오전시간을 맡아 운영하고, 오후부터 밤 늦은 시간을 두 아들이 챙긴다. 노부부의 정겨운 영어솜씨와 다르게 아들의 영어는 다소 서툰 느낌이지만, 이들 가족의 팀워크는 노련하다. 밤나무를 깍아 만든 객실 열쇠고리를 받아들고 역시 나무 계단을 올라 나무 바닥의 2층 객실로 올라서면 4개의 게스트하우스가 나온다. 마주보고 있는 방이 2개씩. 객실 문짝은 역시 나무소재의 미닫이문. 남쪽으로 향해 있는 건물의 2층 네 귀퉁이에 방을 배치했다. 방마다 2개의 큰 창문이 있고, 서로 90도로 면하고 있는 창문을 열면 나가노의 산바람이 고스란히 방안을 휘돈다. 이 때부터 오부세의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
요상한 날씨다. 섬나라라서 그럴까? 일본의 관서지방 날씨는 이채롭다. 저녁이 되면 구름이 마을로 스며 들고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금세 비가 흩뿌린다. 5월 하순 한국은 때이른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이곳의 저녁공기는 상쾌한 서늘함이다. 2층 창문을 열어 컴컴한 마을 거리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씨앗문장을 발견한' 작가가 된다. 일상의 번잡함이 비워진 자리엔 바람부는 오부세의 밤(Night&Chestnut)기운이 차오른다. 여정의 피로로 정신잃고 잠든 사이, 반전은 다음날 아침에 드라마틱하게 찾아온다는 걸 첫날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여행지에서의 아침 달림(Running)은 '일상의 성실함'과 '여행지의 나태함’ 사이에 완벽한 균형점을 찾아 준다. 지난 여름 ‘에든버러’에서도 그랬고, 런던 탬즈강변과 공원을 달린 것도 정말 좋았다. 그냥 ‘좋았다’라고 표현하기엔 한참 부족하다. 아침 7시 운동복을 챙겨 입고 ‘방베르’Vent Vert를 나서면 ‘오부세마을’은 금세 ‘우리 동네’가 된 듯 가까워진다. 새소리와 햇살,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녹음, 들꽃, 바람, 이 모든 게 한마디로 ‘오부세’이다.
아침에 달리는 거리는 보통 5~8km 정도 된다. 오늘 둘러볼 코스를 미리 답사해 보거나, 그냥 마을 이곳 저곳을 최대한 긴 거리로 구석 구석 누비며 달리기도 한다. 아침에 분주한 현지인들(정원을 손질하는 주민, 학교가는 아이를 배웅나온 엄마들, 등교하는 학생들)과 가벼운 인사말도 건내기도 하고, 스마트폰으로 이국적인 곳에서의 달림을 기념삼아 촬영하기도 한다. 아침마다 텅빈 오부세를 뛰어 다닌 덕분에 이제는 눈을 감고도 머릿속에 마을 지도가 그려진다. 개인적으로 기념품을 사거나 관광명소를 다니는 것 못지 않게, 여행지를 '공간적인 감각'으로 기억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즐거움으로 삼는 편이다.
나는 이 글을 일본 내에서도 꽤 유명하다는 ‘오부세 공립도서관’(http://machitoshoterrasow.com/index.html) 안 햇빛 잘드는 창가 자리에 딸아이와 마주 앉아 쓰고 있다. 여행지에서 심심함을 느끼는 것이 진짜 휴가를 ‘누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굳이 어딜 더 가보고 싶지도 않고 로컬주민들이 주말을 보내는 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내겐 ‘진짜 쉼’이다. 옆 테이블을 둘러보니, 초등학생 운동복 차림의 아이도 보이고, 중고등학생, 어린 아이와 함께 온 부모들도 있다.
딸아이는 ‘심심해 미치겠다’며 초등학교 근처 문구점에서 작은 스케치북과 연필, 연필깍이, 줄자를 사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에겐 이곳이 ‘오부세’도 ‘청주’도 그 어느 곳도 아닌 것 같다. 아마도 자신의 머릿속을 여행하며 스케치북에 그려진 애니메이션의 남자주인공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연필 잡은 손이 섬세하게 떨리며 스케치북 위를 미끌어 진다. 난 평생 이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절대 잊고 싶지 않다.
하루는 일본까지 왔으니 온센(온천의 일본식 발음)을 가봐야지 싶어, 기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유다나카 시부온센을 가볼 생각으로 ‘녹색바람’을 나섰다. 주말이니 서두르는게 좋겠다 싶어 발길을 재촉하는데, 아침 일찍부터 마을주민들이 캠핑의자와 돗자리를 가지고 어디론가 바삐 걷는다. 호기심이 동해 그들을 따라 가니 초등학교에선 운동회가 한창 이었다. ‘와우!’~ 운동장을 둘러싼 주민들의 여유로운 몸짓과 시선 사이로 아이들이 참여하는 운동경기가 일사분란하게 착착 진행된다.(역시 일본이구나. 잘 훈련된 듯 아이들은 경기에 임했고, 대회운영도 빈틈 없이 매끄러워 보였다) 한 시간 남짓 운동회를 지켜보다가 유다나카 시부 온센으로 향하는 특급열차 ‘유게무라논비리호’에 몸을 실었다.
오부세는 원래 겨울시즌 스키어들에게 인기 있는 곳이다. 근처 유다나카 시부온센 쪽에는 나가노 산악지대에 펼쳐진 멋진 스키슬로프가 겨울 스키어를 불러 들인다. 당연히 유다나카 시부온센은 이들에게 더 없이 좋은 피로회복제가 될 것임에 틀림 없다. 겨울이 아니라면 ‘오부세’를 찾기 좋은 시기는 벗꽃이 한창인 4월이다. 처음 후배가 권했던 시기도 이 즈음이었다. 벗꽃이 좋은 건 4년전 구마모토현 기쿠치시를 찾았을 때도 충분히 느꼈기에, 또 우리나라 벗꽃 명소도 훌륭하기에 4월이 아니어도 내겐 아쉽지 않았다. 오히려 관광객이 한창 붐비는 4월을 피해 5월 후반에 찾은 오부세는 방문객을 더 간절하게 바라봐 준다.
여행지에서 먹을거리는 여행의 만족도를 좌우하기도 한다. 심지어 ‘목숨?’처럼 여기는 경우도 있다. 맛있는 현지 음식을 찾아다니면서 삼시세끼를 채우는 것도 좋다. 물론 아침식사로 호텔 조식이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지난 여름 영국에서 처음 ‘에어비앤비’로 숙소를 잡고 지낼 때처럼, 가능한 현지에서 식재료를 사다가 숙소에서 먹는 게 편하고 좋다.(물론 외식보다 훨씬 저렴하다) 아침은 숙소에서 나오는 조식, 점심은 돌아다니면서 간단하게, 저녁은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마트나 시장에 들러 지역색이 담뿍 담겨진 음식과 식재료를 사다가 맥주와 함께 먹으면, 정말 ‘여행은 이 맛이지~’를 외칠 수밖에 없다.
‘오부세역에서 시내를 통과해 동쪽 끝, 숙소에서 오부세중학교를 끼고 돌아 동쪽으로 걸어서 15분 거리, 오부세 꽃시장Flower Market(이곳을 제대로 못본 건 아쉬움으로 남을 것 같다) 옆에 꽤 큰 규모의 ‘츠루야'TSURUYA라는 대형마트가 있다. 편의점을 찾아 해메다 우연히 발견한 대형마트(아쉽게도 오부세에는 전통시장이 없다)는 오부세에 머무는 기간 내내 하루에 한 번은 꼭 들르는 ‘참새방앗간’이 되었다. 이렇게 현지 주민과 함께 쇼핑하고, 문구점에 들르고, 아침에 조깅하고, 마을 행사(운동회)에 참여하는 경험들이 더 없이 즐겁고 값진 추억이 된다.
<먹을거리 쇼핑은 멈추기 어렵다_계속 먹는다>
여행을 떠나기 전 설렘이 여행보다 더 좋다고도 말한다. 내가 살아 오면서 떠났던 대부분의 여행들도 그랬다. 하지만, ‘녹색바람이 부는 오부세'는 예외로 두고 싶다. 앞으로 남아 있는 2박 3일의 일정은 오부세를 떠나야 하는 아쉬움을 삭히는 시간이 될 것 같다. 더 가까이에서 오부세 아이들과 눈을 맞추고 싶고, 더 많은 질문들을 수줍지만 유쾌한 아이들 표정에 건내고 싶다. 오부세역 인포메이션센터에 있는 노인의 친절한 말씨에도 감사하고 싶고, 거리에서 스친 수 많은 꽃들에게도 내 발걸음 소리를 기억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흔쾌히 끼 많은 여행객에게 사진촬영을 허락해 준 오부세 아이들과 중학생들에게도 ‘고마웠다’고 건낼 것이다.
‘오부세'는 참 조화로운 공간이다. '청주 오송'만한 크기의 마을에 ‘관광객도 쉽게 찾을 수 있는 문턱 낮은 멋스러운 도서관’과 ‘일요일까지 프로그램이 넘치는 주민문화센터’가 좋아보인다고 딸아이는 말한다. 지역상권을 고려한 듯 시내권에선 ‘편의점’ 찾기가 쉽지 않다.(물론 외곽 주거지역엔 편의점이 많다) 심각한 고령화로 사회문제가 된 지 오래인 일본이지만, 이곳 시골마을 오부세에는 어린 아이들의 통통 튀는 웃음소리가 활기 넘치는 지역상권과 함께 1년 내내 넘쳐 흐른다.
이토록 조화로운 공간인 ‘오부세’에서, 여행 첫날 느꼈던 바람Wind은 원래 녹색Green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가노의 산악에서 불어온 신령스런 바람이 오부세의 활기찬 푸른 기운을 만나 녹색의 옷이 입혀진 것은 아닐까? 이제 내 허파에도 그 ‘녹색바람’Vent Vert이 잔뜩 들었다. 여행이 채 끝나기 전인데 다음 여행이 시작된 듯 한것도 이 ‘방베르’Vent Vert ‘녹색바람’ 탓으로 돌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