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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할수록 내면은 단단해진다.

by 황금지기

내면이 단단한 사람은 등락하는 파동처럼 유연하고, 원칙의 지킴 너머의 또 다른 자신을 만나면서 더욱 단단해진다. 투자자를 변화시킬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므로 내려놓음으로써 시작점에 서야 한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인정하는 만큼 시장의 흐름에 흔들리지 않고 평범한 일상처럼 현상을 인정하면서 따를 수 있는 법이다. 꿈꾸는 수익의 해답은 지속 즉 반복에 있으며, 기다릴 줄 안다는 건 꾸준하다는 증거다. 속도보다는 꾸준한 노력으로 성장해야 하며 모든 배움은 ‘자기감정을 통제하기 위해서’로 향해야 한다.




‘아사나(요가 동작)를 완성하려면 유연성뿐 아니라 힘이 있어야 했다. 요가에서 허리를 뒤로 젖힐 수 있게 하는 건 유연함이 아니라 단단함이었다. 내 인생을 유연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건 내면의 단단함인 것처럼.’

브런치스토리 어느 작가의 글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그렇다. 투자에서 손실에 연연하지 않고, 편향과의 일정한 간격을 유연하게 유지하면서 등락을 거듭할 수 있게 하는 건 내면의 단단함이다. 투자자에게 단단함이 없다면 유연함도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내면이 단단한 사람은 등락하는 파동처럼 유연할 수 있고, 유연할수록 내면은 더욱 단단해진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해진다는 말처럼, 원하는 결과만을 좇는 게, 결과에 잔뜩 기대치를 품는 게 아니라 과정을 지키는 과정에서 행복을 찾아가야 한다. 극한의 감성노동에 시달려야 하는 투자자에게 있어 과정의 고단함을 웃음으로 승화하기 위해서 가장 소중한 건 당연히 지속해 나갈 수 있는 건강이다. 건강을 위한 행동들 역시 과정에서 즐거움을 찾기 전에는 지속하기 어렵기에 내면의 단단함은 꾸준함이 주는 위대한 선물이다.




완벽은 멀리 있지 않고 언제나 현재에 있다.

<토니 로빈스>

완벽한 때를 기다리는 건 허상에 집착하는 것이나 진배없기에 시작이 반이다. 초심을 잃지 않으면서 그저 행하는 오늘이 완벽한 실상이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 올바른 습관을 만들지 못하게 한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면서 실천하다 보면, 그저 그렇게 현재를 살다 보면 새로움에, 습관에 닿게 된다. 거듭해서 실패했음에도 시장에 머무르는 이유를 누군가 물어오면 가슴속에서 솟아 나오려고 하는 그것을 살아보고 싶다고 그것이 대답한다. 그것은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그것은 원칙의 지킴 그 너머의 또 다른 자신을 만나는 것이다. 거듭되는 실패에도 계속 쌓아가는 걸 반복하는 이유는 그동안 투자했던 시간이 반복을 수월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병아리 눈물만큼이라도 조금씩 성장하는 자신이 대견하기 때문이다.




“춤추는 별을 낳기 위해서는 네 안에 혼돈이 있어야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모든 사람은 각자의 세계다. 비눗방울처럼 세상을 떠다니다 터져버리는 하나의 세계다. 인간은 하나의 세계로 존재하는 동안 원인과 조건에 따라 만났다 헤어지기를, 깊어졌다 얕아지기를 반복할 뿐이기에 생은 태생적으로 공허할 수밖에 없다. 추운 날도 일하다 보면 춥지 않듯이, 투자자는 시장의 혼돈을 선택했기에 원칙을 지키는 과정에서 태생적 공허가 채워지면서 각자의 별이 된다. 무언가에 집중하면 공허를 느끼지 못하듯 원칙에 집중하는 과정에서 채워진 자신을 만날 것이다. 각자의 세계로 이루어진 세상이기에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사람은 더더욱 변하지 않지만, 변화의 여지는 사람에게만 있다. 변하지 않는 사람이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 ‘내가 죽으면 세상도 끝장이 난다.’ 보이고 느껴지는 지금 세상은 자신의 마음에 비친 것이다. 결국 각자에게 있어 세상의 중심은 각자이고, 각자의 마음에 세상의 근원을 담고 있기에 마음이 바뀌면 세상이 바뀌게 된다. 마찬가지로 파동도 그와 같다. 그려지는 파동은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 마음이 변하면 파동도 변한다. 투자자를 변화시킬 사람은 오직 투자자 자신뿐이다. 원칙을 지켜가는 과정에서 편안함이 느껴지도록 치열하게 변해야 하고, 투자자라면 원칙을 지키는 것에 대한 직업적 소명 의식이 있어야 한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모험은 당신이 꿈꾸던 삶을 사는 것이다.”

<오프라 윈프리>

자기 말과 행동의 내면을 볼 수 있는 게 안목이라면, 자기 말을 들을 줄 알고 가슴 속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걸 행할 줄 아는 게 지혜가 아닐까? 지혜가 더해질수록 안목은 깊어지게 되는 선순환, 그렇게 성장하면서 자기 말과 행동을 책임지는 게 성숙해진다는 의미다. 책임지기 위해선 감정의 많은 부분을 비워내야 하므로 성숙해진다는 건 비우는 법을 알아간다는 것이다. 비우는 법을 알아야 채우는 법을 알게 되고 이것을 알아야 삶도, 투자도 단단해진다. 손실을 마음에서 비워내는 법을 알아야 이익을 채워가는 법도 알게 된다. 내려놓음은 끝점이 아니라 새로움으로 가는 시작점이다. 꿈꾸는 삶을 살면서 성숙해지기를 소망하며 「라이언 킹」의 명대사를 몇 번이고 되씹어 본다. ‘과거는 상관없어. 아프기는 하겠지. 하지만 둘 중 하나야. 도망치든가, 극복하던가.‘




조주 스님이 남전 화상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 남전 화상이 답했다. “평상심이 도이다.” (중략) “도는 아는 데도 없고 모르는 데에도 없다. 안다는 건 망령이며, 없다는 건 무기(無記)라. 헤아리지 않는 도에 이르면 마치 허공과 같아서 확연하게 확 트이고 넓어진다. 무엇 때문에 굳이 시비할 것인가?”

<무문관 제19칙 평상시도(平常是道)>

남전 화상은 무문관 34칙에서 지불시도(智不是道) 즉 앎은 도가 아니라 했고, 19칙에서는 평상시도가 도라고 했다. 결국 실천하지 않는 앎은 아는 것에 그칠 뿐이니 변화의 쓸모가 되지 못하며, 알아가면서 지속해서 실천하는 마음이, 그냥 하는 그 평상심이 도인 것이다. 남을 흉내 내거나, 남에게 영향받지 않고 스스로 주인이 되는 마음이 중요하다. 사람이 잘하려다 보면 힘이 들어가게 되고, 의식하게 되면서 일이 꼬이기 십상이다. 피아노를 의식적으로 잘 치려는 사람보다 피아노와 하나 되어 몰입하여 사람이 나은 법이다. 그 몰입하는 마음이, 시장에서는 흐름에 흔들리지 않고 평범한 일상처럼 따르는 그 마음이 평상시도다.




비 오는 날도 있고 맑은 날도 있고 가문 날도 있고 추운 날도 있고 더운 날도 있고 그럼 해탈은 어떤 거냐, 날씨가 그냥 그런 게 좋은 세상이 아니고 내가 비가 오면 우산 쓰고 나가고, 추우면 옷 하나 더 입고 가고, 나가서 더우면 옷 하나 벗고 가고, 이런 식으로 그때그때 일어나는 일들에 대응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지 해탈, 바꿔서 내가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 거기에 내가 능히 대응하는 게 해탈이다. 이런 얘기예요.

<법률 스님>

인생은 늘 문제의 연속이다. 문제를 줄이고자 하는 5S 개념의 첫째인 정리는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는 걸 의미한다. 소유는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열망이나 대상에 대한 집착을 포함하므로 무소유는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을 정리하는 것이다. 마음속 아집을 덜어내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무소유의 마음으로 현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게 투자자의 마음이어야 한다.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자유로운 만큼 현상에 자신을 맞추면서 대응할 수 있는 법이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인정하는 만큼 시장의 현상을 인정하면서 따를 수 있는 법이다. 마음으로 인정하는 게 대응이며, 대응하는 자체로 해탈이다.




특별한 눈이 뜨인다면 직면하는 파동의 모든 순간이 (흐르는 강물처럼) 결국 하나로 이어지는 큰 흐름을 볼 수 있겠지. 특별함을 갖는 과정은 여전히 때로는 불안하고, 때로는 두려울 것이다. 특별하게 보이더라도 여전히 마음은 흔들릴 것이고, 다 잡기 위해 애써야 할 것이다.

‘이미 불은 붙었고, 숱한 실패의 기억들로 인해 어렴풋하지만 강하게 직감한다. 꺼지지 않을 것을, 선명하게 타오르는 불꽃 아래는 헤아릴 수 없는 유전이 있다. 꾸준함이 생의 광구에서 유전을 발견했다. 남은 건 선택의 문제다. 그다음 당연히 믿는 건 꾸준함이 변화시킨 책임에 대한 태도다. 그 당연함에서 생의 결과는 결정될 것이다. 의지가, 글이 깊어지는 것만큼 실천이, 대응이 깊어지는 건 자연의 이치다. 꿈을 향한 열정이 꾸준하게 이어져 왔다는 게 결과에 대한 증명이다.’

기다릴 줄 안다는 건 꾸준하다는 증거다. 성과는 어렴풋한 형체가 시간이 지나면서,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선명해지듯이 천천히 또박또박 온다는 것이다. 성과에 있어 중요한 건 방향이지만, 그보다도 더 꾸준한 걸음이어야 운의 여지가 커지게 된다.




최고의 품질과 최고의 생산량, 두 마리 토끼를 쫓는 목표에는 모순이 있다. 두 개를 동시에 취하기는 어려운 법, 어렵기에 조화로움을 놓치기 쉽고 하나에 치우치게 되고, 치우치는 만큼 하나는 소홀해지게 된다. 둘 다 취하려는 게 욕심이고, 욕심의 그림자가 성급함이다. 이처럼 욕심은 자신을 스스로 모순되게 하기에 화를 입을 여지가 커지게 된다. 양에 치중하면 질이 저하되고, 질에 치중하면 속도는 더딘 게 세상사 자연스러운 이치다. 효율에 따라 선택해야 한다. 세상사 다 좋을 수는 없다. 세상사 선택의 문제다. 양과 질, 인간 본성의 기본값은 양적이다. 양적인 건 속도를 취하기에 성급함에 가깝고, 넓이라는 과시를 취하기에 욕심에 가깝다. 이에 반해 질적인 건 천천히 또박또박 내면을 취하기에, 자신을 벗 삼는 것이기에 인간적 변화에 가깝다. 양적인 게 공간의 개념이라면 질적인 건 시간의 개념이다. 이 의미는 순서 즉 제대로 된 시간을 의미한다. 질적인 게 양적인 걸 우선해야 양적인 게 질적인 것에 의해 임계점에서 폭발하는 커다란 행운을 만날 여지가 커지게 된다. XY 축 함수에서 공간 즉 수익은 오직 시간 속에서 지속한다. 투자자가 꿈꾸는 수익의 해답은 지속 즉 반복에 있다.




대개 결과에 대한 집착은 나중이라는 허상이 지금이라는 실상을 흐리게 만든다. 그렇게 찬란해야만 하는 순간들을 신기루로 만들어 버린다. 과정으로 충만해야 하는 오늘의 실상이 허상에 묻혀 욕심으로 변질되어 버리고, 성급함에 소중한 것들이 묻혀버린 채로 나이만 더해가게 된다. 대개 투자의 행태는 이와 같다. 허상을 좇다가 허무하게 송장처럼 송두리째 소중한 인생을 소비하는 걸 허송세월이라 한다. 과거의 그대가 했던 그 세월 말이다. 머리로 쓰인 글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건 팔과 다리의 몫이다. 실천하지 않는 글은 허상이고, 실천 속에서 쓰인 글에서는 사람의 향기가 나게 된다. 투자자가 지속하기 위해서는 관점이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 고정해 둘 자기 확신이 내면에 깔려 있어야 한다. 지금의 확신은 기술은 진보한다는 것, 역사는 필연적인 붙임은 거듭되겠지만 발전한다는 것이다. 그 필연적 붙임이 파동은 등락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지속은 그 붙임을 취하고자 함이고, 그 과정에서 질적으로 성장하기 위함이다. 양적인 것과 결과, 속도는 지식스러움에 속하고, 질적인 것과 과정, 꾸준함은 지혜로움에 닿아 있다. 양적인 건 팽창이란 단어와 어울리고, 질적인 건 성장 즉 단단함을 담고 있다. 양적인 건 허상, 과시적 느낌인 데 반해 질적인 건 실상, 내면적 어감이다. 투자자는 속도보다 꾸준한 노력으로 성장한다. 인내로 버티면 투자자에게 성장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투자에서 손실 상태이면 시간은 약이 되고, 이익 상태에서는 시간은 오히려 독이 되기 쉽다. 손실을 짧게 자르지 못하는 편향으로 자르지 못한 채로 시간이 지날수록 체념의 잠을 푹 자게 되지만, 이익을 길게 가져가지 못하는 편향으로 길게 가져가지 못한 채로 줬다가 다시 뺏어갈 것만 같은 조바심에 오히려 밤잠을 설치게 되는 게 일반적인 심리다. 정확하게 반대로 손실이면 손절에 덤덤해야 하고, 이익이면 익절에 여유로워야 한다. 자기 것은 조금도 내어놓지 않은 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다 먹으려는 욕심으로 늘 심리에 탈이 나는 법이다. 자기 것도 내어주고 받으면서 무릎에서 어깨까지 이 마음이 투자하는 마음 즉 덤덤함이자 여유로움이다. 시간을 통제하면서 고점 매도와 저점 매수를 반복하는 것 그리고 손실을 통제하면서 손실은 짧게 이익은 길게 가져가는 복리를 반복하는 게 진짜 투자다. 투자에서의 모든 배움은 ‘자기감정을 통제하기 위해서’를 향하게 된다. 확률의 지독한 유혹, 어떤 상황에서도 특히 손실 상황에서는 더더욱 깊이 파고드는 가능성의 덫에 걸려드는 노예로서의 투자가 아니라 투자자는 자신이 세운 원칙이 돈의 주인이 되도록 함으로써 투자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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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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