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셈을 위해 애쓰지만, 심리에서 군더더기가 빠질 때까지 버티는 게 우선이다. 심리가 복잡할수록 배는 산으로 가게 되고 애매하고 어려운 상황들과 더 자주 맞닥뜨리게 된다. 매번 어디로 갈지는 모르지만, 유리한 방향이 어느 쪽인지는 가늠할 수 있고, 틀렸을 때나 실수했을 때 어떻게 대응하는지가 실력이다. 파동은 망망대해에서의 나침반이자 등대를 보면서 항해하는 것과 같다. 주가의 위치를 알고 추격하지 않으면 66% 확률, 모든 일에는 시간이 필요함을 받아들여야 통찰로 이어지는 시간을 버텨낼 수 있다.
덧셈을 위해 애쓰지만, 투자의 바탕은 뺄셈이다. 다들 더하기 위해 투자를 시작하지만, 돈만 빼고 실패하거나 생각하는 마음을 빼서 이루거나 둘 중 하나로 귀결된다. 인간 본성으로 인한 실수의 여지나 위험을 높이는 것들을 하나씩 제거하는 과정이 투자의 목표여야 한다. 기법을 더하고 돈을 더하고자 했던 덧셈의 꿈에 균열이 생기고 무너지면서 생각하는 마음에서의 뺄셈은 시작된다. 빼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이 필요하고 충분히 뺄 때까지 버티는 게 목적이 되어야 한다. 애매하거나 어려워서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 이론과 실제의 괴리로 너무 복잡한 것들, 오히려 방해되고 소음인 것들, 자신에 맞지 않아 자꾸만 실수로 이어지는 것들을 하나씩 빼야 한다. 대개는 무언가를 빼기보다는 추가하려는 본성으로 인해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투자는 ‘기다림의 미학’ 인내에서 시작된다. 투자는 노력과 결과가 비선형적이기에 좌절하고,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원칙을 포기하기 쉽다. 최악의 결과는 조바심으로 거래의 소용돌이에 빠져 손실을 불려 나가는 것이다. 투자는 먼저 움찔하는 사람이 지는 게임이다. 시장이 먼저 보여주느냐!, 아니면 투자자 심리가 먼저 흔들리느냐! 심리 게임이다. 원칙으로 정한 자리를 기다리고, 심리에서 군더더기가 빠질 때까지 버티면서 시장의 흐름에 순응하는 법을 찾아가는 심리 게임이다.
주식은 적어도 일봉의 큰 흐름을 보아야 하고, 선물에서는 전날에 이은 큰 흐름에 따라 크게 보아야 큰돈을 벌 수 있다. 깊은 물에 큰 물고기가 살 듯이 큰 흐름을 보아야 큰돈의 흐름이 보이지 않겠는가? 작은 수익에 연연하면서 작은 흐름에 꽂히게 되면 티끌 모으다 폭삭 주저앉거나, 가랑이에 옷만 젖게 된다. 현재 주가의 위치에 대한 통찰의 깊이가 큰돈과 연결된다. 도움닫기를 위해 개구리가 움츠리고 있듯이 수도승이 되어 고독하게 운이 많이 작동하도록 (시장에 감사할 일이 많이 생기도록) 염불을 외워야 한다. 파동은 등락한다. 몸집이 가벼운 개미이기에 (효율적이고 융통성이 많아 치고 빠질 수 있는 강점이 있기에) 긍정적인 경험들이 감각으로 이어지면 능히 확률을 높일 수 있다. 선인들의 선례대로 세운 원칙을 지킬 수 있느냐? 지키면서 반복할 수 있느냐? 이게 관건일 뿐이다. 확률을 다루는 최적의 방법은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단순함이다. 확률이 높은 방식을 찾는 게 원칙을 세우는 일이고, 원칙은 전체를 아우르는 단순함에 닿아 있어야 한다. 복잡할수록 배는 산으로 가게 되고 애매하고 어려운 상황들과 더 자주 맞닥뜨리게 된다.
사람이 성장의 정점을 지나 몸에서 수분이 빠지면서 나이가 들어가듯이, 사계절이 순환하듯이, 달이 차면 기울듯이 존재하는 모든 건 파동을 그리면서 등락한다. 기대치를 내려놓고 그저 파동을 그리면서 등락할 수 있느냐! 손실은 짧게, 이익은 길게 등락하면서 마디를 챙겨 누적할 수 있느냐! 이게 본질이다. ‘파동은 등락한다‘ = ’챙겨야 한다‘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slowly, ’천천히‘ 기다림의 미학이자 돈이 되지 않고 버텨야만 하는 필연의 시간을 이해했음이다. clearly, ’또박또박‘ 대응의 예술이자 절대 쉽지 않고 다 좋을 수 없음을 이해했음이다. 해외선물 파동은 대개 평균 진폭을 채우면서 등락하기에 아쉬워할 필요도, 후회할 필요도 없다. 내일도 태양은 뜨고 그렇게 평균 진폭을 채우면서 반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손실에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흔들리는 파동의 야유에도 재차 리듬을 맞추어가며) 이익으로 전환할 수 있는 실력이 그대 안에 있을까? 이렇게만 된다면 그대가 걱정할 게 무엇인가? 끝없는 맞고 틀리고·이익과 손실의 반복일 수밖에 없는 시장에서 손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대부분이 손실에서 심리가 흔들리고 원칙은 무너지게 된다) 흐름을 다시 탈 수 있다면 그대가 걱정할 게 무엇인가?
투자자가 보유했을 때 심장이 떨리지 않는 날은 아마 투자자로서 은퇴하는 날일 것이다.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생존 도구인 돈을 걸었을 때 매번 흔들리는 파동처럼 떨리기는 모두가 매한가지다. 깨치고 깨치면서 조금씩 덜해지면서 여유로움과 덤덤함이 더해질 뿐이다. 시장에서는 돈과 심리가 동일 선상에 놓이면(진입하게 되면) 욕심에 눈이 멀게 되고 돈을 좇아 자꾸만 앞으로 나아가기에 시소에서 무게 중심은 기울게 되면서 늘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원칙으로 정한 선은 시소의 무게 중심과도 같다. 선 위에 주가가 있다면 매수가, 아래에 있다면 매도가 유리하다고 보면 된다, 매번 어디로 갈지는 모르지만, 유리한 방향 즉 무게 중심이 어느 쪽으로 향하는지는 알 수 있다.
등락군자(騰落君子) = 자르고 챙기고를 반복하는 투자자 or 고점매도·저점매수로 등락하는 마디를 꺾어 누적하는 투자자 or 손실은 짧게 자르고 이익은 손실 마디보다 더 길게 가져가면서 우상향 비탈길을 오르는 투자자 or 손안의 한 마리 새(원금)를 만족하면서 수익보다는 잃지 않는 데에 집중하는 투자자를 의미한다. 언제든지 틀릴 수 있고, 어디에서나 실수할 수 있지만 틀렸을 때나 실수했을 때 어떻게 대응하는지는 실력이다. 포기하지 않고 반복과 복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투자자가 외로이 망망대해를 헤매다 결국에는 닿게 되는 항구가 바로 마음의 평화(inner-peace)라 불리는 각자의 내면에 있는 항구다.
한동안은 아무리 애를 쓰면서 사색에 골몰해도 별다른 소재가 떠오르지 않다가 어느 날은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면서 번쩍이는 소재들이 쏟아진다. 매매도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꼬이기만 하다가 어느 날은 쉽게 되고 잘 풀리기만 한다. 그렇게 인생과 시장의 깊이를 알아가는 건 끊임없이 노력하는 ’애씀‘에 대한 보상이다. 확률적인 것들을 다룰 때 감정의 개입은 필연적이기에 치열함을 기반으로 한 체계적인 훈련과 독서를 기반으로 한 인문학적 소양은 반드시 요구되는 ’애씀‘이다. 강을 가로막은 거대한 댐이나 물을 가두어둔 견고한 저수지가 너무나도 작은 구멍으로 허물어지듯 여지를 허용하면 여지가 여지를 넓혀 원칙은 느슨해지면서 또다시 무너짐을 반복하는 게 인간의 마음이기에 실전에서 돈과 심리가 동일 선상에 놓였을 때 생각에 관한 생각은 비로소 통찰의 깊이로 향하게 된다. 투자자의 궁극인 통찰은 실전에서 싹을 틔우고 푸르름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투자자 각자의 관점만이 일관성을 보장한다. 일관성은 반복을 보장하고 누적의 토대가 된다. 원칙은 일관성의 토대 위에서 푸르른 나무가 되고 그렇게 성장하면서 수익이란 열매가 풍성하게 열리게 된다.
’사람이 문장을 지니는 것은 초목에 꽃이 피는 것과 같다‘
<다산 정약용>
투자자가 파동을 그리는 것은 망망대해에서 배에 나침반이 있는 것과 같고 등대를 보면서 항해하는 것과도 같다. 건강함에 감사하면서 그냥 걷는 게, 살아있음에 감사하면서 그냥 하는 게, 내가 죽으면 세상도 끝장이기에 편안하게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게, 세상사 너무 애쓰고 붙들어도 올 건 오고 갈 건 가는 법이기에 그냥 기대치를 버리는 게, 시장은 지극히 확률적임을 알기에 그냥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는 게 그렇게 각자의 내면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보는 게 현명하지 않겠는가? 손실을 짧게 자르는 건 꼬리 사건이란 만일을 대비하기 위함이자 파산하지 않을 안전장치 속에서 투자를 도구로 끊임없이 파동을 그리면서 내면으로 다가가기 위함이다.
고점 부근에서는 매수하지 않고 저점 부근에서는 매도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건 그 부근에서는 가지 않는다는 확신이 아니라 확률이 낮다는 관점 때문이다. 확률은 표본의 증가로 옳음이 증명되는 세계이고, 표본의 증가는 반복을 전제로 한다. 확률이 낮으면 반복으로 누적되지도 않을뿐더러 반복할 수도 없다. 파동은 지속해서 추세가 이어질 확률보다 등락할 확률이 더 높다는 게, 그렇게 등락한다는 게 일반적이다. 인생사도 만족하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거나, 제 몫 이상을 탐하게 되면 탈 나기 일쑤이듯이 ’가거나 혹은 가지 않거나‘ 그사이에 가는 척 붙이는 trap이 존재하기에 고점과 저점 부근에서 따라가서는 곳곳이 지뢰밭이고, ’상승 혹은 하락‘ 그사이에 심리를 흔드는 횡보가 존재하기에 추격해서는 곳곳이 포위망이다. 고점과 저점 부근에서 따라가지 않고 추격하지 않으면 66%의 확률 게임을 지속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적어도 최소한의 목표 지점이 되는 앞고점과 앞저점과의 거리만큼 눌림과 반등의 폭만큼 심리가 편안해진다고 보면 된다.
괜찮은 뭔가를 지나치게 밀어붙이고, 결과를 지나치게 빨리 얻으려 하고, 지나치게 짜내려다가 오히려 역효과가 돌아온다는 것을 역사가 보여준다. 모든 일에는 적절한 규모와 속도가 있다. 그 선을 넘으면 문제가 생긴다. (중략) 생물학자 홀데인은 “모든 동물에게는 가장 알맞은 크기가 있다. 그리고 크기가 변하면 필연적으로 형태도 변한다”라고 말했다. 가장 알맞은 크기, 이는 모든 것이 원활하게 돌아가는 적절한 상태를 말한다. 이때 크기를 늘리거나 속도를 높이면 적절한 상태가 깨지기 쉽다. 삶의 많은 영역에서 그러하다.
<불변의 법칙 – 모건 하우절>
lower leverage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과도한 leverage로 뇌동하는 지경에서 헤매게 되는 큰 욕심의 극복이자 성급함의 극복이다. less isolation은 추격하는 지경에서 흔들리게 되는 작은 욕심의 극복이자 초조함의 극복이다. ex-insight는 손실을 키우는 지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심리의 극복이자 서두름의 극복이다. 모든 일에는 단계가 있음을 깨쳐야 뇌동을 극복할 수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음을 알아야 추격을 극복할 수 있다. 결국 모든 일에는 시간이 필요함을 받아들여야 경험과 내공 그리고 통찰로 이어지는 시간을 버텨낼 수 있다. leverage를 높여서는 여유로울 수 없고, 추격해서는 덤덤할 수 없고, 손실을 짧게 자르면서 빠르게 실패하지 않고서는 통찰할 수 없다.
부와 행복은 두 가지 요소로 이뤄진 등식임을 항상 기억하자. 두 가지란 당신이 ‘가진 것’(현실)과 ‘기대하는 것’(기대치)이다. 98세의 찰리 멍거는 행복한 삶의 비결을 이렇게 말했다. 행복한 삶을 위한 제1원칙은 기대치를 낮추는 것입니다. 비현실적인 기대치를 품고 있으면 평생 괴로워집니다. 합리적인 기대치를 갖고, 당신이 맞이한 결과가 좋든 나쁘든 침착함과 평정심을 갖고 받아들이십시오.
<불변의 법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