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 제리 살츠는 “애써 지어내지 말라, 우선은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 목표다”라고 충고했다. 이 예술적 조언은 투자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기초를 다진다는 것은 이론을 섭렵하는 것뿐만 아니라, 시장을 있는 그대로 보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예술가가 대상을 관찰하듯 인내심을 가지고 그려지는 파동을 아이처럼 바라보는 것이 우선이다.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그 자체가 곧 무아의 경지이며, 이 응시가 깊어질 때 기술은 생명력을 얻고 지식은 비로소 지혜로 향한다.
투자자는 누구나 추구하는 요란한 지식의 단계를 넘어,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소수의 지혜를 향해 천천히 또박또박 걸어가야 한다.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영역이며, 지식이 서 말이라도 경험이라는 실로 꿰어내야만 비로소 지혜라는 보배가 된다. 지혜롭지 못한 지식은 버틸 힘이 없다. 지식은 성급하고 탐욕적이며 복잡함을 즐기지만, 지혜는 본질만을 남기기에 단순하다. 지식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다수의 몫이라면, 지혜는 부가 그러하듯 오직 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는 고귀한 영토다.
시장이 그리는 파동을 바라보는 것이 투자의 시작이자 끝이다. 대부분 '이렇게 되어야만 한다'라는 지어낸 시나리오에 갇혀, 눈앞의 선명한 파동을 왜곡하다 곡소리 내며 탄식한다.
우리는 너무나도 인간적이기에 감정의 부추김을 견디지 못하고 막연한 기대와 망상, 그리고 기도로 점철된 뇌동의 유혹에 빠지곤 한다. 또한 너무나도 사회적이기에 나만 소외될 것 같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끝자리에서 추격을 일삼기도 한다. 그러나 이 본능적인 뇌동과 추격만 멀리할 수 있다면, 시장에서 크게 잃는 일은 드물어질 것이다. 그렇게 끈질기게 생존하며 버티는 과정에서 얻는 깨달음은 마침내 시장의 ‘운’과 소중한 ‘인연’을 맺어주게 된다.
손익이나 수익이 나지 않는 지루한 시간과는 상관없이, “지금 원칙을 반복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당당히 답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내 시작은 미약하였으나”라고 읊조리며 홀로 굳건히 설 자격이 충분하다. 그렇게 심어진 자신만의 투자 묘목은 시간 속에서 “내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약속을 품은 거목으로 성장할 것이다.
투자 묘목을 비바람 속에 방치하는 것이 뇌동과 추격이다. 긍정적으로 달라진 찬란한 ‘미래의 나’를 마주하게 하는 것은 막연한 다짐이 아니다. 오직 ‘현재의 나’가 지금 실천하는 정직한 행동뿐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 피천득 선생의 이 통찰은 투자의 세계에도 고스란히 투영된다. 치열한 자기 검증과 확신을 통해 세운 원칙이 성공을 위한 소중한 인연인 줄 알면서도, 자꾸만 부러뜨리고 놓치며 다시 세우기를 반복하는 것이 보통의 투자자다. 현명한 이가 스치는 인연조차 살려내듯, 보통의 투자자가 현명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돈이 되지 않는 시간’을 견뎌내며 원칙을 살려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원칙을 지킨다는 것은 자신의 관점을 일관성 있게 유지한다는 뜻이며, 이 일관성은 원칙이라는 틀이 스스로 확대 재생산될 수 있도록 보장한다. 지키며 버티는 시간의 부피만큼 투자의 지속가능성은 담보된다. 집착과 욕구, 잡념을 극복하며 원칙을 사수하는 일은 인간의 뇌 구조상 실로 어려운 고행이다. 그러기에 투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마주하고 정화하며 나아가는 ‘자신에게로 떠나는 긴 여행’이다.
투자를 운명으로 만드는 것은 일관성이다. 소중하게 세운 원칙을 '수익이 나지 않는다'라는 핑계로 길가에 버려진 인연처럼 홀대해서는 어리석을 뿐이다. 현명한 사람은 자신에게로 떠나는 여행길에서 원칙이라는 인연의 손을 놓지 않는다.
경청은 단순히 듣는 행위를 넘어 상대의 내면에 깔린 동기와 정서까지 이해하고 피드백하는 공감의 기술이다. 투자자에게 경청이란 곧 시장의 흐름에 순응하는 것과 같다. 과거 공장 관리자로 근무하던 시절,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추가 설비를 구상하던 내게 한 외국인 작업자가 건넨 단순한 제안은 추가 설비보다 훨씬 유용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누구나 알 수 있었으나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그 작은 변화는, 내 고집과 확신을 버릴 때 비로소 들리기 시작했다. 경청은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익어감’의 증거이며, 타인의 경험을 통해 내 실수의 여지를 줄이는 가장 효율적인 삶의 비법이다.
자신의 욕구와 생각을 비워 타인의 리듬에 맞추는 경청의 과정은, 투자자가 자신을 비워 시장의 파동에 순응하는 훈련과 맞닿아 있다. 투자는 필연적인 복잡계이기에, 타인의 말 한마디에서 뜻밖의 자기모순을 발견하고 ‘미래의 나’를 위한 결정적인 단서를 얻기도 한다. 누군가 내게 진심을 말해 줄 수 있고, 내가 그것을 온전히 들을 수 있다면 말이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승열의 「날아」 가사에 귀를 기울여 본다. “거기서 멈춰 있지 마. 그곳은 네 자리가 아냐. 견딜 수 있어. 날개를 펴고 날아.” 그 노랫말을 경청하며 비상을 꿈꾼다. 이제는 견딜 수 있다. 나를 비워 시장을 소리를 듣고, 마침내 날개를 펴고 날아오를 준비가 되었다.
가장 큰 소리는 나를 비울 때 들리는 법이다. 고집의 방에 틀어박힌 채 확신이라는 소음 때문에, 시장이 속삭이는 결정적인 신호를 놓치곤 한다. 경청은 나를 낮추는 겸손이자, 시장의 지혜를 내 것으로 만드는 가장 효율적인 투자다.
모건 하우절이 그의 저서 「불멸의 법칙」에서 변하지 않는 것들에 주목했듯, 투자자는 인간 마음의 근본은 쉽게 변하지 않으면서도 그 감정은 수시로 요동치는 마음의 모순에 주목해야 한다. 마음은 본래 믿을만한 대상이 못 되며, 투자는 필연적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전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 혼돈 속에서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진리는 “원칙을 세우고 지키며 버티는 시간만큼 복리의 마법을 누릴 수 있다”라는 사실이다. 이 진리에 확신을 갖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원칙과 그 반복, 그리고 누적되는 시간의 합으로 부의 징검다리를 건너갈 수 있다. 투자자에게 원칙이 부러진다는 것은 그동안 쌓아온 모든 성취가 매번 원점으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원칙이 자꾸만 부러지는 근본 원인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감정과 원칙이 수시로 뒤엉키기 때문이다. 세상 그 어떤 기법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원칙을 지키겠다”라는 다짐만큼의 무게를 가지지는 못한다.
지키겠다는 다짐에 무게를 더할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원칙이 바위처럼 무거우면 파도처럼 변하는 가벼운 감정이 머물 틈이 없다. 결국 최후의 승리는 가장 단단한 다짐을 끝까지 지켜낸 자의 몫이다.
대개의 투자자는 기법과 심리가 반씩 겹친 두 동그라미의 합집합이 투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장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법이라는 동그라미를 스스로 작게 그리게 된다. 만약 커다란 직사각형에 기법이라 쓰고 그 안에 심리라는 작은 점원 그려 두었다면, 그것은 아직 투자의 신기루를 믿고 있다는 증거다. 내공이 깊어질수록 그림은 완전히 뒤바뀐다. 아주 커다란 직사각형에 심리라고 적고, 그 구석에 아주 작은 동그라미를 그려 기법이라 적게 되는 것이다. 이 직사각형이 크면 클수록 투자자는 흔들리지 않는 상수가 되며, 그 거대한 직사각형이 바로 평상심의 실체다.
시장에 머무는 모든 투자자는 언제나 바둑의 ‘미생’ 상태다. 아직 완전히 살지 못했기에, 공격보다 수비에 치중해야 한다. 심리라는 직사각형을 넓히는 것은 곧 평상심의 영토를 넓히는 일이며, 그 영토가 넓어질수록 멀리서 객관적 시선으로 전체를 관망하게 된다.
심리를 갈고닦는 것이 기본을 다지는 것이다. 투자의 성패는 작은 기법의 동그라미 안이 아니라, 그 동그라미를 감싸 안은 거대하고 단단한 심리의 직사각형 안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귀찮거나 불편하다는 이유로, 혹은 내 주관과 다르다는 이유로 일상의 법규조차 지키지 않는 투자자가 과연 시장의 원칙을 제대로 지켜내겠는가? “악법도 법이다”라며 목숨을 내놓았던 소크라테스의 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설령 중간에 잘못됨을 깨달았을지언정 경기가 끝나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세운 원칙을 사수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 투자자는 너무나 성급하며, 욕심의 크기를 좀처럼 줄이지 못한다.
무리하게 힘이 들어갈수록 사고의 위험이 커지는 것은 세상의 상식이다. 실수의 여지와 파산의 위험이 커질수록 심리는 위축되며, 흔들리는 마음은 악수가 악수를 부르는 악순환의 수렁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다. 이 수렁에서 벗어나는 길은, 아무 파동이나 보고 아무 생각 없이 복기하며 원칙을 반복할 수 있을 만큼의 지독한 자기희생뿐이다.
원칙은 관념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내는 일이다. 희생한 딱 그 크기만큼만 수렁에서 자신을 건져낼 수 있다.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길게 보며 시장과 나의 조화로움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수렁을 건너 지혜에 이르는 길이다.
투자를 불로소득으로 접근하는 인식부터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 진입 장벽이 낮다는 이유로 너무나 미약한 준비 상태에서, 작은 그릇에 커다란 꿈을 담으려는 정서적 착각에 빠져 무작정 시장으로 달려드는 이들이 너무 많다. 그러나 투자는 차갑게 서 있는 운명이란 벽 앞에 당당히 마주 서야 하는, ‘거위의 꿈’ 그 이상의 치열함이 요구되는 고도의 감성노동이다. 투자자에게는 세 가지 거대한 산이 놓여 있다. 첫째는 체계적인 훈련과 인문학적 소양을 쌓으며 사색의 고통을 견뎌야 하는 어려움이다. 둘째는 자기 검증으로 세운 원칙을 지키기 위해 끝도 없는 기다림을 인내해야 하는 어려움이다. 셋째는 경험이 쌓여 기다림에 익숙해져도 결국은 확률의 게임이기에, 때로는 매매를 멈추는 ‘단식’을 감내하며 반복의 리듬을 지켜야 하는 어려움이다.
투자에서의 수익은 단순히 운 좋게 얻어걸린 행운이 아니다. 그것은 꿈을 믿고 자신을 지켜낸, 고도로 정제된 감성노동에 대한 정직한 대가다. 또한 외부에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원칙과 인내로 가꾼 내면 깊숙한 곳에서 보물처럼 간직했던 꿈을 하나씩 캐내는 과정이다. 시장이라는 차가운 벽을 허물고 보물을 손에 쥐는 자는, 감성의 절제를 통해 자신을 증명해 낸 사람뿐이다.
수익은 인내로 치러낸 감성노동의 보상이다. 투자는 가장 뜨거운 꿈을 가장 차가운 절제로 구워내는 예술 행위다.
사공이 많으면 배는 산으로 간다. 투자자의 내면에는 온갖 감정이 아우성치고, 정제되지 못한 어설픈 기법들이 사공 노릇을 한다. 원칙으로 노를 저어 바다로 나가지 못한 채, 부러진 원칙을 회상하며 강기슭을 어슬렁거리는 것이 평범한 투자자의 반복되는 삶이다. 손의 확신은 치열한 훈련의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손의 감각이 아닌 머리의 터무니없는 확신에 이끌려 악수를 둔다. 손에 확신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원칙을 지키는 치열함이 부족했다는 증거다. 복잡계인 시장에서 단순해지지 않고서는 결코 원칙을 반복할 수 없으며, 그 단순함은 오직 치열함을 통과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전리품이다.
투자는 기대수익과 위험의 상관관계를 이해하고, 그사이 어디쯤 나만의 원칙을 세우는 일에서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시장보다 더 위험한 자신을 알기 위해 사색해야 하며, 위험을 피하고자 기다리고,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단식(청산, 휴식)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시장과 자신을 깊이 알아갈수록 성급함은 무뎌지고 욕심은 비워진다. 그렇게 단순해진 마음 위에서 원칙은 뿌리를 내린다.
머리의 확신이 아니라, 손의 확신이 수익을 만든다. 시장의 궁극적 위험인 변동성은 늘 반복되지만, 실력을 갖춘 자에게 변동성은 더 이상 위험이 아닌 기회로 다가온다.
제대로 깊이 알수록 더욱 조심하게 되는 법이다. 앎이 깊어질수록 위험을 경계하기에, 아는 자에게 '초심자의 행운'이란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운이 실력으로 치환되어 내 편이 되는 과정은 너무나도 더디고 고통스럽기에, 많은 이들이 견디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매매하며 제자리를 맴돌곤 한다. 원칙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앎에서 오는 두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그 두려움을 원칙 아래서 용기로 바꾸어 나가는 과정은 실로 험난하기에 투자는 어려운 것이다.
투자자는 원칙이라는 든든한 나무 아래서, 마음이 아무리 보채더라도 쉬엄쉬엄 쉬어갈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대개는 마음속 성급함을 다스리지 못해 원칙이라는 나무가 자랄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절망의 계곡을 벗어나려 발버둥 치지만, 결국 욕심에 이끌려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오는 '감정의 미궁'에 갇히게 된다. 스스로 갇힌 미궁을 벗어나는 것이, 머리로 알면서도 감정을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매일 절감한다. 마음은 매 순간 다음을 다짐하지만, 차가운 현실 앞에서 그 다짐은 거듭 부러진다. 그렇게 내면은 성장하지 못한 채, 덩치만 커진 '어쩌다 어른'이 된 투자자들이 시장에는 차고 넘친다.
성장은 멈춰 서서 쉬어갈 줄 아는 인내에서 시작된다. 인내는 본능을 이긴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고귀한 특권이다. 미궁을 빠져나가는 길은 더 빨리 뛰는 것이 아니라, 원칙이라는 나무 아래 멈춰 서서 조급함을 먼저 씻어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