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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태현 Oct 09. 2024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Die Zeit geht nicht
(Gottfried Keller, 1854)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고요히 멈춰있다

우리는 그 안을 지나간다

시간은 하나의 캐러밴서라이,

우리는 그 안의 순례자들

뚜렷한 모습도 색깔도 없이,

오직 형태만을 취하는

그 안에서 너희는 녹아 없어질 때까지

떠오르고 또 가라앉는다

아침 이슬 한 방울이

한줄기 햇빛 속에 번쩍인다

하루는 진주가 될 수 있지만

백 년은 아무것도 될 수 없다

하얀 양피지

그 위에 시간, 그리고 모든 이가

자신의 붉은 피로 글을 쓴다

폭풍이 그걸 불어 날려버릴 때까지

날려간 글은 그대에게로, 경이로운 세계로,

무한히 아름다운 그대에게로,

나 역시 이 양피지 위에

그대를 위한 사랑의 편지를 쓴다

그대의 둥근 화관 안에 피어날 수 있었던 것이

내게는 기쁨이어라

답례로 나는 우물을 흐리지 않고

그대의 광휘를 찬양하노니






인간의 언어와 사고체계에서 통상적으로 시간은 흐르는 움직이는 유동적인 존재로 간주되어진다. 이는 수많은 언어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데, 그런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니?


이 시에서 시간은 인간들이 순례자가 되어 여행하는 어떠한 공간으로 그려진다. 인간들은 이 캐러밴서라이(실크로드에서 여행자들이 쉴 수 있도록 길가에 만들어졌던 집을 뜻하는 말)에 들어오고 또 떠나간다. 이 쉼터에는 색깔도 모습도 없다 - 왜냐하면 시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인간이 하는 경험에 의미가 있기에. 그렇기에 인간의 경험할 수 있는 하루는 진주지만, 경험할 수 없는 백 년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고트프리트 켈러(Gottfried Keller, 1819~1890)는 스위스의 소설가이자 시인으로, 시적 사실주의의 대표적 존재로서 '스위스의 괴테'라고 불린다. 해당 시는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에 등록된 원시를 발췌하여 번역하였다.

(원문 링크: https://www.projekt-gutenberg.org/keller/gedichte/chap060.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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